<로기완을 만나다(조해진, 창비, 전자책 2024)>
소설 <로기완을 만나다>는 이렇게 시작한다.
“처음에 그는, 그저 이니셜 L에 지나지 않았다”.
1인칭 시점으로 쓰인 소설 첫 문장은 냉랭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화자인 ‘나’는 사람사이 거리를 두는 듯하다. 못 먹고 살 정도는 아니지만 분주히 움직이지 않으면 금방 평균이라 불리는 선 아래로 떨어져 버렸기에 ‘나’는 갖고 있는 몇 안 되는 것에서 감정을 가장 먼저 덜어낸 듯하다. “…. 그 모든 사람들을 견디고 지나오면서 나는 제법 성공적으로 사회화되었다. 적당히 타성에 젖어 있고, 열정은 근거 없는 악의나 질투에 쏟아붓고, 책임을 두려워하고, 그 누구도 절실하게 필요로 하지 않는 충분히 자족적인 사람. 그러면서 늘 결여되어 있는, 잘 웃지도 울지도 않는 메마른 사람 ”. ‘나’는 타인에게는 물론, 자신을 대할 때조차 객관적이고 엄격한 진중한 편이다.
이후 ‘나’는 출연자의 사연을 들려주고 성금을 모아 전달하는 방송 프로그램의 작가로서 몇 년을 일하면서 점점 더 무감해져 간다. 그러다 연출로 재이를 만나면서 연민과 진심을 고민하게 되었고, 가벼운 동정이 아닌 진심을 담기 위해 더욱 감정을 검열한다. 그 결과 ‘나’는 절대적인 간극이라는 불변의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너와 내가 타인인 이상 현재의 시간과 느낌을 오해와 오차 없이 나눠가질 수 없다는 불변의 진리“. ‘나’는 소외와 외로움이 담겨 있는 불변의 진리가 괴로울 때도 있었지만,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기에 동시에 위안도 되었다.
위안보다 괴로움이 더 컸을까, ‘나’는 재이와 윤주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로부터 도망치듯 브뤼셀로 온다. 시사주간지에서 읽은 L의 인터뷰를 보고 방송용 대본이 아닌 소설이 쓰고 싶어졌다. 도망치기 위한 핑계이기도 했지만, L의 인터뷰에서 이방인으로서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사람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방인, 그가 바로 L이다. 브뤼셀에 와서 ‘나’는 L이 난민지위를 얻을 수 있도록 도운 ‘박’을 만나 그가 적었다던 일기장을 건네받는다. 그 일기장에는 탈북인으로서 밀입국하여 브뤼셀까지 오게 된 사연과 낯선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느낀 감정-두려움, 불안, 처음 경험하는 기쁨과 놀라움 등-들이 적혀 있었다.
‘나’는 일기장에 적힌 대로 그처럼 며칠을 살아본다. 그가 묵었다던 호스텔에서 묶기도 하고, 그가 들렸던 맥도날드, 멈춰 섰던 쇼인도 앞에 서서 그가 했던 생각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를 만나기 전, 그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자니 머릿속 복잡한 생각이 ‘나’를 괴롭게 했다. 외면상으로는 L과 같은 하루를 보냈었을지는 몰라도, ‘나’는 순간순간 그와 자신이 얼마큼 다른지 깨닫는다. ‘나’는 “가난이라 믿었던 그 어떤 날에도 생존까지 위협당한 적은 없다.” 그가 느낀 두려움과 불안, 외로움이 어떤 건지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안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렇다면 지금 느끼는 이 안타까운 마음은 거짓이 되는 걸까?
어느 날 ‘나’는 호스텔 복도에서 시끄럽고 무례한 다른 숙박객들을 향해 소리친다. 그들은 고열로 끙끙대며 앓았던 L을 향해 무시와 조롱을 날리던 당시 숙박객이 아니다. 불친절한 호스텔 안내인도 L을 안내했던 그 안내인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감정을 검열하던 ‘나’였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하고야 만다. L을 생각하며 L을 대신해서. 쏟아낸 악에는 살아남은 자이자 건강한 자로, 죽거나 죽을 만큼 불행한 이들에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지 모르는 부끄러움도 담겨 있었다. 그 순간 L은 ‘나’에게 이니셜 L이 아닌 로가 되었고, 그렇게 로기완이 되었다.
이방인은 L만이 아니었다. 당신 안에 들어갈 수 없는 나도 이방인이다. 한때는 무감했고, 어느 순간에는 집착했고 지금은 도망처버린 ‘나’는 사실 너와 나 사이에 어쩔 수 없는 것을 못 견디는 다정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헤아려보려던 내 노력은 어느 순간 무의미하게 흩어진다”라고 말했지만, 내가 보기엔 ‘나’의 도망까지도 당신과 나 사이의 오해와 오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으로 다가왔고, 흩어진 헤아려보려던 노력이 그런 순간, 순간에 유의미하게 모여져가고 있는 듯 보였다.
그리고 그 모아진 순간이 ‘만남’으로 이어져 간다. 로기완을 만나러 가는 여정에서 무책임한 게 싫어 미안하다는 말도 못 하고 도망쳐 온 자신을, 표현에 인색했던 자신을, 슬픔마저 검열했던 것을 진심이라 믿었던 자신을, 그래서 너무 많은 것을 잃은 것 같은 재이와 윤주와의 관계를 수없이 생각하고, 한없이 떠올린다. 로기완을 헤아리다 윤주와 재이를 이해하게 되고 '나'에 대해 알게 되었다. 온전히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거리를 마냥 두고 싶지도 않다. ‘나’의 진심은 그랬고 나의 진심도 그랬다.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타인인 서로에게 다가갈 용기를 얻는다. 연민과 이해는 그렇게 만나 하나가 되어 부족한 이해에 닿겠지만, 부족한 모양이라도 모이고 모여 작가가 말한 “우리가 최선을 다해 공감해야 하는 것의 전제가 될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헤아리는 노력이 나의 좁은 지경을 뛰어 넘어 다른 이방인에게로 넓고도 넓게 내달려 확장되어 갔으면 하는 바람도 생겼다.
넷플릭스 영화 <로기완>에서 로기완이 주인공이라 이 소설에서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으나, 소설에서 로기완은 만나러 가는 대상이자 동시에 만나게 해주는 매개체다. 그를 헤아리다 깨닫게 된 ‘나’의 진심은 소설 전반부와 후반부에 퍼즐처럼 짝을 이룬다. 로기완의 행적을 쫓으며 결국 ‘나’라는 화자는 소설보다 일기에 가까운 글을 썼다고 고백한다. 주인공의 이름을 특정하지 않고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풀어간 건 화자가 자신을 찾아가듯 읽는 독자도 로기완을 만나러 가는 여정에서 자기 자신을 헤아려 보길 바라는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읽은 소설 중에 가장 많은 문장에 줄을 쳤다. 나는 아직 소설 초반 ‘나’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그래서 책을 읽어 내려갈 수록 후반부의 나를 찾게 해 줄 로기완을 만나고 싶어졌다. 이미 만났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