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숙 씨가 해줬으면 좋겠어

<스토브리그> SBS

by 양보

대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 일을 했으니 벌써 10년 차 직장인이다.


그동안 여러 회사에서 일했지만 힘들었던 순간은 대개 비슷했다. 내가 이 회사에 필요한 사람인가, 아닌가 하는 존재의 불확실함이 들 때였다. 박봉이나 넘치는 야근도 힘들게 하는 요소였지만 소속감을 느끼던 시절에는 자원하는 마음이 컸다. 그 마저도 즐거움이었다.


10년 경력 중 지금 일하는 분야에서 6년째 근무중이다. 업무에 전문 지식이 필요하다보니 오래 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매일 부족한 모습을 보게 된다. 실력에서 오는 불안감은 내가 하고 있는 업무 성격과 만나 더 짙게 존재의 불확실함을 만들었다.


내가 하는 일은 눈 앞에 드러나지 않고 높은 수치와 만족스러운 결과 뒤편에 있다. 큰 시계 바퀴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수많은 작은 바퀴들이 돌아가는데, 나는 그런 작은 톱니바퀴 중 하나인 것이다. 그렇다 보니 좋은 결과가 나와도 이를 함께 만들었다는 생각보다 내가 한 수고는 별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리고 그 생각은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무언의 사인으로 다가왔고, 고용의 불확실성은 존재의 불안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래도 한 때는 내가 아니어도 잘 굴러가는 회사를 보면서 어떠한 해방감을 느끼기도 했다. 업무에 대한 과도한 책임감이나 부담감, 이런 무게를 떨쳐 내는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한 살씩 늘어나는 나이 앞에 줄어드는 기회를 생각하니 마냥 자유로울 수 없었다. 삶에 불안이 파고들자 내게 주어진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나는 '아무나'일 뿐이었다. 나부터 자신을 귀하게 여기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그러다 미숙 씨(김수진 분)를 만났다.


미숙 씨는 얼마 전 일을 시작했다. 딸은 ‘드림즈’라는 구단에서 운영 팀장으로 일하는데 만년 꼴찌팀이다. 올해도 줄어든 예산을 가지고 일을 하려니 힘든가 보다. 야근이 잦다. 아마 그녀의 딸은 삭감된 운영비 때문에 올해는 연봉 협상 테이블에 앉지도 못 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일을 시작했다니 아무래도 본인 연봉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니냐며 마음을 썼다.


하지만 엄마, 미숙 씨가 일을 시작한 건 딸이 생각한 것처럼 그녀의 연봉이 적어서가 아니었다. 미숙 씨는 돈 보다 가게 주인과 승미 엄마가 건넨 한 마디에 일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미숙 씨가 해줬으면 좋겠어요."


아주 평범해 보이는 이 한 마디가 미숙 씨 마음에 뜨거움을 일으켰다. 그녀가 제안받은 일은 자격증이 필요한 일도 아니었고 그야말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일을 하든 안 하든 미숙 씨가 해줬으면 좋겠다는,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 일을 수락했다고 그녀가 딸에게 말했다.


이 대사를 처음 들었을 때 마음이 찡했다. 그리고 손글씨로 옮기면서 그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오랜 시간 일을 하면서 내게 주어진 일을 통해 나 자신을 규정짓고 있었던 것이다. 자르고 오르고 나르는 일들이 필요한 일이라는 걸 알지만 그 보다 뭔가 있어 보이는, 크고 화려한 일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었다. 그런 일을 하지 못하는 나는 무능하고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미숙 씨는 일의 형태보다 자신을 믿고 신뢰해준 이를 주목했다. 그녀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미숙 씨여야 한다는 말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자신을 신뢰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나는 한 번도 미숙 씨처럼 생각해보지 못했다. 다시금 대사를 여러 번 써 내려가며 미숙 씨의 시선으로 내가 하는 일을 떠올려 봤다.


회사는 다정하게 "보람 씨가 해줬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그래도 담당자로 나를 택했을 땐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만만해서 시키는 호구 대접인지는 때마다 생각해 봐야겠지만 아무튼 내게 온 일이다. 그 과정에 나라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조금이라도 담겨 있겠다는 생각을 갖기로 했다. 그리고 시선을 살짝 옮기면 일이 아닌 그 일을 행하고 있는 자신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이런 생각을 남긴 인스타그램 게시물은 8,300개의 좋아요가 눌렸고 아직도 좋아요가 눌리고 있다.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말"이라던 댓글이 기억난다. '이 곳에 필요한 사람인가'하는 소속감이나 성취에 대한 불안과 부담이 저마다에게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결국 어떤 마음으로 할지는 내가 정하는 것이다. 나와 당신은 이미 소중하고 귀한 존재다. 일의 겉모습이 아닌 일을 하는 주체인 나와 당신을 주목한다면 누가 해도 무관한 일 조차 귀한 일이 될 거라고 믿는다. 그러니 특별한 나를 거친 일이 정말로 특별한 결과를 만들어갈 수 있게 미숙 씨처럼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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