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랑은 오해로 시작된다.

영화 <파반느>와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by 양보

“왜 뛰어 왔어요. 걸어와도 되는데.”

- 영화 <파반느>

나는 <파반느>로 걸어갔다.

디자인 작업을 하기 위해 적당한 백색 소음의 영상을 찾던 중, 넷플릭스 신작에 올라온 <파반느>를 재생했다. 사랑과 오해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도 모른 채.


“나를 왜 좋아해요?”

“물에 빠진 사람에게 왜 물에 빠졌냐고 물어보는 거,

그거 안 되는 거예요 “

- 영화 <파반느>


물에 빠진 듯했다.

천천히 가라앉듯, 어느 사이 작업을 멈추고 영화에 젖어들었다. 영화가 끝난 뒤에는 고민할 겨를 없이 원작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구매해 읽었다.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전부 <파반느>로 채워졌고, 내 삶은 그들을 향해 달려가는 듯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파반느>는 궁정의 느린 춤답게, 천천히 그러나 우아하게 내 삶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마치 경록과 미이 서로를 사랑하게 된 것처럼, 우아하고 아름답게 <파반느>와 사랑에 빠졌다.


영화와 소설 이야기


원작이 있는 경우

‘어느 쪽이 더 낫다’는 견해가 붙기 마련이다.

내게 영화 <파반느>와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중 어느 쪽 손을 들어줄지 묻는다면, 한쪽으로 치우칠 수 없이 둘 다 좋다는 의미로 양손을 들어 만세를 외칠 테다.


소설은 화자인 남자의 1인칭 시점으로 이야기를 전한다.


이름도 없이 그저 ‘남자’인 인물에 영화 속 ‘경록’을 덧입히자, 문장으로 쓰인 소설 속에서 그의 표정이 보였다. 어떤 시선으로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을지 상상됐다.


영화배우가 된 미남의 아버지와 어울리지 않는 외모를 가진 어머니. 이들 사이에서 자란 그에게 모든 사랑은 ‘오해’였고, 외모란 권력이었다.


이름도 없이 그저 ‘여자’인 인물에 영화 속 ‘미’을 덧입히자, 소설 속 그녀의 문장에 유독 말 줄임 표시가 많았음이 보였다. 동갑임에도 말을 놓지 못하는 주저함은 사람과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던 미정을 떠올리게 했다.


‘못난이’, '추녀'라는 말과 함께 따라붙는 세상의 매정한 시선에 다친 상처였을 것이다. 잘해주는 척 다가와 그 마음을 오해하게 만들어 놓고선, 오해했다며 비웃던 남자들을 안다. 미은 경록의 마음을 오해하지 않으려 애쓴다.


소설 속 주인공에게 이름을 붙이지 않은 건, 모두의 이야기가 되기 위함이라 들었다.

요한은 유일하게 영화와 소설에서 동일한 이름으로 등장한다. 경록과 요한이 그를 의지했던 것처럼, 요한도 두 사람을 의지했다. 나 또한 요한을 의지해 소설과 영화를 이해했다.


요한 역시 외모라는 권력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알고 있었다. 요한은 매우 부유한 사업가인 아버지와 한 때 배우였던 매우 아름다운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다. 그러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어머니의 아름다움이 시간 속에 어떻게 약해져 가는지 가까이에서 보았다. 그래서 요한과 경록은 미정을 한 여자로, 한 사람으로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영화 속 장면은 소설 속 인물을 상상하게 도왔고, 소설은 영화 속 대사와 감정을 더 깊이 이해하도록 도왔다.

사랑은 단순한 것일까?


“왜 이렇게 나한테 잘해줘요?”

“그러면 안 돼요?”

“내가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미정 씨도 나한테 잘해줘요. 그거면 돼요. “

- 영화 <파반느> 중


영화에서 미정은 "그거면 된다"던 경록에게 방울토마토가 담긴 도시락을 선물한다. 사랑은 이들의 대화처럼 단순하고 복잡하지 않은 것일까. 하지만 그 순간에도 나는 '왜 하필 방울토마토였을까?'를 생각했다. 이 질문을 함께 고민해 준 인친의 답이 인상적이었다.


보통의 과일은 깎아 두면 갈변 현상이 일어나지만, 토마토는 씻어 두어도 색이 변하지 않는다. 먹기도 편하고 가격도 저렴하니, 가난한 미정이 즐겨 먹던 채소(과일이라 하고 싶지만)가 아니었을까. 그 댓글을 읽고 빨간 방울토마토가 변치 않을 마음처럼 보였다. 색 마저 사랑의 닮은 빨간색.


