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헤어지기 위해 필요했던 기다림에 대하여

jtbc 드라마 <경도를 기다리며(2024)>

by 양보

드라마 <경도를 기다리며> 에서 경도(박서준 분)와 지우(원지안 분)은 두 번을 헤어졌고, 서른을 훌쩍 넘어 다시 만난다.


스물에 만난 두 사람은 서툴렀다. 처음 지우가 유학생이며 자림어패럴의 둘째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만해도 두 사람 사이에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하지만 지우가 선물한 옷의 가격이 엄마가 한 달은 부업을 해야 벌 수 있는 돈과 같다는 걸 알았을 때, 경도의 마음에 작은 파장이 일었다. 그 파장은 어려서 인지, 가난해서 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날도 떡볶이를 먹겠다는 지우에게 경도는 돈가스를 사주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지우는 자신을 '서지우'가 아닌 '자림어패럴의 딸'로 인식하게 되면서 관계가 틀어지는 순간을 잘 알고 있았다. 그렇게 지우는 경도 곁을 떠났고, 경도는 지우가 떠난 이유가 궁금했지만 알려하지 않았다. 풋사랑은 그렇게 끝났다.

스물여덟에 재회는 인연임을 확신하게 했다.

다시 만나게 된 운명에 감사하며 두 사람은 경도의 옥탁방에서 인생에서 가장 충만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경도의 아버지가 사고로 목숨이 위태로워지면서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아졌고, 그러던 어느 날 또다시 지우가 말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경도는 지우가 떠난 이유를 곱씹으며 어떤 날에는 자신의 부족함을 탓했고, 어떤 날에는 나쁜 년이라 욕하며 술로 인생을 탕진했다. 그러나 그 모든 생각의 끝은 언제나 ‘가여운 지우’였다.


십 년이 흘러 이혼 소식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 지우와 경도는 세 번째 재회한다. 연인 이전에 친구였기에 경도는 힘들어하는 지우를 곁에 지킨다. 그러면서 부족함 없어 보이던 지우의 인생이 가진 가난함을 본다.


지우의 엄마는 딸의 인생을 휘둘렀고, 지우는 가족의 평안을 위해 언제나 그 뜻을 따랐다. 경도는 지우가 처음 선택한 일이였다. 하지난 경도의 곁에 있기를 바랄수록 스무 살 때처럼 상처 입을 경도의 미래가 보였다. 지우 또한 모든 생각의 끝이 자신보다 경도에 대한 걱정이 었다. 그러나 그 마음을 전하지 않았기에, 말도 없이 도망친 자신은 경도를 기다릴 자격조차 없다 여겼다.


내 눈에는 오매불망 지우를 기다린 경도의 간절함보다, 기다릴 자격조차 없다며 숨죽여 경도를 그리워한 지우의 애절함이 더 크게 다가 왔다. 비로소 이 드라마의 제목이 왜 <경도를 기다리며>인지 알게된 순간이다.


떠나온 순간부터, 떠나온 모든 자리에서 언제나 경도를 기다려온 지우에게 경도는 곧 ‘고도’ 였다. 두 사람이 함께 준비했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고도는 끝내 오지 않는다. 그러나 연극 속 인물들은 고도가 올 것이라는 기대를 포기하지 않고 살아간다.


"고도는 오지 않아도 넌 올거야?"

"난 어디 안 갈건데? 서지우 옆에 꼭 붙어 있을건데"

"만약에 내가 널 기다리면, 넌 올거야?"

"오지, 난 오지."

터무니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우는 경도의 약속을 놓을 수 없었다. 온다고 믿음이 있는 기다림은 살아갈 이유가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움이 겹겹이 쌓인 기다림의 시간은 서로를 이해하는 법을 가르쳐 줬다.

두 사람의 시간은 기다림, 그것뿐이다. 강산이 바뀌는 긴 시간동안 당신을 생각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가운데 이들은 헤어진 진짜 이유를 깨닫는다. 서투른 배려도, 걱정하고 그리워하는 마음도, 도망치던 뒷모습도 모두 사랑이었었다는 걸. 말 속에 담긴 진심을 분명히 알게 된다.

그렇기에 경도는 떠난 지우를 원망하지 않았고, 지우도 변명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 괜찮았는지 안부를 묻는다. 곁에 없던 시간동안 외롭지 않았는지, 매일 밤 당신을 생각해왔다고, 기다리던 마음을 조심스레 전한다. 어떤 날, 어떤 마음으로 마주하더라도 그대를 사랑할 수 있도록 오래 준비해온 ‘기다림’으로.

비로소 헤어진 이유를 알게 되자 이들은 제대로 헤어질 수 있게 된다. 두려워 도망치던 습관으로부터, 짙은 그리움으로부터, 타인의 선택에 끌려다녀야 했던 과거에게 이별을 고한다.


또다시 이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어려움 앞에 이별을 선택하지만, 이전처럼 술로, 원망과 자책으로 자신을 망치지 않는다. 기다림을 통해 배운 인내로 자신의 사랑을 돌보며, 잘 살아간다. 다시 만날 우리의 시간을 위해. 세 번을 헤어진 이 긴 여정은 세영 언니의 말처럼 ‘잘 헤어지기’ 위함이었다.

다정하고 친밀한 언어로 대화를 나누는 드라마 <경도를 기다리며>를 보며 행복했다. 지우가 경도를, 경도가 지우를 기다리며 서로를 생각했던 것 처럼, 매주 토일 돌아오는 드라마를 기다리며 나는 저들을 생각했다. 기다림은 이토록 필요한 일이구나. 조바심보다 인내가 필요한 '잘 헤어짐'이 가져올 잘 살아갈 시간을 생각해보게 된다.


안녕은 우릴 아프게 하지만, 우아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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