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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May 08. 2021

나빌레라 : 대사 편 2

출이 발레 하는 사진을 단톡 방에 올리자 큰 아들은 가족회의를 소집한다. 나는 첫 째 아들 성산(#정해균)이 아버지가 발레를 하겠다고 한 일에 대해 한 마디씩 해보라고 할 때 죄인처럼 앉아 있는 덕출 할아버지를 보는데... 마음 아팠다.


드라마를 보다 엄마에게 "엄마는 하고 싶은 게 뭐 있어, 저 할아버지는 발레가 하고 싶대" 물었다. 나는 엄마가 미대 진학을 준비했었고 그 후로도 물감들을 버리지 못하던 시간을 기억해서 바람을 묻는 내 물음에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말할 줄 알았다. 하지만 엄마는 "도자기 굽는 거 해보고 싶어"라고 말했다. 그릇을 좋아하는데 직접 만들어 보고 싶다고. 엄마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단순하게 엄마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조금 미안해졌다. 그래서 아버지가 발레를 좋아하는 줄도 몰랐다고 말하는 둘째 성숙(#김수진)이 내 모습 같기도 했고, 내게 성산의 모습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도 없었다. 그저 부모를 죄인처럼 만들진 않았나 기억을 되짚어 볼 뿐이었다.


이 드라마에서 꿈을 이루는 일에 반대를 겪는 건 덕출만이 아니다. 회사로 복귀하려는 애란도 다큐멘터리를 찍으려는 성관도 반대에 부딪힌다. 꿈을 이루는데 나이는 더욱이 문제 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진심이란 이런 반대와 응원 속에 굳건해지는 건지도.


덕출 씨 덕분에 엄마가 무엇을 왜 하고 싶은지 알게 되어 다행이다. 부모만 자식에게 관심을 갖는 게 아니라, 자식도 부모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걱정과 염려와 혼동하는 그런 관심 말고. 엄마가 내가 다니고 싶어 했던 학원을 보내줬던 것처럼 나도 엄마가 다니고 싶은 걸 할 수 있게... 열심히 돈 벌어야지.

르는 건 죄가 아닌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질문 앞에 정답을 말해야 한다는 부담이 커진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잘 모르겠다는 말이 선뜻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이 요즘의 나다. 어쩌면 상대의 질문에 어떻게 서든 답을 찾아주고 싶은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정답만을 강요받고 자란 까닭이거나 무지한 나를 숨기고 싶은 건지도. 이유가 어떠하든 간에 나의 무지가 상대에게 무례가 되지 않기를 바라며 대답을 고르려 한다.


"다리가 두 개뿐인 사람이 다리가 열 개나 되는 게의 입장을 쉽게 헤아릴 수는 없겠지. 하지만 쉽게 헤아리지 못하더라도 쉽게 비웃지는 말아야 한다." (#이외수 #불현듯살아야겠다고중얼거렸다)


나이를 먹는다고 지식이 저절로 쌓이는 것도 아닌데, 지혜는 더하지 않을까. 모든 걸 다 알 수 없으니 모르는 걸 감추지 않아야겠다. 쉽게 헤아리지 못하더라도 쉽게 비웃지 않기 위해 알아가는 일에도 노력을 기울어야겠다. 성산이 승주에게 보인 무례는 발레를 모름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마음을 알아보려 노력하지 않은 데서 왔기 때문이니까.

어느 시기가 되면 부모와 자식의 역할이 바뀌는 듯하다. 변화된 세상을 사는 지식을 부모님께 가르쳐드린다. 부모님의 약해진 몸을 대신해 힘을 쓰거나, 돈을 쓴다. 아무리 내가 잘 나가고 부유해진다 해도 내가 부모님의 부모가 될 수 없고 그분들의 어른 또한 될 수 없다. 그런데 그 사실을 잊는다. 목소리가 커지고 생색이 는다. 우리 부모님은 나를 키우며,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선뜻 주며 한 번도 내지 않았던 생색을 평생 받기만 하다 이제 좀 제 앞가림을 시작한 주제에 부린다. 그래 놓고서 아프고 힘들면 엄마 앞으로 달려간다. 스마트 폰은 엄마보다 잘 다룰지 몰라도 세상 사에 치일 때면 엄마한테 지혜를 구한다.


그래서 자식은 평생 자식임을. 저렇게 등짝을 맞아야 정신을 차리는 철부지임을. 그것도 부모님이 살아계셔야 가능한 일이란 사실 앞에 어제도 나빌레라를 보면서 울었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우리 사회에 너무 적어요.”

