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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Apr 28. 2020

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 대사 편 6

명주가 날이 좋아졌으니 한번 보자고 한다. 해원이 날씨가 좋아지면, 그때 보자고 보영을 거절했던 일이 생각났다. 이제 정말 꽃이 피는 봄이 왔다.

세 여자가 쌓은 오늘의 부피가 달라지고 있다.

휘가 은섭을 오빠라고 불렀다. 돈을 뜯을 때 오빠라고 했다면 약았다 했을 텐데 휘의 버르장머리는 역시나 남다르다.
새롭게 좋아하게 된 남자 이야기를 휘가 오빠에게 종알종알 떠든다. 은섭이... 동생바보 기질이 다분하다. 결국 다시 임은섭으로 돌아왔지만 이제야 가족 같다. 휘가 은섭을 오빠라고도 부르고 잘 자라고 그의 밤에 안부를 물어줘서, 좋았다.

여전히 그녀의 서울 살이는 퍽퍽하다. 여러 시험장에 서지만 고단한 소식만 돌아올 뿐이다. 그래도 춥지 않다. 외투가 얇아졌다. 봄이 온다. 그리고 떠올리면 따뜻해지는, 자신만을 바라보던 눈빛이 있다.

술 한잔 사주지 않는 인생이라 여겼는데 술 대신 사랑을 주었네.

내 다시 이리로 돌아오나 봐라! 이를 악물고 떠났는데 다시 그 일을 하고 있는 바보가 여기 있다.

배운 게 도둑질이다. 회사는 바뀌었지만 하는 일은 같다. 하지만 재미있는 건 다시 돌아온 나는 조금 달라져 있었다. 그렇게 지긋지긋하지 않다. 생각보다 잘 해낸다. 왜 그런 걸까?

근무 환경의 변화가 일의 능률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다. 바뀐 회사가 내게 잘 맞는 곳이었다. 그리고 좌절하며 떠났던 시간 동안 그렇게까지 나를 내 몰 필요가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니 보이더라. 뛰쳐나온 그 시간에 암흑만 있지 않았다는 사실들이.

일에 치지고 한탄이 들 때 족욕을 한다. 시린 발을 뜨듯한 물에 담가 온 몸에 따스함이 돌게 한다. 땀구멍이 열리 듯 마음을 연다. 노곤 노곤해진 몸을 이불 위에 누이면 행복하다.

오늘 하루 수고한 자만이 아는 피곤한 행복. 그럼 됐지 뭐 -


서울대를 나온 사람에게 갖게 되는 자연스러운 기대감을 또 자연스럽게 벗어낸 장우.

가벼운 듯 보이지만 그는 눈치도 빠르고 성격도 좋으며 성실하다. 삐뚤어진 구석이 없다. 그가 이토록 천진난만하게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건 은섭이를 만나고부터다. 열여덟, 친구인척 함께 다닌 소위 잘 나가는 무리들에게 뒷산에 묶인 장우를 은섭이 구해줬다.

부랑자의 아들, 산에서 태어난 아이. 불행할 요소를 갖고도 평안해 보이던 은섭과 좋은 집안, 잘생긴 얼굴, 똑똑한 머리, 행복할 요소를 갖고도 불안했던 장우. 똑똑한 장우는 보이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깨달았다.


그렇게 장우는 자신이 어떨 때 행복한지 아는 사람으로 자랐다. 누군가의 시선, 기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이 자신의 행복을 찾을 때가 아닐까?


사랑 앞에 한 없이 수줍어지는 장우에게 시원시원한 은실이 딱이다. 둘의 알콩달콩 치고박는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럽다. 이재욱의 로코를 기대하는 마음이 커졌는데 '도도 솔 솔라 라솔'에서 고아라 배우님과의 출연이 확정되었다는 소식! 곧 봐요.


 

오랜만에 북 현리로 돌아온 아이린, 해원을 보고 은섭은 그저 발길을 돌린다. 이런 답답한 녀석을 보았나.


