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보 Mar 02. 2019

눈이 부시게


여기 시간이 사라진 사람이 있다.

밝고 맑고 솔직했던 25살 혜자가 하루아침에 칠십 먹은 혜자가 되었다. 어린 시절 우연히 주은 ‘시간을 되돌리는 시계’를 통해 그녀는 오빠의 짓궂은 장난을 막거나 시험 점수를 높이는 소소한 즐거움을 누렸었다. 하지만 시간을 돌리면 자신의 시간은 빨리 흘러 나이가 든다는 걸  알고 그녀는 시계를 옷 장 깊숙한 곳에 감춰둔다. 십몇년이 흘러 그녀는 다시 시계를 돌린다. 그리고 하루아침에 칠십먹은 노인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참으로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옆에서 보고만 있어도 사랑 많이 받고 자란 건강한 예쁨이 느껴질 정도로.

  오랜 시간 꿈꿨던 아나운서 꿈을 포기하게 되었을 때도 그녀는 자신을 애틋해했다. 환경이 받쳐주지 않았다고 자신을 불쌍히 여기거나,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다며 자신을 미워하지 않았다.  자신이 후진 건 알지만 애틋해서 다시금 자신을 응원하는 혜자는 참으로 사랑스럽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칠십 살이 되어버린다.

  주름기 하나 없이 예뻤던 젊음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건강하지 못한 늙은 할머니가 되었다. 자신의 삶을 사랑하던 그녀, 스스로를 사랑해보라고 그러면 더 관대해질 거라며 준하를 다독이던 그녀는 아름답고 건강했던 젊음을 잃은 자신을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갑자기 늙어버린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해 방황한다.

  죽으려고 옥상에 올라가기도 하고, 멀리 도망갈까 시도도 하지만 결국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깨닫는다.  자신의 시간을 전부 다 쏟았지만, 사랑하는 아빠를 살렸으니, 가치 있는 일였기에 그거면 족하다는 결론에 다다르고 늙어버린 자신의 삶을 받아들인다.

  빨리 걷지도 못하고 몇 계단만 올라도 쑤시는 다리가 되었지만 그녀는 계란을 판매하는 멘트를 녹음하고, 정감 있는 목소리로 마트에서 물건을 소개하는 아나운서가 되었다. 어떻게 보면 진짜 25살 때는 이루지 못한 꿈을 펼치게 된 셈이다. 그녀의 겉모습은 달라졌지만 자신의 삶을 애틋하게 바라보던 혜자는 여전했다.


  스물다섯이자 칠십 즈음의 혜자. 혼자의 시간만 훌쩍 가버린 혜자였지만 그녀는 밝고 명랑하다 못해 백치미 있던 모습 그대로 이런 상황 속에서도 코 끝 찡하게 만들다, 웃음이 터지게 했다.

  이 드라마가 그렇다. 시간의 흐름, 나이를 먹는다는 것, 그래서 산다는 것이 뭔지 고민하게 만들다가도 실없이 웃겨 버린다. 인생을 논할 나이는 아니지만 슬퍼 죽겠다가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지고 화가 나도 배가 고픈, 아이러니한 것이 인생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혜자 선생님이 연기하는 젊은 ‘김혜자’ 사이에 어색함이 없다. 어떤 의미에서 이인일역인데, 두 사람의 케미가 좋다. 그 모습 자체로도 보이는 게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주는 듯싶었다.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는 건 스물이든 서른이든 여든 살이든 필요하며, 삶이 가치 있을 수 있도록 선택하고, 무엇보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신을 애틋하게 대할 줄 아는 삶을 사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해주는 듯했다.








  ‘젊은 모습이 아닌 나이 든 모습의 혜자를 그녀는 사랑할까?’

도입부에 적은 질문을 내게 던져본다. 서른다섯, 분명 내가 한 해씩 성실히 먹어온 내 나이임에도 나는 이 숫자가 낯설다. 새해가 되어 나이를 말할 일이 생기면 갑자기 늙어버린 기분이 들면서 슬프다. 젊음이 아닌 시간은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나는 왜 나이 듦을 슬퍼할까? 나는 아직도 나를 사랑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 자신이 아닌, 고작 눈에 보이는 젊음을 사랑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마저도 우습다.


  당연한 게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자주 잊는다. 지금은 당연한 잘 보고, 잘 먹고, 잘 숨 쉬는 것도 불과 몇 년 뒤면 사라질 거란 사실도 잊고 산다. 그리고 잘 먹고, 잘 먹고, 잘 숨 쉬는 지금이 감사함도 잊고 산다. 가치를 모르고 귀하게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젊음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혜자를 보며 나는 여러 번 부끄러워진다. 갑자기 흘러가버린 시간 때문에 누구보다 시간의 소중함을 잘 아는 혜자의 삶은 샤넬의 멈춘 시간을 움직였고, 영수의 잠든 시간을 깨울 것이며, 사는 의미를 잃은 준하의 시간에 의미를 더해줄 것이다. 그리고 혜자는 우리 삶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했다. 





