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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Sep 10. 2020

이번 생은 처음이라 : 대사 편 2

세희가 말했다. 모든 게 너무 변해버린 지금 모든 기준을 새롭게 세워야 한다고. 그 말에 지호는 '가령 결혼?'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이 대사를 확인시켜주듯 취업과 꿈을 이뤄가는 과정만큼 결혼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이 등장한다.


세희와 지호가 서로의 필요에 의해 결혼이란 제도를 이용했다면, 호랑과 원석은 보편적인 결혼관을 보여준다. 그리고 상구와 수지를 통해 비혼 주의의 한 부분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 무렵부터 인 것 같다. 비혼이라는 단어가 일반화되어간 게. 처음엔 엄청 낯설었는데 지금은 꽤 익숙해졌다. 그렇다고 모든 기준을 새롭게 적용시킬 정도로 나는 (어쩌면) 세련된 편은 아니다. 그래서 아직, 결혼도 비혼도 낯설고 모르는 쪽에 서 있다.


수지를 보며 나는 영화 밤쉘이 생각났다.

관심은 많았지만 결국 보지 못 한 또 하나의 영화다. 다만 탁월한 시선과 깔끔한 문장으로 영화에 대한 글을 보내주는 동진님(@cosmos__j )의 <1인분 영화>를 통해 이 영화를 보았다고 말하고 싶다.


동진님이 보내주신 글 하단에 이런 글이 있었다.

"영화가 의도한 것과 달리 <밤쉘>에는 훨씬 더 풍부하고 입체적인 내용들, 특히 영화 밖에서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하비 웨인스타인의 몰락을 연상케 하기도 하는 등 극영화로만 머물지 않는 것들이 담겨 있다. 가령 “피해자는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니까요.”라든가 ‘로저’가 퇴진한 뒤에도 “이건 마지막도 아니다.”(“But not the last.”)라든가 하는 유의미한 순간들이 있다."


오랫동안 여직원들을 성추행 해오던 언론사 대표가 퇴진했음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동진님의 글 하단의 말을 또 인용하자면

성추문으로 물러난 로저가 폭스로부터 받은 퇴직금이 피해자들이 받은 보상금 액수의 합보다 1,500만 달러 더 많았다. 이 이야기는 아직 진행형이라는 말이 수지의 마지막 대사와 겹쳤다.


3년 전 작품임에도 드라마 속에서 수지가 겪는 일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렇다고 지난 시간이 무의미하다는 소리는 아니다. 건강한 변화로 성숙한 젠더 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늘었다. 그리고 나 역시 자주 들춰본다. 내 속에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해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맞다는 결론을 만들고 있지 않은지.


비록 변하지 않은 세상을 꼬집는 대사를 인용하였지만 그래도 내가 바라보고 싶은 부분은 변하려는 노력들이다. 이런 글을 쓰면... 댓글이 좀 무서운데... 남녀로 나누고 구분 지으려는 것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모습에 대해 조금 더 고민하고 싶은 마음이다.


2PM의 <우리 집> 안무가 여기서 착안된 건가 (네, 제 헛소리입니다.)

걱정돼서 한 걸음에 뛰어온 세희는 비싸디 비싼 오토바이를 발로 걷어찬다. 사실 복남이야 말로 명의 도용의 피해자인데.. 편집이 오해할 만했지.


아무튼 역시 사람은 겉만 봐 선 모른다. 서로를 다 알지 못한다. 그 오해가 비극이 될 수 있지만 이처럼 사랑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지호의 말처럼 인간의 이런 한계는 좌절이 아닌 희망이 되나 보다.


호랑의 검정 코트 비유가 무슨 말인지 단번에 이해됐다. 내 옷장도 무채색으로 가득하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튀지 않는 색에 무난한 아이템만 구매한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레 그렇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어쩌면 우리가 사는 사회가 운영하기 편하게 ‘보통’이란 틀로 우리를 유인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잠시 했다. (이런 걸 음모론이라고 하나�)


호랑의 검정 코트는 #청춘시대 진명 선배에게 회사원이 되는 일과 같다. 연애도 설레는 감정도 심지어 방황까지도 평범한 사람이나 하는 거라던 선명 선배의 한 부분이 호랑과 닮았다.