그는 그녀의 행복을 바라기에 자신의 곁에 있지 않아도 괜찮다 말했다. 아마 그는 오랜 시절 자신을 두고 떠난 가족을 생각하며 그들을 원망하기보단 행복하길 바랬을 것이다. 버려진 자신은 새로운 가족을 만나 행복했으니까. 그래서 한편으로는 자신이 이 행복을 누려도 되는 것일지, 불안한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녀가 돌아왔다. 언제까지 있을 거냐는 물음에 그녀가 환희 웃는다. 어쩔 수 없이 같이 웃게 되는 은섭이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한 자신이니까. 이제 부디, 함께 행복하길.  

해원의 내레이션을 듣는데 한없이 부러웠다.

대사를 옮겨 적기 위해 여러 번 더 듣는 동안, 충만히 채워지는 마음을 느꼈다.


해원이 북 현리로 돌아온 건 나를 사랑하던 그 눈빛.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저 내 존재로 반가워하고 설레어하고 기뻐하고 만족하는 그 눈빛을 기억해서다. 이 드라마가 그렇다. 원작은 더욱 그랬다.


보는 이로하여 금 어떤 무엇을 강요하지 않았다. 자극적인 장면이나 음향, 대사가 없다. 자주 시골의, 그것도 아무것도 없이 황량한 겨울 풍경을 보여주며 시나 책을 한 소절 읽어주었다. 그럼에도 황량한 풍경이 춥지 않았다.


괜찮아지길 애쓰기보단 모든 게 멈춘 시골의 겨울처럼 잠시 쉬었다 가라 하는 드라마였다. 곧 네 안에 있는 봄이 가득 차오를 테니, 그럼 또 그 모습 그대로 사랑스러울 테니 하고 말이다. 겨울에 태어났지만 겨울이 너무 싫은 내게 북현리 겨울만큼은 다르게 기억될 것 같다.


데려온 아이를 키움이 어찌 쉬울까. 배 아파 낳은 아이를 키우는 것도 상당한 일인데. 그런데 왜 사람들은 여정 여사의 마음에 못 박는 말들을 할까. 은섭으로부터 어머니 말고 엄마라는 소리가 듣고 싶었다. 사랑한다는 말은 기대도 안 했는데, 다정한 아들이다. 은섭이 이렇게 고운 성정으로 자랄 수 있었던 건 길러준 여정의 사랑 덕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드라마 중반 독서 모임에서 '파랑새'에 등장하는 행복에 관해 나누는 장면이 있다. 해원은 행복이 가까에 있다는 건 일종의 자기 위안이라며, 행복은 멀리 있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 말을 은섭은 그저 듣는다. 옅은 웃음을 지으면서.

과연 행복은 어디에 있는 걸까? 이 물음에 행복은 가까도 멀리도 있다는 댓글이 기억난다. 소소한 행복과 오랜 기간 노력하여 찾아오는 행복 모두 행복이라고.


그렇다. 행복도 노력이 필요하다.

물론 모든 상황에서 노력을 강요받으며 사는 것 같아 행복만큼은 애쓰고 싶지 않다. 하지만 요행으로 얻는 건 오래가지도, 충만하지도 끝이 아름답지도 않으니까. 다행히도 '행복'은 각 사람마다 정의가 다르다. 성공이란 녀석은 기본 기준이 높은데 반해 행복은 천차만별이다. 은섭의 행복은 해원이 행복한 것이었고, 명여와 명주의 행복도 해원이 아프지 않은 것이었다. 장우는 서울대를 나왔어도 북현리에서 공무원으로 사는 게 매일의 성실이 행복이고, 휘에겐 남자 친구를 사귀는 과정이 행복이다.


그러고 보니 드라마 속 주인공들이 어떠한 선택을 내릴 때 그 기준이 '성공'에 있지 않았다. '행복'에 있었다. 당신의 행복을 위해, 나의 행복을 위한 행동들. 그리고 마침내 행복의 파랑새를 찾은 사람들을 보며, 인생 아직 다 모르지만 성공하기 위한 노력보다 행복해지기 위한 매일 달려 나가는 삶이면 좋겠다 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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