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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Jan 30. 2021

무용한 것의 유용함

꽃다발 아니면, 마카롱?


졸업전시회를 축하하는 자리에 뭘 갖고 가면 좋은지 물었다. 그녀는 예대를 나왔고 얼마 전까지 많은 이의 전시와 공연을 축하해주러 다녔다. 이런 자리가 자주 없는 나는 축하라면 가장 무난한 게 꽃다발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녀에게 문자를 보낸 건 다른 답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만큼 꽃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선호하지 않는다. 아무래도 시들면 버려지는 꽃보다는 두고 쓸 수 있는 실용적인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래서 생일선물도 받을 이에게 무엇이 갖고 싶은지 묻고 집으로 배송시키는 실용과 효율성을 두루 갖춰 선물해왔다. 물론 깜짝 놀라는 감동이 없는 재미없는 선물이지만 만족도는 높았다. 나는 선물에 그 보다 뭐가 중요한지 몰랐다. 재작년 송년회를 겪기 전까지 말이다.


평소에도 자주 만나지만 연말이면 꼭 송년회를 하는 친구 셋이 있다. 재작년에도 우리는 호텔을 빌려 늦은 시간까지 음식을 먹고 게임을 하고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준비해본 재미난 이벤트를 진행했다. 바로 “쓸모없는 물건 선물하기”. 각 사람에게 딱 맞는 정말 쓸모없는 물건을 가져와 하나씩 선물하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각 사람에게 딱 맞는 쓸모없는 물건이란 문장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너무 속상했던 건 이 선물식을 결정하기 며칠 전 책상 정리를 하는 바람에 그다지 내게 쓸모없는 물건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매번 선물은 물어봐서 정확하게 준비했는데... 이번엔 어떤 걸 가져가야 정말이지 큰 실망을 할지, 최선을 다해 고민해서 선물을 골라왔다.


장고  끝에 나는 회사를 퇴사하고 싶은 친구에게 해리포터의 도비를 떠올리며 양말 한쪽을, 10년을 함께 방송팀으로 활동한 후배에겐 추억을 되새기 위해 초창기 녹화 테이프를, 장난감을 좋아하는 친구에겐 고장 난 피규어를 주었다. 누군가를 위해 이토록 고민하며 선물을 고른 지가 얼마만이었던가. 나는 손글씨를 응원한다면서 무슨 기념관에서 받았다는 알록달록한 필통과 연필 몇 자루,  동방신기 CD 풀 패키지와 막내가 대학원 졸업 때 쓴 논문집을 선물 받았다. 정말 하나도 필요하지 않은 쓸모없는 것이었지만, 집에 가서 버릴지언정 서로가 보는 앞에선 소중히 대해주기로 했기에 우리는 그 짐을 하루 동안 들고 다녔다. 나는 작고 귀여운 선물 었지만 다들 부피가 있는 선물을 주고받은 탓에 카페에서 영화관에서 정말 짐이 된 선물을 볼 때마다 우리는 서로를 욕하면서 배가 아프도록 웃었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tvN, 2018)>>에도 무용한 것을 사랑하는 남자, 김희성(변요한)이 등장한다. 그는 길가에 핀 꽃과 밤하늘의 달을 사랑했다. 자칭 박애주의자고 타칭 바람둥이 었다. 부잣집 도련님이라 철 없이 고운 것을 마음에 품는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바람 앞에 놓인 등잔불 같은 작금의 조선을 가슴 아파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더욱이 그는 무용한 것을 사랑했다. 그가 총보다 강한 펜을 들어 조선의 상황을 백성에게 알리고, 세계에 조선의 목소리를 내는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무용한 것을 품어 소란한 마음을 잠재웠고 가벼운 농담으로 괴로운 달랬다. 그에게 꽃과 꽃이 피는 봄 그리고 밤하늘의 달은 둘도 없이 귀한 의미를 지닌 처방전이었다.


꽃을 생각하다 무용한 것이 생각났고, 희성이 떠올랐다. 어쩌면 무용하다 여긴 그것들은 내 마음에 여유가 없어 무용해진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바래져 버려질 꽃일지라도 받는 순간 기분이 좋고, 보는 내내 행복하다면 무용한 것도 아닐 텐데. 실용성을 따지며 계산을 맞추니 마음에 빈 틈이 없었다. 바람 오갈 공간도 없는 마음에 놓인 만족감에도 금방 곰팡이가 피고 썩어갔다. 오히려 쓸모없다며 불려 나온 물건들을 보며 웃고 떠들던 그 날에, 그 무용한 것은 웃음을 주었고 마음에 살랑이는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그 날을 기점으로 무용함은 웃음이 담긴 추억이 되었다. 별 다른 의미가 없어 마음에 어떠한 짐도 남기지 않는 무용한 것들이 주는 기분이란 이런 거구나. 희성이 봄, 꽃, 달로 위로받던 기분을 알 듯했다.


그래서 나는 처음 마음을 돌이켜 적어도 내겐 무용함의 상징이었던 꽃을 사 가기로 했다. 쾌쾌한 냄새가 나는 이 마음에 무용한 것이 스쳐 살랑 꽃 향기를 불러일으키고, 받는 이에게는 더 할 나이 없이 큰 기쁨으로 오래 곁에 있어 다신 무용해지지 않을 꽃을 한 아름 사가야겠다.

노란 꽃을 보는데 축하할 사람이 생각났다. 받은 이가 더할 나이 없이 기뻐해준 덕에 내 마음도 오래 따뜻했다. 꽃과 봄, 무용한 것으로 가득 채워진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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