남들과 다른 모습을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라 겁을 낸다. 점점 삶에 도전이 사라지고 효율과 실용성에 맞춰져 굴러간다.


안 입을 수 있지만 기분 전환용으로 입을만한 색감의 옷을 하나 사야겠다. 평범함을 지향하는 평범도 못 한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내가 나임은 잊으면 안 되니, 세상을 향한 방어복을 하나 사야겠다.


원석은 호랑에게 프러포즈를 했다. 프러포즈란 모름지기 사랑의 결실 아닌가.


하지만 원석의 프러포즈는 마지막 회에 등장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본 회차 엔딩을 장식한 것도 아니다. 중간에 놓였다는 건 이 후로도 풀어야 할 이야기가 많음을 의미한다.


처음 볼 때는 나도 호랑이처럼 두 손을 마주 잡고 기뻐했는데 스토리를 다 알고 보는 지금은 두 사람이 너무 애잔해서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사랑에 빠진 지호가 귀여웠다. 물론 저렇게 행복한 순간으로 오프닝을 시작한 회차의 소제목은 #시월드는처음라 였다는 게 함정이지만 


제사에 김장으로, 노동력을 노동력으로 갚게 한 지호의 대처법도 좋았지

지호의 첫 내레이션은 사실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로 끝난다. 하지만 똑같은 내레이션 문장이 두어 번 반복하는 과정 속에서 마지막 문장이 바뀐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 존재한다고.


누군가 이해하기 위해 밤을 지새워 본 적이 있는가. 한 때 그런 밤으로 잠 못 이루는 날이 있었다. 이해되지 않는 상대가 밉기도 하고, 내 탓으로 귀결되는 생각에 괴롭기도 했는데 그 모든 노력이 실은 사랑이었음을 이후 알게 되었다.


연애도, 결혼도 인간관계도 모두 비용과 에너지로 계산되는 시대 속에서 그렇기에 이러한 행위 자체가 값어치 있는 인생이 되게 해 주는 건 아닐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맞다. 게다가 인생은 초행길이니 내가 당신에게로 잘 가고 있는 건지 두렵다. 꽤 오랜 시간을 곁에서 함께 걸어온 줄 알았는데 우리가 걸어온 길이 아주 가까이에 있지만 서서히 멀어지는 다른 길일지 모른다는 불안이 들었다.


이런 비교가 맞는지 모르지만 내 눈에는 남들처럼 오랜 연애 후 결혼을 준비하려는 원석과 호랑은 길을 잃었고, 남들과는 다른 시작이었지만 자신의 걸음과 속도대로 걸어온 지호는 누군가에게로 향하는 길에 들어선 듯 보였다.


초행길 헤매지 않고 걸을 순 없다만 마음이 부대끼는 길은 걷지 않는다면 좋겠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것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니다. 벌어질 일이 벌어진 거다. 그러니까 괜찮다. 찾을 수 없는 원인을 찾아가며 무언가를 탓하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에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하자. 그러면 다음에 불행과 마주했을 때 조금은 더 수월하게 수습하고, 감당하고, 다음 일을 할 수 있다."

#살아있다는농담 중에서 #허지웅


설사 다 아는 것, 해봤던 일이라 할지라도 그 순간, 그 사람과는 또 처음이다. 어제를 살아봤다고 오늘을 아는 것도 아닌 우리의 매일은 사실 매 순간 처음이다. 그러니 실수가 있어도, 불안정해도, 잘못 걸어가는 듯해도 괜찮아. 어차피 처음인 이번 생은 수습과 감당, 그리고 할 수 있는 다음 일을 해가면서 엉망으로 사는 게 가장 잘 사는 모습일지도 모른다. 

연애를 할 때 호랑과 원석은 투닥거리긴 했어도 알콩달콩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결혼 이야기가 나오고 두 사이에 어색한 냉기가 흐른다. 사랑하니까 하는 게 결혼인데, 아직 서로 사랑하는데 어째서 두 사람 사이에 이렇게도 넓은 거리감이 생긴 걸까.


세희 말처럼 자신을 가장 위하는 인간의 욕망이 극대화되는 게 결혼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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