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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Apr 30. 2021

나빌레라 : 대사 편 1

덕출은 올해 칠순이 됐다. 친구의 장례식에선 이젠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이별에 점점 익숙해져 간다. 그를 보면 시작보단 끝에 가까워 보이고, 세상도 무언가를 시작하기보단 마무리를 잘할 수 있게 시간을 써야 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덕출의 마음엔 오래도록 간직한 꿈이 있다. 아무도 몰라주고, 먹고사는데 바빠 그조차도 종종 잊었지만 때가 되면 떠오르는 발레를 향한 꿈이 있다.


“꿈, 신분증에 채 안 들어가는

삶의 전부, 쌓아도 무너지고

쌓아도 무너지는 모래 위의 아침처럼 가기 있는 꿈”

#황동규 #꿈견디기힘든


꿈이 그렇다. 없어도 살 수 있는데 자꾸 마음에 어떠한 바람을 만든다. 교석은 자신이 만든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고래를 만나고 싶었고 덕출은 발레를 하고 싶었다. 스무 살이든 칠십이든 꿈이야 말로 나이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꿈보단 신분증이 나를 더 잘 설명할 수 있지만, 신분증에 담기지 않는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건 어쩌면 꿈일지 모른다. 그래서 자꾸만 이루려 하는, 견디기 힘든 것.


교석은 다리에 힘 있고 정신 말짱할 때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말한다. 칠십이 된 덕출도 병원에 누워있는 교석 눈엔 이팔청춘이다. 그리고 진짜 이팔청춘 채록도 꿈을 이루기 위해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드라마 #나빌레라 는 ‘꿈’에 관한 이야기다. 꿈이 있거나 없거나, 꿈을 이루고 있는 중이거나 아직 꾸고 있는 중이거나 설령 꿈이 뭔지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그건 나와 그리고 당신의 이야기란 의미다. 나의 마음속엔 무엇이 있는지 물어본다. 견디기 힘들더라도 나를 보다 나 답게 하는 그 꿈. 저마다 갖고 있고 갖게 될 그 꿈에 대한 이야기가 이 드라마와 함께 커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퇴직 후 몇 년이 흘렀다. 상상해보건대 일을 그만두고 얼마간 덕출은 여행도 다니고 등산에 취미도 붙여 봤을 것이다. 노는 건 언제나 좋지만 그건 건강한 노동과 어우러질 때라고 생각된다. 쉼도 매일이 되는 순간 무뎌진다. 


덕출은 인생의 절반 이상의 시간을 하루도 빠짐없이 그에게 맡겨진 지역에 우편물을 배달했다. 채록은 그런 덕출을 보며 운동을 했었냐고 물을 정도로 건강하다. 쉴 만큼 쉬었는데도 아직 일흔이다. 백세 인생이라는 말을 생각해본다면 정년을 60으로 잡아도 남은 인생이 살아온 인생의 절반 가량 된다. 백세까지 살지 못한다고 해도 남은 시간이 마냥 짧다고만 말할 수 없다. 나는 아직 하루가 너무 길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그런 막막한 기분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매일, 성실히 움직이던 삶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원치 않게 멈춰 서게 된다면 슬프고 아플 것도 같다. 그래서 덕출이 발레를 보고 와서 두근거리는 마음에 쉽게 잠 못 이루지 못하면서도 칠순이니까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속이 상했다.


등산이나 여행을 권하는 마음처럼 하고 싶은 일을 응원해야겠다. 덕출 씨를 보니, 내내 품어온 마음을 꽃피우는 방법도 인생을 잘 마무리하는 방법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발레 공연을 보고 온 날 덕출은 오래 간직한 마음을 접기로 한다. 무대 위는 물론 관객석에서도 자신처럼 나이가 많은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게 이유다. 이제 와서 발레를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며칠 뒤 교석이 남긴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교석은 파도치는 소리가 들리던 그 밤, 고래를 만나기 위해 전진호를 띄운다. 평생 자기가 만든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고 싶었던 그 꿈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렇게 스스로 생을 떠난 교석의 마지막 편지를 보며 덕출은 눈물을 흘렸지만 죽음이 아닌 마음에 품은 것을 이루기 위해 먼 여정을 떠났다고 생각하며 묻는다.


큰 바다로 잘 갔냐. 고래도 잘 봤고?


교석의 먼 여행을 보며 덕출의 마음이 또다시 울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늦게, 이제 와서 시작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묻는 물음이 있다면 이제라도 그 마음에 귀 기울어야 할 때라 생각한다. 인생을 성공과 성취를 위해서만 사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어떤 대단한 결과가 없더라도 마음속에 오래 머문 그 바람을 들어주는 것 자체가 행복일 수 있다. 그렇다면 교석은 이제 행복할까.


