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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Aug 29. 2019

포기

  “음... 책을 읽다 읽기 싫어지면 어떻게 하죠? 요즘 통 책 읽기가 싫어요.”


  출판부 마케터로 근무한 지 몇 개월이 지났을까, 유명 출판사의 편집자 한 분과 식사하는 자리가 있었다. 편집자님과 친분이 있던 부장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어색한 침묵이 감돌던 차, 편집자님은 부장님이 힘들게 하는 건 없냐고 농담을 건네시며 분위기를 풀어 주셨다. 그런 거 없다는 진심을 빈 말로 잘 이해하신 편집자님은 그럼 일하는데 힘든 건 없냐고 물었다.


  책 읽는 걸 좋아한다. 책에서 발견한 문장은 나를 이해해줬고, 너만 그런 게 아니라고 위로해줬다. 지혜를 나눠줬고 때론 따끔하게 말해주지만 언제나 정중했기에 책 읽는 일을 싫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마케터의 일을 시작하고 난 뒤 책 읽는 기쁨이 줄었다. 좋아하는 저자, 기다리던 신간보다 출간 예정인 원고를 읽고 피드백을 줘야 했고, 기존에 나온 책의 마케팅 방안을 조율하려면 읽어야만 했다. 책 상위에 도장깨기처럼 읽어 넘겨야 할 책이 정말 산처럼 쌓이게 되었다.


  어느 사이 읽고 싶어 산 책은 물론 그냥 글자 자체가 보기 싫어졌다. 팀장님이 적당히 읽어도 된다고도 했지만, 당시 난 지금보다 훨씬 융통성이 없었고,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마침표까지 정독하던 독서 습관이 대충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니 읽다 중간에 멈춘다는 건 상상도 못 했다. 그건 왠지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고, 어딘가 모르게 실패했다는 기분도 느꼈다.


  “책이 읽기 싫다면 안 읽으면 되죠!”

   나보다 훨씬 많은 원고를 읽어야 하는 분이 읽기 싫으면 안 읽는다고 했다. 아, 왠지 멋있어.


  읽다 멈추면 거기까지가 내 책이라고 하셨다. 중간에 멈춰도 괜찮다. 다시는 안 읽을 수도 있겠지만, 다시 읽게 되는 일이 자신의 경우 더 많았다고 하셨다. 그리고 멈췄을 때 보다, 다시 읽게 되었을 때 와 닿는 부분이 더 많았다며, 읽히지 않을 땐 멈춰도 괜찮다는 말을 해주셨다.


  책을 읽다 중간에 포기할 때 이유 모를 죄책감이 있었다. 그게 뭐라고 책에게 패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끝까지 붙잡고 늘어지느냐 지쳤다.


  하지만 편집자님의 말처럼 중간에 멈춰 끝나는 경우보다 다시 읽는 경우가 많았다.


  책을 쓰겠다고 한글 문서를 열었다, 닫았다를 삼 년간 꾸준히 하고 있다. 포기와 재도전을 반복하는 사이에도 원고는 조금씩 쌓이고 있다.

  원데이 클래스를 열겠다고 계획을 세우다 멈춘 지 이년만에 느닷없이 캘리와 니팅 클래스를 기획, 진행했다.

  중간에 멈추는 책도 많아졌다. 하지만 전보다 책 읽기가 즐거웠다. 중간에 멈춰 다른 책으로 갈아타고, 그러다 다시 돌아가 읽고 그러면서 한 번에 여러 권의 책을 읽었고, 짬뽕되는 문장은 참신한 연결이 되어 한 권을 정독했을 때보다 생각의 폭을 더욱 넓혀주었다.

드라마 <멜로가체질>,jtbc

  포기해서 얻어진 것이다.

 나는 조금씩, 멈춰서는 일에 대해 걱정과 두려움을 줄어갔다.

이 행동을 실패로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한 시선과 양심의 심판까지 넘어서 내린 포기란 결정은 용기 있는 행동이며 응원받아야 할 결정이란 생각에 도달했다. 실제로 여러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누군가의 퇴사를 언제나 응원한다.

 

  그러니 이제 내게 포기란 실패, 좌절, 끝 보다 선택의 다른 표현이며,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자세가 되었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잠시’가 되었던 경험 덕분에, 무언가를 내려놓게 된다 해도 상실감으로 다가오지 않게됐다. 덕분에 나는 마음을 지키게 되었고 삶이 좀 더 윤택해진 것 같다. 실패자가 될 경우가 사라졌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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