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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Mar 18. 2021

미래가 변하지 않는다면 노력은 아무 의미가 없는 걸까?

<시지프스> (JTBC, 2021)

언제부턴가 꾸준히 '타임워프'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내 기억 속 첫 번째 '타임워프' 드라마는 <신의(SBS, 2012 )>다. 극 중 성형외과 의사인 유은수(김희선)가 최영(이민호)에 의해 시공간 워홀을 타고 고려시대로 오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을 담고 있다. 20부작이라는 긴 호흡에 사극이 갖는 시대적 배경을 녹이느냐 뒤로 갈수록 드라마가 무겁게 느껴졌지만, 신선한 소재와 배우에 대한 팬심으로 여러번 다시 본 작품이다. 최근에는 ‘타임워프’를 소재로 한 대만 드라마 <상견니>를 정주행 했고 조승우, 박신혜 주연의 <시지프스(JTBC,2021)>을 보고 있다.


대만 드라마 <상견니>는 주인공들이 우바이의 '라스트 댄스'라는 곡을 통해 과거와 미래를 오간다. 하지만 자신의 과거, 미래로 가는 게 아닌 똑같은 얼굴을 한 다른 사람의 삶을 산다는 점이 기존 타임워프 드라마들과 다르다. 후반부즘 가면 이 사람이 과거의 그인지,  미래의 다른 사람인지 대혼란이 오기도 하는데 이 점이 <상견니>의 포인트라 생각된다. 아무튼 타임워프 소재 드라마들이 보통 이런 우연에 기대어 시공간을 초월했다면, 드라마 <시지프스>는 '업로드'라는 타임머신의 개발로 타임워프 현상을 설명하면서 보다 SF 분위기를 띤다.


이렇듯 시간을 오가는 방법에는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타임워프가 등장하는 드라마에는 공통된 이야기가 등장한다. 주인공들이 과거로 오는 이유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서라는 것. <상견니>에서는 천원루의 죽음을 막으려 하고, <시지프스>에서는 한국에 일어날 전쟁을 막으려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이들은 어떠한 질문 앞에 부딪힌다. “과연 미래를 바꿀 수 있을 것인가?” 타임워프를 소재로 하는 드라마가 가진 두 번째 공통점이다.


서해(박신혜)는 ‘업로더’라고 불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온다. 그녀를 ‘업로더’에 태운 아빠(김종태)는 그녀에게 신신당부한다. 절대로 한태술을 만나지 말라고. 그와 말도 섞지 말라고. 미래의 대한민국은 핵전쟁으로 황폐화된다. 공기 중에 퍼진 방사능으로 살아남은 사람들 조차 위태로운 하루를 보낸다. ‘업로더’를 타고 시공간을 이동하는 건 위험 부담이 따르지만, 더 이상 살 수 없는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많은 이들이 목숨을 걸고 때로는 큰 대가를 치르면서 ‘업로더’에 오른다. 그녀가 과거 대한민국에서 맛있는 것도 먹고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아빠의 바람과 달리 그녀는 과거 대한민국으로 오자마자 한태술을 찾는다. 전쟁이라는 비극을 불러온 ‘업로더’를 만든 그를 찾아 전쟁을 막으려 한다.


하지만 과연 미래는 바뀔까? 많은 사람들이 과거로 떠났지만 미래는 바뀌지 않았다. 그 말은 즉, 과거로 가서 무엇을 한들 아무 소용없다는 의미일지도. 그래서인지 몰라도 미래에서 과거로 향하는 사람들은 미래를 바꾸기 위한 준비가 아닌 과거 대한민국에 적응해서 살아갈 수 있을만한 수단을 몇 개 챙겨 올 뿐이다.


