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빌레라(tvN, 2021)
“하고 싶은 게 많은 거, 부러워.”
주말에 사람을 만나지 않고 보낸 지 꽤 돼간다. 코로나 이후 여러 변화가 있었지만 그중 하나는 집에 가족이 머무는 시간이 늘었다는 점이다. 좁은 집이라 언니와 나는 방을 같이 쓰고 있다. 책상에 앉아 이어폰을 꼽고 드라마를 보면서 동시에 아이패드로 손글씨 작업을 하느냐 분주한 나를 보며 언니는 종종 부러워했다.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도 이것, 저것 하느냐 바쁜 나를 보며 집안사람들은 “공사다망”이라고 한다. 공사가 다 망해서 몸이 망가지겠다는 핀잔이다. 쉬엄 쉬엄하라고 하지만 평일에는 회사에 다녀오는 것만으로도 체력을 다 쓰는지라 하고 싶은 일은 주말에 몰아 놓고 빈틈없이 움직인다.
어릴 적에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은 내가 아닌 언니였다. 언니 때문에 나는 취미도 없는 피아노 학원을 다녀야 했고, 그렇게 첼로까지 배웠다. 딱히 잘하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이 컸는데 서른 문턱을 넘을 때 처음으로 하고 싶은 게 생겨 회사까지 그만두었다. 방송 작가가 되고 싶었다. 물론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일 사이에서 언제나 후자를 택하는 지독한 현실감각이 그 길을 가기에 늦었다는 사인을 주었고, 내 간절함은 몇 가지 핑계에 굽힐 정도였기에 다시 직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결을 가진 사람인지 조금 알게 되었다. 그래서 소소하게 글을 쓰고, 배우고 싶은 걸 배우러 다니고, 가르치는 클래스도 열어보며 이것저것 그러니까 그야말로 하고 싶은 소소한 것들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행복했지만 또, 그래서 괴롭기도 했다.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 그 반대 면엔 하지 못 해서 생기는 괴로움이 있었으니까..
“꿈, 신분증에 채 안 들어가는
삶의 전부,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의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황동규 #꿈견디기힘든
꿈보다는 신분증이 나를 더 잘 설명할 수 있지만, 신분증에 담기지 않는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건 어쩌면 꿈일지 모른다. 그래서 자꾸만, 무언가를 이루려고 하지만 쉽게 허락하지 않는 현실은 마치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의 아침 같아 괴롭다.
덕출의 마음도 그랬다. 퇴직 후 몇 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하루가 길기만 하다.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남들처럼 여행도 다니고 등산도 다녔을 테지만 덕출의 시간은 퇴직 후 멈춰있다. 그런 그를 보며 처음에는 오래 일했으니까 거기서 오는 어떠한 상실감이라고 생각했다. 대게 그 나이의 어른들에게 찾아오는 공허함 같은 감정이라고. 하지만 덕출은 날아오르고 싶은 꿈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발레가 하고 싶다. 안다. 발레를 하기엔 나이가 많다는 걸, 위험할 수도 있다는 걸. 하지만 어린 시절 우연히 보게 된 발레에 마음을 빼앗긴 채 육십 년을 살았다. 지금도 발레를 보면 심장이 두근 거려 잠을 잘 수 없다. 져도 좋으니 시작이라도 해보고 싶다며 발레 스튜디오 문을 두드린다. 환영받지 못할 걸 알면서도 그는 굳게 마음을 먹고 나름의 입단 테스트를 준비한다. 여러 번 삐끗하고, 넘어지면서도 덕출은 행복했고 동시에 괴로웠다. 생각처럼 따라오지 않는 몸을 보며 10년만 더 일찍 마음을 먹어볼걸 생각했을 것이다. ‘꿈 견디기 힘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의 아침처럼 거기 있는 꿈’
서른 문턱의 나도 새로운 걸 시작하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해서 포기했는데, 일흔의 노인이 무언가 원한다고 말하는 건 쉬웠을까. 그리고 그 마음이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젊은 사람이 가진 마음과 비교해서 작다 말할 수 있을까? 덕출의 마음을 계속 곱씹어 보자, 퇴직 후 그가 느꼈을 멈춰버린 시간에 대해 내가 너무 단순하게만 생각했다는 걸 알았다.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은 등산이나 여행, 에어로빅 정도라고 선을 그어버린 편협함도 있었다. 오래 품어온 마음, 스스로가 먼저 여러 번 포기했었을 그 시간 동안의 마음은 누군가의 이해나 허락이 필요한 일이 안다. 덕출의 발레는 하고 싶은 것이 많은 나의 꿈들에 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하고 싶은걸 꿈꾸는 마음이 어떤 모양으로 존중받길 원하는지도 생각하게 했다.
드라마 <나빌레라(2021, tvN)>는 꿈에 관한 이야기다. 이 곳엔 나이 일흔에 도전을 시작하는 덕출의 꿈과 스물셋, 꿈 앞에 방황하는 채록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 외에도 육아 때문에 퇴직 후 20년 만에 다시 복직을 꿈꾸는 덕출의 첫째 며느리 애란의 꿈과 의사라는 선망하는 직업을 그만두고 다큐멘터리 감독을 꿈꾸는 덕출의 막내아들 성관의 이야기도 있다. 두 사람의 꿈도 그럴듯한 이유들에 의해 방해를 받지만 덕출의 진심을 보고 자신들의 꿈에 다시금 제대로 임한다. 그리고 꿈을 잃은 호범과 꿈이 아직 없는, 잘 모르겠는 은호의 이야기도 담겨있다. 다음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는 원작의 큰 틀을 가져와 이렇듯 다양한 인물들의 꿈 이야기까지 담았다. 그러면서도 원작의 의미와 분위기를 잃지 않고 있어 방송 4회 만에 좋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드라마는 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나이 많은 할아버지의 도전’이 주는 감동적인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본다면 아주 작은 감동만 가져갈 것이다. 원작을 다 봤기에 이야기가 어떻게 흐를지 알고 있고 아마 많은 시청자들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드라마를 기다리는 건 덕출이 날아오는 과정이 우리에게 던질 수많은 도전과 질문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렇기에 1화 방송에서도 우린 각자, 다른 장면에서 저마다 가슴에 담긴 눈물을 흘렸던 것이라 생각한다. 이는 드라마 <나빌레라>가 나와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란 의미이기도 하다. 애정 하는 마음이 벌써부터 크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나중에, 드라마가 종용하면 그때 다시 한번 적어보려 한다. 당신과 내가 갖고 있고 갖게 될 그 꿈에 대한 이야기가 이 드라마와 함께 커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