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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Apr 29. 2021

런 온: 대사 편 11

맛있게 밥을 차려서 미주 한 입 먹이더니 내내 시선이 미주의 지난 여행에 닿아있다. 그곳을 회상하며 행복해하는 모습이 보기 좋은가보다. 조금 더 이야기해달라는 선겸의 표정이 편안하고 행복해 보인다. 사랑하고 있구나 생각했다. 그러고 나서는 미주 말을 생각해봤다. 사는데 사실 많은 말은 필요 없지. 어떨 때는 해야 할 말은 하지 않고 하지 않아도 될 말로 낭비할 때가 많다고. 예를 들면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이런 거.


다시 그곳에 갈 때 함께 갔으면 한다고 말하는 선겸은 뭐가 쑥스러운지 미주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그런 선겸을 닮은 듯 미주도 선심 쓰듯 답하지만 어긋나는 시선이 마주 보는 시선보다 훨씬 설레었다. 꼭 그곳에 두 사람이 이렇게 닮은 색감의 옷을 입고 자유롭게 걸어 다녔길. <런 온>은 끝났지만 두 사람은 그렇게 살고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해보았다. ◡̈

위로는 크고 대단한 무언가가 아니라 이렇게 힘든 마음을 알아주고 안아주는 거라고 <런 온>은 내내 말하고 있었다. 선겸에게는 물론 잠옷 차림으로 찾아온 단아를 돌려보내지 않고 소주를 나눠 마시고,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시무룩한 영화를 집으로 불러 차 한잔 내어주고, 피할 것이 필요한 은비에게 등잔 밑이 되어주었다. 그 외에도 미주가 보여준 위로는 많았다. 자주 같이 밥을 먹었고 술을 마셨고 영화를 이야기했다. 그러는 사이, 사이 토닥거림과 좋은 질문을 건네 자기 안을 들여다보는 일을 두렵지 않게 해 주었다. 미주로 대표됐지만 <런 온>이 그랬다.


상대의 힘듦을 다 알지 못하면서 내가 하는 위로가 도움이 될까. 가볍지 않을까, 오히려 상처를 주는 게 아닐까 많은 마음 때문에 서툴렀던 위로하는 일에 대해 덕분에 많이 배웠다. 어떤 말이 아니라 ‘마음’을 전하는 것. 누나가 힘들어하면 이렇게 안아주라며 가족은 이런 거라던 미주의 위로를 받은 이들 모두 가족이었다. 내가 <런 온>을 함께 본 러너라는 사실에 무척 뿌듯해진다.

매희가 매이가 된 사연. 매이를 매희라 부르지 않아도 그 향기는 사라지지 않고, 말이 안 통하는 건 가족이라고 다를 바 없지만 애틋한 가족이란 사실도 변하지 않지.

가족이란 이유로 행복을 강요하지 않는 매이 언니의 가족에 관한 정의가 좋았다. 우리 집 같아서 � 마지막에 매이네 집에서 막내딸로 미주를 부르는 모습을 잠깐 상상해 봤다. 어쩌면 미주의 성숙함은 매이 언니 동생으로 자라 얻은 가족의 언어구나.

다정한 사람들.

마음을 억지로 잡아둔다고 그 마음이 그 자리에 있을까. 여기서 끝이라고 말해도 끝을 낼 수 없는 게 마음인 것처럼 영화는 단아를 향한 이야기에 엔딩을 맺지 않았다. 먼저는 단아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니까. 네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으니까. 영화는 아직까지 그 안에 가득한 단아를 보내지 않고 마음껏 그려냈을 테다. 엔딩에서 본 그의 그림이 내 눈에 온통 단아였던 것처럼.


달리는 출발선과 결승선이 있다는 점에서 인생에 많이 비유된다. 달리는 내내 우린 끝을 향해 가겠지만 그 마음에 매듭을 굳이 지금 단장 지을 필요가 있을까. 마음이 이끌어 어디에 나를 데려다 줄지 모르는데. 이 마음이 다시금 단아를 영화에게 데려다 줄지 모르는데. 결국 이렇게 주인공 모두가 한 번씩 울었네. 속 시원하게 울었으면 됐어. (괜히 내가 만족함)

마음을 억지로 잡아둔다고 그 마음이 그곳에 있을까. 여기서 끝이라고 말해도 끝을 낼 수 없는 게 마음인 것처럼 영화는 단아를 향한 이야기에 엔딩을 맺지 않았다. 먼저는 단아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니까. 너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했으니까. 영화는 아직까지 그 안에 가득한 단아를 보내지 않고 마음껏 그려냈을 테다. 엔딩에서 본 그의 그림이 내 눈에 온통 단아였던 것처럼.