그도 행복해졌길 바라지만 확인할 길이 없기에 그렇다고 믿을 뿐이다. 그러니 살아있을 때 행복했으면 좋겠다. 덕출 씨도 나도, 당신도 살아있는 지금 행복했으면 좋겠다.


발레 스튜디오가 있는 걸 알고 자꾸만 그 앞을 서성이던 덕출 씨를 그 안으로 이끈 건, 버럭 채록일지도 ◡̈ 마음과 말이 만나면 묘한 일이 일어난다. 확실치 않은 어떤 감정들은 입 밖으로 말이 되어 나올 때 강력한 존재감을 갖는다. 덕출 씨 속에 있던 마음이 입 밖으로 나가자, 발레는 좋아하는 것 그 이상이었다.


져도 좋으니 시작이라도 하고 싶다던 덕출은 정말로 채록이 낸 테스트를 통과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몇 번씩 쓰러져도 다시 일어섰고 테스트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기본자세를 딱 1분 유지한다. 테스트를 통과할 줄은 알았는데 왜 울컥해하는 건지�


언제부터 돌다리를 두드리고도 건너지 않고 있다. 그 다리를 건너야 꽃구경도 가고 할 텐데. 마음속에 있는 감정을 입 밖으로 내뱉어 봐야지. 어떤 마음일까, 어느 정도의 마음일까 ◡̈

참 멋진 덕출 씨다.

덕출은 자신이 발레를 배우기엔 늦었고, 나약하고 힘없는 노인인걸 안다. 인생이 언제 끝이 날지 알 수 없는 건 노인이나 청년이나 마찬가지지만, 보다 끝에 가까워졌음을 느끼는 덕출은 늦었기에 이제라도 발레를 배우려고 한다.


마음에 꿈을 품고 있던 덕출은 그렇기에 같은 마음을 담고 있던 이들을 남들보다 일찍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 같다. 힘들게 의사가 됐지만 내내 품고 있던 다큐멘터리 감독을 위해 병원을 그만둔 덕출의 막내를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의 전화도 받지 않고 가족과 거리를 두기 시작한 것도 그 즘일 것이다. 하지만 덕출은 그런 성관(#조복래 분)에게 네가 좋아하는 걸 지겹도록 말하라고 말했다. 포기하지 말라는 말보다 훨씬 행동적인 격려였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아버지를 보고 막내아들은 촬영을 위해 카메라를 사러 간다. 뭐에 쓰려고 카메라를 사냐고 묻는 판매자에게 성관은 '다큐멘터리를 찍으려고요.'라고 답한다. 그 순간 판매자는 조금 당황한 듯, 어이없는 듯 한 표정을 짓지만 성관에게 그런 반응이 더 이상 상관없어 보였다.


덕출의 첫째 며느리 애란도 아이를 낳고 얼마 안 있어 직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 마음을 20년 내내 품고서 은호를 키우고 가정을 돌봤다. 이제야 다시 복직하려는 애란을 성산은 이해하지 못하고 나무라기만 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누군가의 이해나 허락이 필요한 일일까? 덕출은 며느리가 어떤 마음으로 응원받고 싶은지까지 아는 듯했다. 덕출은 첫 째 아들 성산에게 그런 애란을 이해해라, 네가 이번엔 양보해라와 같은 말 대신 그저 네 몫만 하라고 말한다. 자신의 가정뿐만 아니라 동생들과 부모까지 책임지기 위해 애쓰는 성산을 위한 아버지의 당부이기도 했다.


덕출은 시간이 흐르는 것과 그래서 변하는 것들에 대해 슬퍼하거나 부정하거나 그렇다고 해서 쉽게 포기하지도 않는다. 인정할 것을 인정하는 가운데 자기 안에 있는 마음도 살핀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살아오면서 자신이 깨우친 지혜를 강요하지 않는다. 어설프게 고집만 늘은 나보다 덕출이 훨씬 젊고 건강하다. 영화 <인턴>을 참 좋아하는데 이야기는 다르지만 덕출을 보는데 벤이 생각났다. 그런 어른을 만난 것 같아 기뻤다.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대충 알 듯 하지만 절대 속단할 수 없는 것도 이런 덕출의 캐릭터 때문이라 생각된다. 재작년에는 #눈이 부시게 가 있었고 작년엔 #(아는건별로없지만)가족입니다 라는 드라마를 통해 세대를 이해하고, 삶을 고민해볼 수 있었다. 다양한 연령의 배우들이 등장해 그 시대에서 말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줘서 서로를 알아갈 수 있도록, 매년 이런 작품이 하나, 둘씩 꼭 나왔으면 좋겠다.


