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드라마 <이 강에는 달이 흐른다(2025)>
인연을 설명하는 ‘붉은 실’ 설화가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붉은 실은 제 인연을 알아보게 하는데, 이를 “홍연”이라 한다. 홍연으로 엮은 두 사람은 어떤 고난이나 시련이 닥쳐도 결국 만나게 된다. 이번 생이 아니면 그다음 생에서라도. MBC 드라마 <이 강에는 달이 흐른다>는 ‘인연’에 대한 이야기다.
이 드라마에는 지키고 싶은 것이 있는 세 인물이 등장한다. 좌의정 김한철(진구 분)은 사랑하는 정인을 지키지 못했고, 그녀를 위해 복수에 나서며 조선을 무너트린다. 김한철의 복수 속에 서장자였던 이희(김남희 분)가 왕이 되지만, 꼭두각시 왕이었던 그는 왕좌를 지키고자 김한철에게 소중한 이들의 목숨을 내어주고 만다.
세자 이강(김태오 분)은 계사년에 사랑하는 어머니와 부인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된 배경에 김한철의 계략이 있음을 알았으나, 힘이 없어 그들을 지키지 못했고 무력감 속에 긴 시간을 아파한다.
이들 모두 지키고자 하는 것을 힘이 없어 지키지 못 한 동일한 경험을 했지만, 상실로 인한 아픔을 다루는 방식은 저마다 달랐다. 김한철은 모든 것을 없애는 파괴로 자신의 사랑을 지키고자 했으나, 이강은 사랑하는 이를 잃는 슬픔을 다른 누구도 겪지 않게 한다. 오히려 타인의 사랑을 응원하고, 슬픈 순간을 함께 위로하며 품는 방식으로 지켜낸다. 그렇게 적이 될 수 있었던 이운(이신영 분)과 김우희(홍수주 분)를 얻었고, 가까이에서 사랑하는 이와 살아가는 또 다른 삶을 지켜보는 행복을 누리게 된다.
지키기 위해 내어 주는 것이라 했던 아버지 이희처럼 이강도 내어준다. 다만 자신의 안위를 중시하던 아버지와 달리, 이강은 자기 자신을 내어준다. 모든 악행이 밝혀졌음에도 전세를 역전시키고자 사병을 끌고 온 김한철에 의해, 이강은 또 한 번 사랑하는 사람 달이를 잃은 위기에 처한다.
운명의 장난일까, 아니면 붉은 인연의 실 ‘홍연’의 이끌림일까? 박달이(김세정 분)는 죽음 직전 살아서, 기억을 잃은 연월이었다. 계사년 이후 5년간 김한철의 눈을 피해 가며 그날에 대해 조사하던 중, 우연히 죽은 부인과 닮은 봇짐장수 박달이를 만난다. 머리로는 그녀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지만, 죽은 부인과 말과 행동까지 닮은 달이에게 자꾸 마음이 향했다.
죽은 부인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달이를 그만 보겠다고 결심한 날, 두 사람은 강 물에 빠지게 되고, 달이는 물 공포증이 있던 이강을 살리기 위해 애쓴다. 그때 달이의 손 목에서 강하고 붉은빛이 피어나 두 사람을 감싼다. 이 날 이후 두 사람의 영혼이 바뀌는 기묘한 일이 벌어진다. 바뀐 몸으로 두 사람은 서로의 삶을 이해하게 되며 더 깊이 사랑하게 된다. 서로를 간절히 그리워했기에 스쳐 지나갈 인연을 끌어당긴 것이다.
이후 우연한 기회에 몸이 바뀌는 법칙을 발견하게 되고, 이강은 그 법칙을 사용해 폭주한 김한철의 칼에 상처 입은 달이와 몸을 바꾼다. 그녀 대신 자신이 죽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또 다른 기적을 만들어 달이는, 그러니까 이강은, 살아난다. 두 사람을 오래 지켜봐 온 인연과 혼인을 관장하는 신 월하노인은, 이 모든 일은 서로를 간절히 그리워하던 두 사람이 만든 기적이라고 말했다.
인연은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 인연을 지키는 건 끝까지 품을 들인 관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닐까? 지키고 싶은 게 있던 세 사람 중, 끝까지 지켜낸 건 이강뿐이었다. 김한철과 이희가 지키고자 선택한 방식에는 지키고자 한 대상을 향한 노력이 없었다. 그것은 일방적인 사랑이었고, 희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과연 김한철은 홍연의 힘을 알았을까. 홍연은 어떤 고난이나 시련이 닥쳐도 결국 만나게 해 준다는 면에 모든 것을 이기는 힘이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사랑은 만능이 아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행동이 용납될 거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 속 대차처럼, 사랑은 행복과 기쁨과 설렘과 용기만 주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원망, 아픔과 슬픔, 절망과 불행도 함께 안겨 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들을 이겨낼 힘을 준다. 그 본질을 붙잡을 때 우린 지키고 싶은 삶의 많은 영역들, 그중에서도 소중한 인연들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어떠한 노력 없이 단지 ‘사랑’이라는 감정만을 내세운다면, 나도 언제든 좌의정 김한철이 될 수 있다.
팬데믹을 겪으면서 사람 간에 거리가 생겼고, 세상은 그때 경험한 편안함에 안착한 듯하다. 상대의 감정과 상황을 살피는 일은 품이 드는 귀찮은 일이 되고, 그보다 내 감정과 안위가 더 중요해졌다.
나 역시 집순이이자 혼자서 하는 일에 익숙한 사람으로, 혼자 있을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나 연말이 되면 혼자서 이룬 일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품을 들여 관심을 기울여 주고, 알게 된 필요를 기꺼이 채워 준 이들의 사랑 속에 안온한 일상이 누렸다. 준 것보다 받는 게 더 많다고 느껴질 때마다 도둑이 된 기분이 든다. 그러나 기분 좋은 부담이다.
소중한 인연들이 보여준 사랑을 세어보며 사랑의 매무새를 고쳐 본다. 당신을 헤아리며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고 기도해 주며, 따스한 온기로 추운 시기를 함께 지나가야지. 수고하는 사랑이 가진 가치를, 드라마 <이강에는 달이 흐른다>를 보며 생각해 보았다. 나의 오래된 인연들에게 이 자리를 통해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