 



이 드라마의 명대사로 남을 “등가교환의 법칙”


공부시간에 엎드려 자던 니들은 꿈결에 들었을 수도겠지만
등가교환의 법칙 있어
세상은 등가교환의 법칙에 의해서 돌아가 등가교환의 머시기가 머냐면 물건의 가치만큼 돈을 지불하고 물건을 사는 것처럼  우리가 먼가 갖고 싶으면 그 가치만큼의 뭔가를 희생해야 된다는 거야

당장 내일부터 나랑 삶을 바꾸어 살 사람 내가
너희들처럼 취직도 안되고 빚은 산더미고
여친도 안 생기고 너희는 나처럼 편안히 주는 밥 먹고  지하철에서 자리 양보도 받고 하루 종일 자도 누가 머라고 안 하는 내 삶을 살아 어때?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치지?

본능적으로 이게 손해라는 느낌이 빡 오지

열심히 살던 너희처럼 살던 태어나면 누구에게나 기본 옵션으로 주어지는 게 젊음이라 별거 아닌 거 같겠지만 날 보면 알잖아 너희들이 가진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당연한 것들이 얼마나 엄청난 건지
이것만 기억해놔 등가교환 거저 주어지는 건 없어

이 대사를 할 때, 혜자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본다. 마치 “거기 텔레비전 보고 있는 너! 너 잘 들어!” 라고 하듯.

드라마 내내 혜자는 우리에게 말을 건다. 늙은 여자 주인공, 드라마인 주제에 드라마틱한 건 일도 없는 잔인한 ‘등가교환’스토리. 현실의 우리를 닮은 드라마가 말을 건넨다.
젊은 지금을 소중히 여기라고. 자신을 사랑하라고, 그래서 좀 더 관대한 사람이 되라고.

그녀의 말에 모니터 밖 우리는 귀를 기울여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는다.
새파랗게 젊다는 걸 한 밑천으로 시린 시간을 보내는 청춘에게 말을 건넨다.

너희와 다른건 겉 모습일 뿐 속 마음은 같다고.
나이 먹은 걸로 유세 떤다고 하던데 나는 젊음을 무기로 삼지 않았나 생각한다. 누구나 갖고있고, 가졌던, 그 당연한 걸로 나야말로 자랑질은 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혜자, 그녀의 말에 나는 귀를 기울여 생각하고 되돌아본다.
JTBC월화 드라마로는 처음 10% 시청률을 거두었다는데, 말을 걸어오는 드라마를 우린 기다린 듯 하다. 자극적임 없이 그저 삶을 이야기하는 눈이 부시게가 눈이 부시다.



애틋하다는 형용사, 섭섭하고 안타까워 애가 타는 마음.
준하가 오랜만에 웃었다. 속 시원하게 울었고, 삼키던 말들을 뱉었다. 자신의 삶이 이제야 조금 안타까워진 걸까?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건, 그 누구의 비난과 미움보다 더 괴로움 일이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 하는데 누군가 나를 사랑해줄 수 있겠는가, 스스로에게 되돌아오는 질문 앞에 다시 또 이러한 자신이 싫고 밉다.
이 무한궤도에서 탈출 하려면, 이런 나라도 괜찮고 이런 나라서 사랑해주는 사람이 내민 손을 잡는 수 밖에 없다. 결국은 자신을 안쓰럽게 여길 때 끝을 맞이 할 수 있다.
앞선 혜자의 대사랑 이어진다. 네 인생을 애틋하게 여기렴.

 


  드라마 초반 글을 쓰는건 이토록 위험하다. 뒷 부분에 이렇게 큰 반전이 있을 줄이야. 
그녀가 언제 젊어지냐, 늙은 혜자가 너무 많이 나온다며 지루해하던 우리는 그녀 앞에 또 한번 부끄러워졌다. 


10화에서 친구들과 여행을 준비하는 혜자에게 엄마가 말했다. 가족이랑은 언제갈까 싶다고. 때마침 나오는 아빠에게 혜자가 말했다.

"아빠 우리도 여행가요. 가족끼리. 예전처럼. 행복했을 때 처럼."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있는 시계에 비유했다.  짧은 컷으로 넘어가는 과거 모습을 통해 작가는 상상하게 했다. 그녀가 어떠한 인생을 살아왔을지.

  고단하고 억울한 인생 중 모두가 행복했던 그 때를 지키고 싶던 혜자는 그렇게 스스로의 시간을 되돌려 25살로 돌아갔다. 불행한 삶은 잊고 행복한 일만 기억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과거의 일을 닮은 꿈을 꾸며 그녀는 그 때 놓친 일들을 바로 잡았다. 아빠를 살렸고, 준하를 구했다.

  그녀에게 불행했던 그 때도 행복했던 그 날도, 사실은 대단하지 않은 그냥 그런 모든 날이 눈이 부신 날이였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꿈인지 알 수 없는 그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애틋해 했다. 슬프고 안쓰러운 삶을 보듬어서 모든 기억으로 지금까지 버티었다 말한다.


 아 그래서 그랬구나, 스쳐보냈던 장면들이 다시 떠오르는데 가슴이 아프다. 나이로 구분 지을 필요 없는 당신은 곧 나, 아픔도 건강함도 구분 없이 당신과 그리고 나, 찰라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향한 긴 메세지에 우리 모두는 깊은 위로를 받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로맨스는 별책부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