우리 채록이 이렇게 며칠 뒤에 사과할 거면서 말 참 밉게 했네 :)


채록은 즐겁게 발레를 했다. 테크닉이 좋지 않던 때에도 감정을 실어 연기하는 발레, 그 자체를 좋아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처럼 되지 않는 동작과 늘지 않는 실력 앞에 지쳤을지 모른다. 먹고살아야 하니 알바를 그만 둘 순 없었겠지만 치열하게 매달리지 않은 건 절박한 상황이 괴로워서였지 않을까. 그래서 정직원이 되기 위해 자존심도 내려놓고 일하는 인턴이 보기 싫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게다가 일흔의 나이에 발레를 하겠다고 온 덕출을 보니 진심에 전심을 다한다는 게 어떤 일인지 채록은 깨달은 것 같다.


즐기면서 할 수 있다는 건 어쩌면 그 정도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즐겁게 하던 일로 괴로워지는 건 안타까워진 상황이 아니라 더 커진 마음일지도. 절박함은 그래서 처절하고 불행한 상황이 아니라 진심에 전심을 다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고, 사과하는 채록을 보면서 생각해봤다.

채록이도 은호처럼 러닝머신 위를 뛰는 것 같은 시간이 있었다. 아버지의 강압에 실력도 없는 축구를 하던 때. 채록은 축구단이 해체된 이후 발레를 시작했다. 어린 나이부터 시작해온 다른 사람들에 비해 늦은 시작이다. 그래도 전직 발레리노 기승주 눈에 띌 정도로 채록은 재능이 있었다. 하지만 가볍게, 높게 날아오르지 못 한지 좀 되어간다. 아버지의 구속, 어머니의 죽음, 틀어진 관계,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까지. 모든 것들이 그의 발목을 무겁게 잡고 날아오르지 못하게 한다.


그가 일하는 알바에서 정직원이 되려고 애쓰는 은호 앞에서 허세 아닌 허세를 부린 것도 이런 불안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도 자신을 믿지 못하고 불안에 흔들리는데 본지 얼마 안 된 할아버지가 자신을 믿고 있다. 높이 날아오를 사람이라고, 값싼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니라고 채록이 없는 자리에서 그를 위해 말하는 덕출의 목소리는 힘 있고 단단했다.


원하고 바라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괴로움도 커진다. 언제나 잘 풀리는 건 아니니까. 그럴 때 나를 믿어주는 이의 목소리를 듣는 건 중요하다. 달콤한 말로 현혹하는 소리는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반면 믿음을 가진 목소리는 덕출처럼 단단하고 강하다. 가슴을 둥둥 울린다. 움츠리고 기운 잃은 심장을 쿵쿵 뛰게 한다. 그리고 이 날 채록은 자신이 발레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깨닫는다.


그래서 한편으로 꿈을 잃고 살아갈 방향까지 잃은, 그래서 채록을 괴롭히는 것 말고는 삶에 의미가 없는 호범이 덕출 같은 어른을 만나 자신만의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도 생겼다. #나의아저씨 에서 지안이 동훈을 만난 것처럼. 어제는 미운 호범이었지만 앞으론 응원하게 될 호범이길 바랬다.


오토바이 운전 실력, 당구 500의 위엄. 덕출 씨는 금가 프라자 사람들만큼 남모를 내공이 엄청난 히어로 같아:)

서른 중반을 넘기자 내 나이이지만, 두 자리 숫자가 실감이 안 나고 어색하기만 하다. 난 아직 이제 막 서른이 된 것 같은데 약 봉투나 민원서류에서 적인 나이를 볼 때면 늙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리고 그 두 자리 숫자에 하고자 하는 마음을 빼앗긴다. 지금 무언가 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겠냐며 섣불리 답을 내버린다.


어쩌면 덕출은 사십에도 오십에도 그리고 육십에도 발레를 해볼까, 하는 생각을 가졌을지 모른다. 원작에는 덕출의 심경이 더 잘 부각되는데 발레를 배우면서 십 년만 일찍 시작할걸 아쉬워하는 마음이 나온다. 하지만 더 늦으면 하고자 했던 마음도 잃어버릴 것 같았다. 하고 싶은데 몸이 안 따라줄 수도 있겠다. 일흔의 나이는 많은 나이고 늦은 나이지만 그가 살아있는 시간 중 가장 젊은 때였다. 시간은 이처럼 상대적이다.


그러니 그냥 할 수 있을 때 하자. 나이고, 때고 따지지 말고 날아오를 수 있을 때, 설사 날아오르지 못한다 해도 우선 높이 뛰어보련다. 회복탄력성을 잃은 몸뚱이를 달래어 심장을 뛰게 하는 일들을 다시 준비해야지. 나중이야 말로 진짜 늦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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