달리는 출발선과 결승선이 있다는 점에서 인생에 많이 비유된다. 달리는 내내 우린 끝을 향해 가겠지만 그 마음에 매듭을 굳이 지금 당장 지을 필요가 있을까. 그 마음이 이끌어 어디에 나를 데려다 줄지 모르는데. 마음이 다시금 단아를 영화에게 데려다 줄지 모르는데. +이야기를 터 놓을 수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건 인생에서 아주 큰 행운이다. 아무렇지 않게 받아주는 미주의 위로도, 진지하게 들어주는 선겸의 위로도 모두 고맙다.

대기업 그만두고 감독님 되셨구나 상태 씨 �

마지막 회에 선호라니요. 작가 감독님 아름답게 마무리하시려고�


많은 이들의 이상형 중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 있다. 나 역시 그렇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선겸과 미주는 대화가 안 통하는 쪽이었는데 어떻게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을까. 선겸의 알듯 모를 듯 자꾸만 엇나가는 대화는 세상을 몰라서였다. 그의 상황이, 마음이 세상에 벽을 쌓게 했다. 하지만 미주는 언어로 다리를 놓는 사람이었고 복잡한 선겸의 말속에서 다행히 그를 볼 수 있었다.


누나에게 좋지 않은 소식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하는 선겸에게 미주가 말했다. “말을, 마음을 잘 전해봐요.” 나는 ‘말’ 너머에 있는 ‘마음’을 볼 수 있는 사람인가. 말이 안 통한다는 이유로 넘어갔던 상황들이 내가 마음을 더 썼더라면 더 깊어질 수 있었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말’도 ‘마음’의 영역이니까.


정말로 초반 두 사람의 대화는 어딘가 계속 어긋났는데 정말 이렇게 감격스러운 티키타카를 선보이다니. 감개무량 �뿌듯해하는 미주 마음이 십분 이해 간다.

일전에 본 어느 심리학 책에서 '역할'을 옷에 비유했다. 옷처럼 역할도 입고 벗기가 가능해야 한다고.


우리가 입는 옷은 기성품이어도 사람에 따라 다른 사이즈의 옷을 입는다. 똑같은 사이즈를 구매해도 누군가는 따로 수선을 맡겨 기장을 자신에게 맞추거나, 다른 아이템을 매치해 분위기를 다르게 가져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은비 말처럼 똑같은 이름의 역할도 그 역할을 입는 사람마다 다른 모습을 갖는 게 자연스러운 모습이지 않을까.


지우 언니는 자식들을 방목해서 키운 것처럼 말하지만 처음에는 자신의 인생에 수동적이던 선겸과 은비가 가족을 사랑하면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면 지우 언니를 닮아가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지우 언니는 가끔 엄마라는 옷을 입었겠지만 그 옷을 자신이 가장 잘 어울리고 좋아하는 배우라는 옷과 함께 잘 믹스 매치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떤 역할에 갇히지 않는다면 보다 자유로운 삶이 가능하겠지. 미주에겐 나와 잘 지내는 것이 숙제라면 내게는 이게 숙제다. 남들 보기 좋은 옷이나 멋지고 화려한 옷 말고 내게 맞는 옷을 입어야겠다. 그렇다면 역할이라는 옷 뒤에 있는 당신도 조금 더 잘 볼 수 있겠지.

영화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미주는 상태 감독의 작품에서도 반짝이는 소중한 이야기를 발견해 마음에 품었다. 과연 이러한 행위가 삶을 바꿀까? 드라마를 보며 책을 읽으며 누군가 하고 나눈 대화 속에 깨닫게 되는 건 많지만 내 삶은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그래서 가끔은 이런 깨달음이 부채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몰랐다면 지금만큼도 살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행이다.


선겸은 영화가 재미없지만 그녀가 왜 영화를 보는지, 미주라는 사람이 반짝이게 된 이유를 이제 알았다. 이제 와서? 하고 되물은 미주지만 웃음 가득한 걸 보니 행복해 보인다.


#이와중에스윗한우리상태감독님 #문자가프로포즈급

영화의 그림이 단아의 미술관에 걸렸다. 보통 신발을 사주면 헤어진다고 하던데, 단아는 그가 사준 파란색 운동화를 신고 그의 그림을 보러, 그에게 갔다. 그리고 그의 그림은 아직도 여전히 시끄럽게 말하고 있었다. 사랑한다고.


단아는 한 번도 그를 잊거나 그에 대한 마음이 옅어지거나 하지 못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바뀐 그녀의 삶은 그녀에게서 그를 떨어트려놨지만 마음은 여전히 그를 그리워했다.


영화는 미주 말처럼 천리안이라도 갖고 있는 걸까. 그녀의 바람대로 어디 있든 그가 있었다. 그림으로, 실제로도. 그를 사랑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사랑하기로 한 이 날이 그러므로 단아가 새로이 태어난 날이 되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해피엔딩이야?