서해 마음속에도 미래는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녀는 과거로 와 한태술을 찾아내 그를 지킨다.  설령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고 해도 무엇이라도 해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 같은 거라 생각됐다. 서해는 그 마음에 대해 ‘후회’라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후회’는 A 주식을 사지 못 해서, 진작 집을 사놓지 않아서 오는 그런 류의 후회를 말하지 않는다. 익숙한 매일을 지겨워하고, 지쳐서 저도 모르게 뱉은 날카로운 한마디, 무심했던 눈빛, 다정하지 못했던 모든 순간에 대한 후회다. 현기(고윤)가 과거로 온 것도 같은 마음이다. 그가 과거로 온 건 당뇨 합병증으로 얼마 살지 못할 어머니를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마지막 날인 줄 알지 못하고 엄마 마음에 상처 준 게 후회돼서, 그때 지키지 못 한 임종을 지키기 위해 온다. 그런 마음으로 과거로 온 그는 어머니를 다시 만나자 평소 드시고 싶어 하던 라면을 끓여 배불리 드시게 하고 그 곁에서 임종을 지킨다. 죄송하다, 보고 싶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며 어머니의 다정한 시선을 마음에 담는다.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미래에 일어날 일이 그대로 일어났다. 하지만 정말 아무것도 바뀌지 않은 걸까? 내 생각엔 아니다. 현기가 과거로 옴으로 어머니는 쓸쓸하지 않게 긴 잠에 들 수 있게 됐다. 아들에게는 여전히 죄송한 마음이 남아있지만 그건 후회가 아닌 부모를 여읜 자식이 갖는 슬픔이다. 마음이 변했다. 눈에 보인 결과는 같을지 몰라도 임종을 지킨 아들의 마음과 아들의 배웅을 받은 엄마의 마음은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결과가 같다고 해서 모두 같은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나는 미래가 변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들이 기울이는 노력이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드라마 제목이자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인물인 '시지프스' 역시 바뀌지 않는 미래지만 계속해서 산꼭대기에 돌을 밀어 올린다. 올려놓으면 다시 떨어지는 것을 알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포기함으로 이 영원한 형벌에서 도망치려 하지 않고, 돌을 밀어 올리는 일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며 삶을 살아간다. 그 모습이 마치 바꾸지 않는 미래를 알면서도 과거로 온 서해와 닮았다. 시지프스를 닮은 서해 속엔 우리의 모습이 담겨 있기도 하다. 우리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시도한다. 시도해보지 않고선 알 수 없는 귀한 것들이 과정 속에 있기 때문이며, 당장 눈 앞에 보이는 변화가 없어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 건 진정한 변화는 오랜 시간 부딪혀 온 도전들이 쌓인 결과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드라마 <런 온>에서 오미주가 말했던 것처럼 '실패하는 것도 완성을 향해 가는 과정'으로 봐야 한다. 익숙한 표현을 빌리자면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된다.

그렇게 서해는 태술을 죽이러 미래에서 온 이들과 싸우면서 오히려 생각이 바뀐다. ‘미래는 바뀐다’고, ‘난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어떠한 희망 같은걸 본건 아니다. 오히려 일어난 일이 그녀를 그 일이 일어나는 상황으로 이끄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모든 일은 예정된 대로 일어난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의지는 강해진다. 그녀가 현재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엄연히 말하자면 그녀는 미래에서 과거로 왔지만, 그녀가 과거에 도착한 그 순간부터 과거는 그녀의 '현재'가 되었다. 자신이 결정한 선택이 예정된 미래를 그대로 따라 선택한 건지, 다른 미래를 가져올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 오늘 하루, 그녀에게 주어진 싸움을 싸운다. 마치 시지프스가 삶을 포기하지 않고 돌을 밀어 올리는 그 일 자체에 의미를 두며 살아낸 것처럼 서해도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의미를 두었다. 그리고 태술을 지키기 위해 서해보다 먼저 시공간을 이동한 태술의 형 태산도 그에게 남긴 편지에도 비슷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후회 없는 선택을 해. 좋은 선택이 모이면 어쨌든 결과도 좋을 거라고 생각해.’



나는 태수가 남긴 편지에 공감하는 바다. 이들은 변화를 위해 좋은 선택을 수 없이 쌓아 올리는 중이며 우리가 사는 삶 역시 그런 모습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사 실패한다고 해도 그들은 태술이 개발한 ‘업로더’를 통해 몇 번이고 과거로 와 더 나은 선택들을 할 수 있다. 실패를 과정 삼아 더 나은 선택을 하며 마침내 미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그런 설정이 이야기 속에 흐른다. 물론 그렇다고 드라마가 그렇게 흘러간다고 자신할 수 없지만, 미래를 변화시키기 위해 오늘의 싸움에 최선을 다하는 서해를 보며 나는 꼭 그들이 변화된 미래를 보게 되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런 엔딩을 본다면 ‘헛수고처럼 느껴진 어느 하루’가 실은 ‘수고 한 하루’였다는 위로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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