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좋으면 찾아가겠어요> JTBC
신이 인간에게 준 축복 중에서 '망각'이 있다고 한다. 망각은 깜박깜박하는 건망증과 다르다. 기억 덩어리 손실에 가깝다. 신이 나를 창조할 때 망각이란 축복을 잔뜩 부어줬나 보다. 오랜만에 동창이나 친척들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지난 이야기 앞에 나만 다른 별에서 온 듯 기억의 부재를 느낀다.
어릴 때 잘 놀다가도 카메라가 보면 돌처럼 굳었다. 지금도 자연스럽게 미소 짓지 못한다. 그래서 사진 찍는 걸 싫어했고 그 결과 현재까지 고작 두 권의 앨범을 있다. 그나마 한 권은 특정 시기에 함께 활동한 이들로부터 받은 송별 선물이다. 반면 나와 달리 여행지마다 콘셉트 앨범을 만들어 보관하는 언니는 수 개의 앨범을 갖고 있고 기억력도 어마 무시하다.
앨범의 수와 기억력이 비례되는 건 아니겠지만 기억에 도움을 준다는 면에서 언니의 앨범이 부러울 때가 있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게도 기억을 떠올리게 돕는 존재가 있었다. 그건 바로 일기장. 초등학교 6년 동안 쓴 일기장과 이후 계속해서 써 온 다이어리들이 박스에 담겨 책장 위에 보관 중이다. 매일 쓰진 않지만 매년 쓰고 있다. 자주 꺼내 보진 않아도 지난 시간이 일기장에 보관돼 있다고 생각하면 불안한 마음도, 쓸쓸함도 사라진다.
'오늘 날짜의 부피, 포개지는 일상'
은섭(서강준 분)은 혜원(박민영 분)을 생각하며 오랫동안 그가 운영하는 서점 사이트에 비공개 글을 적어왔다. 일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붙이지 못한 연애편지에 가까울지 모른다. 그래서 혜원이 '굿 나잇 서점'에 나타난 뒤로 그가 적어 온 날짜들이 평온하게 쌓이지 않고 다른 부피를 갖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녀와 함께 하는 매일이다. 내년의 오늘이 어떤 무게감을 가질지 오늘의 그로서는 절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일기를 쓰는 일이 이렇게 낭만적인 일이었나. 드라마 속에 나온 '오늘 날짜의 부피, 포개지는 일상'이라는 표현을 다이어리에 적어놨다. 내년에 다시 만나게 될 오늘 날짜에는 어떤 일이 있을까? 아마 별 일 없다면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 같은 자리에 앉아 비슷한 일을 하고 있겠지. 5년을 그래 왔으니 내년에도 그럴 가능성이 다분히 높지만,
그렇게만 상상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도 은섭이처럼 내년의 오늘이 어떤 무게감을 갖게 될지 상상되지 않는 그런 상상을 하련다. 갇히지 않는 상상 속에 매일 쌓는 성실의 부피가 기회와 만남의 축복을 가져와 다른 이야기를 남겨 주길 바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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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여담이지만 이 글을 처음 쓴 날과 지금, 회사에서 일하는 자리가 바뀌었다. 내년의 오늘이 어떤 모습을 가질지 정말 알 수 없다. 그러니 나는 더욱 내년의 오늘을 마음껏 상상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