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저씨> tvN
운 좋게 긴 휴가를 받았다.
회사 일이 많아 팀에서 마지막으로 휴가를 가게 되었는데 때마침 임시공휴일이 지정되면서 열흘을 쉬게 되었다. 앞뒤로 주말이 포함되었지만 그래도 긴 휴가다. 그동안 미뤄왔던 많은 일이 떠올랐다. 북쉐어링 도서 '총 균 쇠'도 읽어야 했고, 드라마 대사 손글씨 작업도 마무리해야 했다. 그리고 글 모으기. 올 해는 양치기 소녀가 되지 않기 위해 기필코 출간을 하자며 가장 많은 비중을 글 다듬는 시간으로 잡았다. 하지만 드라마 대사 정리만 빼고 뭐 한 것 없이 열흘이 지나가 버렸다.
집에만 있었음에도 지구 반대편 시차로 지내느라 비몽사몽한 상태로 출근을 했다. 컴퓨터를 켜고 자리에 앉았는데 휴가를 떠나기 전 자리를 바꾼 까닭인지, 너무 오래 쉬어 그런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내가 어색했다. 열흘 전 자신과 동기화를 시키는 과정에선 두통이 왔다. 그제야 휴가가 끝났음이 실감났다.
물론 이런 낯섦도, 동기화도 오래가지 못했다. 정신없이 몰려오는 일들에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퇴근을 했다. 이대로 침대에 누우면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날 수 있을 정도의 피로감이었지만, 요가 수업을 듣기 위해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흠.. 그런데 운동복이 왜 이렇게 뽀송뽀송하지?.. 잠깐 버퍼링을 거치고 나서야 휴가기간 동안 운동을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딱히 어디로 여행을 다녀온 것도 아닌데 운동을 가지 않았다니. 반복적인 일에 강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은 나였건만...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었다.
머릿속에서 삭제된 건 비단 운동만이 아니었다. 출근 전 하던 아침 기도도 출근을 하지 않으니 잊어버렸다. 점심 식사 후 챙겨 먹던 영양제도 들쑥날쑥한 식사 시간에 빼먹기 일쑤였고, 분리수거도 일주일간 방치되어 있는... 일상이 엉망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걸까?
휴가 기간 동안 나의 루틴을 무너트린 범인은 아무래도 드라마 <나의 아저씨> (tvN,2018)로 추정된다. 이 인생 드라마를 보지 않았다는 언니에게 드라마를 전도하기 위해 며칠의 새벽을 몽땅 털어 정주행을 했다. 덕분에 낮 밤이 바뀌고 일상의 스텝이 꼬이게 되었다. 물론 핑계라고 하면 할 말은 없다만...
작년에도 정주행을 한 드라마인데 처음 보는 듯 마음에 와 닿은 대사가 있었다.
지안(이지은 분)을 집으로 데려다주던 어느 골목길에서 동훈(이선균 분)은 20년 가까이 구조기술사로 일하면서 깨우친 인생의 진리를 말해준다.
모든 건물은, 있을 수 있는 모든 외력을 계산해서 그보다 세게 내력을 설계한다. 그래야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다. 건물의 구조를 짜면서 동훈은 인생도 외력과 내력의 싸움임을 깨달았다. 항상 외력보다 내력이 세게. 그래야 무너지지 않는다. 동훈은 이 진리를 따뜻한 바람이 부는 풍경 좋은 휴양지에서 한적한 시간을 보내던 중 깨달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바쁜, 하지만 특별한 것 없이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지루한 일상 속에서 깨달았다.
동훈이 말하는 인생 내력을 듣는데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KBS2, 2019) 속 한 장면이 생각났다.
하루 아침에 아픈 엄마가 사라졌을 때도,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해 괴로운 시간에도 동백(공효진 분)의 손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빨래를 개고, 돼지주물럭을 만들었다. 그녀는 슬픔도 제대로 느끼지 못하게 굴러가는 자신의 쳇바퀴에 진저리쳤지만 그 덕에 어디로 사라지지도, 무너지지도 않고 매일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렇게 삶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은 덕에 돌아온 엄마와 어긋남 없이 재회할 수 있었고, 그녀 곁에서 떠나지 않았던 용식(강하늘 분)과 함께 까불이도 잡을 수 있었다. 일상의 루틴은 동훈뿐만 아니라 동백이에게도 숨은 내력이 되어준 셈이다.
오늘은 외근을 위해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났지만 아무튼 출근이라는 어제와 닮은 아침을 맞았다. 이후 시간은 퇴근 만을 기다리며 머리보다 손이 먼저 움직이는 평범한 하루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나를 만든 것 역시 짧은 자릿한 휴가가 아닌 지겹고 지루하게 반복되는 매일의 삶이다. 내가 가진 강함은 매일의 쳇바퀴 속에 있었다.
더욱이 올해는 전염병과 길고 길었던 장마 등 예기치 못한 일들로 지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렇기에 아무 일 없는 평범한 매일이 더없이 소중한 요즘이다. 별일 없이 굴러가는 나의 쳇바퀴가 오히려 감사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