그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오해하기로 한 미정에게서, 어떠한 빛이 밝혀진 듯 한창 밝아진 표정을 보았다.


모든 사랑은 오해다.


"모든 사랑은 오해다. 그를 사랑한다는 오해,

그는 이렇게 다르다는 오해, 그녀는 이런 여자란 오해,

그에게 내가 전부란 오해, 그의 모든 걸 이해한다는 오해, 그녀가 더없이 아름답다는 오해, 그는 결코 변하지 않을 거란 오해, 그에게 내가 필요할 거란 오해, 그가 지금 외로울 거란 오해, 그런 그녀를 영원히 사랑할 거라는 오해…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사랑을 이룬 이들은 어쨌든 서로를 좋은 쪽으로 이해한 사람들이라고,

스무 살의 나는 생각했었다."

—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중


“물론 그것이 오해라 할지라도,

우리는 운 좋게 서로를 좋은 쪽으로 이해했다고 나는 생각했다 “

—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중


그릇 해석하거나 뜻을 잘못 아는 '오해'는 내게 오랫동안 어긋남이었다. 남자는 모든 사랑이 '오해'라고 말했고, 그 마음을 '오해'하지 않으려던 여자는 결국 하나의 이해에 도착했다.


“설령 그것이 오해라 할지라도,

그 오해를 믿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중


이 문장에서 ‘오해’를 ‘사랑’으로 바꿔도 말이 된다.

사랑을 믿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고.


모든 사랑은 오해라면서도,

운 좋게 서로를 좋은 쪽으로 이해하게 된 이들은 서로가 더할 나위 없이 애틋할 것이다. 그 시절의 행복이 어쩌면 시시한 인간일 뿐인 이들을 밝혀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생활’과 ‘삶’ 사이


“사랑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라 생활이었다.”

—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중


이 이야기는 세드다.

하지만 한 달 가까이 <파반느>를 생각하며, 해피엔딩일 수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사랑이 없던 생활에서, 사랑하던 삶을 살다가, 사랑을 잃고 다시 생활만 하던 찰나가 있었다. 그때 미정은 잘 살고 있다는 뒤늦은 소식을 전한다.


“형, 사랑이 뭔지 알아?

서로 영혼에 빛을 밝혀 주는 거야

그렇게 빛나는 거야. 빛나는 사람은 누구나 아름답고

그중에 우리 미정이가 최고로 아름답지 “

-영화 <파반느> 중


미정은 경록으로 인해 상처를 피해 심연 안에 숨겨 놓았던 방 문을 열었다. 그 안에 들어가 마음속 불을 켰다. 어둠을 어둠이라 말할 수 있게 된 건 경록 때문일지 몰라도, 계속해 빛을 내기로 한건 미정의 일이었다.


“실은 여자는 남자를 위해 화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를 위해… 자기, 자신을 위해 화장을 하는 것입니다.


돌이켜, 그곳이 춥고 어두웠노라 말할 수 있는 것도

이제는 스스로에게 그만한 어둠을 감당할 힘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당신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은 제 눈앞에 서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몹시도 지쳤을 눈을 언젠가 감아야 하는 순간이 닥쳐온다면,

저는 분명히 당신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중


"운 좋게 서로를 좋은 쪽으로 이해한" 두 사람은

'생활'의 한 페이지에 서로 사랑한 기억이 남아 있는 한, '삶'은 영원히 지속된다. 그렇다면 이 '삶'은 해피엔딩이 아닐까.


모든 사랑은 그래서 ‘오해’이며,

어긋남을 숙명처럼 안고 태어나

그저 ‘생활’만 하던 불 꺼진 ‘남자’ 혹은 ‘여자’가

사랑을 하게 됨으로 ‘삶’을 살아가게 되는

영화 <파반느> 그리고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생활'과 '삶'을 살아가는 인생에서 계속해 생각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내가 최고로 빛날 때나, 그 빛이 사그라져 갈 때나.

혹 아직 불이 켜지지 않았다면,

더욱이 그 빛을 향해 뛰어가야 하지 않을까?


기다리고 있을 수많은 오해 속으로,

보고 싶었다는 고백과 함께,

천천히 걸어와도 된다는 그 품 안으로 들어가

무척 사랑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당신이 제게 준 빛이 있는 한…

이제 어떤 삶을 살아도 저는 행복할 수 있을 거예요,

매일 아침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 여자에게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실은 이 길을 택함으로써 끝내 그녀를 보호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사랑합니다.

한 번도 못한 말이고 다시는 못할 말이지만… 부디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차곡차곡 이 말을 눌러쓰면서 알았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인간만이 스스로를 사랑할 수도 있는 거라고… 저 역시 스스로를 사랑하면서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

—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