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같은 회사

by 양보

정(精)스러운 멘트 앞에 나만 매정한 사람이 되었다. 정(精)스러운 멘트 앞에 나만 매정한 사람이 되었다.

구직을 할 때, "가족 같은 회사"라는 표현을 자주 본다.

보통 소규모 회사를 소개할 때 자주 사용되는 문구로 친밀하고 따뜻한 분위기를 연상시킨다.

그래서 나는 "가족 같은 분위기의 회사"란 글을 보면 안심이 되었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부담감이 좀 덜어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일했던 곳은 10명 미만의 사업장이 대부분이었고

조금 더 규모가 있었을 땐 5-60명 정도?

지금도 20명 남짓의 소규모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다.


대체로 따뜻했고 가족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생각해본 적이 있나?

직장 내 가족이란 개념에 대해서-


가족은 (어쨌든) 내 편이란 생각이 서로에게 참 함부로, 지나치게 편하게 대한다. 물론 가족 간에도 예의는 필요하다. 하지만 볼 꼴, 못 볼 꼴 보며 지내니 한번 싸우면 이런 아수라장이 없다 싶게 싸운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아침밥을 먹고 서로의 옷이나 악세사리를 빌려 입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선뜻 이해되지 않는 풍경이지만 가족이라는 단어가 붙으면 끄덕여지는.. 진짜 가족은 이렇다.


하지만 우리는 회사에 가족이 아닌 '남'과 일한다. 가족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일면식도 없이 살아오던 사람과 직장에서 만나 하루의 가장 오랜 시간을 가족보다 더 많이 보낸다. 그렇다 보니 회사 식구라는 표현도 쓰면서 가족 같은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가족 같은 분위기를 형성하려는 실질적인 목적은 개인적인 친분을 쌓기 위함이 아니라 업무 효율을 높이고 조직이 가진 목표를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함이 아닐까? 안타깝게도 현실에서는 '가족 같은 업무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가장 중요한 업무적 효율을 놓치는 주

객 전도의 상황이 자주 일어난다.


아무 일 없는 것처럼_아무 일 없지 않지만, 설레다 저자, 양보 손글씨



30명 남짓의 회사에서 근무할 때 일이다. 첫 출근부터 사이좋게 지내라는 말을 들었다. 유치원 다닐 때 들어봤을 법한 말을 회사에서 들으니 어딘가 좀 어색했다. 그런 말을 듣지 않아도 잘 지냈을텐데. 일주일 쯤 지났을 무렵 그렇게 말하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회사는 '사이좋게'라는 말을 잘 못 적용하고 있었다.

출근해서 일 만해도 하루가 모자란데 직원들 대부분은 컴퓨터를 켜기도 전부터 소위 말해 윗 분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말 잘 듣는 아이가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처럼 우리는 회사에서 이리저리 눈치를 보느냐 바빴다. 커피 한 잔을 마실 때도 내 의사보단 상사의 눈치가 먼저였다. 그러니까 '사이 좋음'은 업무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동료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함이 아닌, 상사의 기분을 좋게 하는 그런 수직적인 '좋음'의 모습이었다. 물론 기분이 좋을 때 상사는 이것, 저것 신경써줬지만 이 또한 업무와 관계되지 않은 사적인 영역이었다.


아들 같고 딸 같아서라는 말로 개인의 삶까지 간섭받고 평가받아졌으며, 정말로 한 가족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세세한 개인적 업무가 늘어났다. 집에서는 아빠 심부름도 안하는 매정한 딸이 밖에서는 효녀구나 싶었다. 이런 상황이 불편하다 말하자 '가족 같아서 그랬다'는 정(精)스러운 멘트 앞에 나만 매정한 사람이 되었다. 다들 화기애애하게 보였는데, 그 이면에는 무리에서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감정의 날을 세우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모두가 퇴근한 빈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감정들에 치여 놓아 버린 일더미 앞에, '내가 일하러 와서 뭐 하고 있나-' 싶다. 가족 같아야 하는 그들이 모두 퇴근한 빈 사무실이 마음 더 편했다.



월요일의 그녀에게, 임경선 저자, 양보 손글씨



사회생활이란 모름지기 이런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우리는 그렇지 않아, 우리 회사가 얼마나 가족 같고 좋은데' 그 말이 잘못된 환상을 갖게 한 게 문제였다.


회사에서 만난 사람과 좋은 인연을 만들 수 있다. 내게도 회사 동료로 만나 지금까지 연락하며 인생의 동역자로 지내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과 사이좋게 지내려는 마음은 접었다. 예의 있게 행동하고 배려하며 일하고 있다. 그건 우리가 같은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동료이기 때문이다. 가족같이 지내려는 목적이 아니라 그것이 관계의 기본이며 업무의 효율을 높이기 위함이다. 차갑게 들릴지 모르지만, 회사에 나오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 아닌가.


그러니 부디 지나친 인간적 관심과 가족이라는 미명 아래 행해지는 감정 노동은 이만했으면 좋겠다. 정말 가족 같은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면 빨리 퇴근해서 가족이 있는 집으로 향하시는 방법을 권유해드리고 싶다.



/20.03에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