음... 해피엔딩이 뭔데?


영화와 단아의 이러한 엔딩에 누가 내게 물었고 나는 저렇게 대답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미주, 선겸, 단아, 영화가 모여서도 이런 대화를 나눈다. 맥주를 마시면서.


'해피엔딩이 뭔데? 그거 어떻게 하는 건대?'


미주는 (영화의 표현을 빌리면) '해피엔딩'을 염세적으로 본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걸 문명이 만들어낸 환상이고 허상이라고. 영화는 사랑하는 사람과 알콩달콩 행복하게 살며 토끼 같은 자식을 낳는걸 해피라 말하며 그가 사랑하는 단아에게 같은 걸 꿈꾸면 안 되냐고 묻는다. 영원히 사랑할 거라면서. 영화에 문외한 사람과 현실적이지 않은 대화에 흥미가 없는 사람 덕에 이야기는 그 정도에서 대략 끝나면서 네 사람은 미주의 달리기 완주를 위하며 짠, 건배한다.


마지막 회에 결혼식장에 손 잡고 들어가는 장면이 없어도, 단아와 영화가 그녀가 사는 사회에서 인정받는 그런 장면이 없어도 이들이 풍기는 행복한 기운만으로도 충분히 해피했다. 그런 마지막 회라면 해피엔딩이 아닐까. 좋아하는 이와 단란하게 모여 소소한 일상을 위할 수 있다면 매일을 그렇게 행복하게 마무리한다면, 모든 시간이 해피엔딩이겠다.

<런 온>은 같은 한국말을 쓰면서도 소통이 어려운 시대, 서로 다른 세계에 살던 사람들이 각자의 언어로 소통하고 관계를 맺으며, 사랑을 향해 '런 온'하는 로맨스 드라마다. 이는 네이버에 나와 있는 <런 온>의 기본정보다. 이렇게 정확한 기본정보는 처음인 듯하다. 무엇보다 시작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주제를 흐트러짐 없이 가져왔다는 점은 놀랍다. 그만큼 디테일에 힘을 썼다는 의미겠다.


사실 드라마 소개 글을 보고 ‘서로 다른 세계’라는 문장에서 내가 가진 ‘다름’은 그들이 속한 사회나 성별 정도였다. 금성에서 온 남자, 화성에서 온 여자같이. 하지만 섬세한 설정이 가득 담긴 <런 온>은 우리가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모두 같은 모습이어야 한다 말하지 않는다. 더 넓은 ‘다름’을 보여주고 그 ‘다름’을 이해해가는 과정을 ‘언어’로 보여주었다. 설사 ‘다름’에 대한 서로 다른 생각까지도 말이다.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대화를 나누고 밥을 먹고 시간과 마음을 나누던, 다정하고 따뜻한 이 이야기를 나는 때마다 다시 보겠지.


동진 님(@cosmos__j )이 <런 온>에 대해 쓴 글 중에 이런 문장이 있다.

매번 좋은 작품을 만날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런 작품을 다시 또 만날 수 있을까?' 같은 종류의 것이지만, 거기에 매번 따르는 대답은 어쩔 수 없이 "그렇다"가 된다. 지금 각별하고 소중한 이야기도 시간이 지나면 기억에서 희미해지고 그 자리를 또 다른 작품들이 채워간다. 그러나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그것과 동일한 종류의 경험을 어디선가 반복하게 되지는 않으리라는 점이다. 이야기의 고유함은 그런 것이다. "


동진 님 의견에 적극 동의하며, 그래서 <런 온>을 정주행 한 소감은 <런 온> 안 본 눈 하나 사서 처음부터 다시 보고 싶다는 ◡̈

<런 온> 마지막 회를 두고 진행된 감독 인터뷰에서 감독은 이후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려볼 수 있는 엔딩이 될 거라고 했다.


“만남과 소통을 통해 성장하고 서로 사랑하게 된 인물들이 그동안 보인 것보다 ‘앞으로 훨씬 더 긴 시간을 이렇게 살아가겠구나’라는 걸 자연스럽게 그려볼 수 있는 결말을 만들고자 했다.”


마지막 회, 마지막 장면들을 보면서 감독의 말처럼 ‘등장인물들이 어딘가에서 저렇게 살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를 못 찾았다고 적어놨더니 친절한 인친 분이 기사를 보내주셔서 감독 님 인터뷰를 옮겼습니다. 감사해요 ��)


숨 가쁘게, 펼쳐 놓은 이야기를 수습하기 바쁜 일부 드라마와 다르게 지금까지 쌓아온 감정을 흔들지 않고 더 풍성히 만들면서 인물들의 나중을 상상하게 하는 마지막 회는 정말이지 해피한 기억으로 오래 남을 듯하다.


<런 온>을 볼 수 있어서 내게 큰 행복이었다. 안녕 <런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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