요즘 읽고 있는 #배려의말들 (#류승현작가 , #유유출판사) 에서 첫 번째 선택한 문장은 #은유작가 의 #알지못하는아이의죽음 에서다. 이 장면을 보는데 이 문장이 떠올랐다.


작가는 후배들에게 무서운 선배였다고 고백한다. 자신의 기준으로 후배를 대했기에, 한마디로 자신만큼 일을 못하면 구박을 했다고. 더욱이 당시엔 사람마다 속도가 다르다는 걸 알지 못했고 더딘 후배가 답답했다는 작가의 이야기에 만년 막내였다가 처음 직속 후배가 생겼을 던 나의 지난 일이 생각났다. 첫 후배가 한 달을 다니지 못하고 회사를 그만 두었던 일 말이다. 나는 그 후배에게 좋은 선배가 되어주지 못했다.


여러 상황이 복합적으로 일어났다고 하지만, 당시 나는 은유 작가의 말처럼 처음 시작하는 이를 향한 ‘기다림’과 ‘이해’이라는 배려가 적었다. 개구리가 올챙이 적 생각을 못 했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큰지라 그때 일이 내게도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부끄러운 감정’은 묻어버리고 피하고 싶지만 그게 잘 안된다. 아니, 그렇게 안된다는 건 감사한 일일지도. 그 직원분에게는 여전히 미안한 마음이지만 그 감정까지도 잊지 않고 이번에 뽑힌 신입 직원 교육에 조금 더 마음을 쏟고 있다. 은연중에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은 강렬한 부담이 한 점 흠도 없어야 한다는 강박을 주는 듯도 하지만, 그래서 정말 만년 막내로 있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으니 나는 선배가 된다는 게 무엇인지 열심히 배워나갈 생각이다. 다만 이런 생각이 들수록 그때 그만둔 직원이 생각난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그때 일은 잊고 정말 멋진 사회인으로 지내고 있길, 염치없는 바람을 담아 기도한다. 은호에게 이 일이 행복을 찾는 시작이 된 것처럼.


나는 얼마 전까지 '행복'과 '성취'를 혼돈했다. 무언가를 이뤄야만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좋아하는 것보단 할 수 있는 것에 매달렸고, 할 수 있는 것은 해내야 하는 것이 되었다. 부담과 조급함이 따라다녔고 매일 숨이 가빠 올랐다. 성취하지 못한 것은 그 과정이 어떠했더라도 의미를 갖지 못했기에 내게 있어 행복은 매일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곰돌이 푸가 말하던 "매일 행복할 순 없지만 행복은 매일 있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드라마 <나빌레라(2021, tvN)>는 꿈에 관한 이야기지만, 꿈을 찾는 과정에 '행복'이란 감정이 자주 등장한다. 덕출이 일흔이라는 나이에 발레를 배우려는 건 발레를 생각할 때 차오르는 행복 때문이다. 채록도 좋아하는 일이 간절해지자 힘들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그 과정 속에 놓인 작고 다양한 모습의 행복 덕에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날아오르려 점프를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두 사람처럼 행복을 발견하고 일상에서 누리는 건 아니다. 은호는 '언제 행복하냐'는 물음에 선뜻 답하지 못했다. 은호는 좋은 고등학교, 유명한 대학교를 나와 대기업에 취업을 하려 하는 소위 말해 인정받을 만한 코스를 걷고 있지만 그 시간 동안 행복하다 느낀 적이 없었다. 꿈과 함께 행복을 이뤄가는 두 사람을 보며 은호는 처음으로 누군가 설계해 놓은 또는 남들이 말하는 좋은 것이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고민하며 찾는 시간을 갖는다.


... ...


채록의 대사처럼 내가 언제 행복한지는 나만이 알 수 있다. 좋아하는 것은 행복과 아주 친밀하다. 그러니 자꾸 물어줘야 한다. 좋아하는 게 뭔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가령 나는 맛있는 커피 한 잔, 좋아하는 책을 읽는 주말의 한 시간, 퇴근길에 걸어보는 산책로, 그 옆에 지나가는 강아지를 바라보는 순간에서도 입가에 미소가 걸리며 행복해진다. 아주 작은 행복의 감정이라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있다면 기억해두고 있다 자주 그 시간을 갖자. 티끌 모아 태산을 이루는 게 행복이라고 다를까. '행복이라는 게 그렇게 소소하고 구체적일 수도 있겠다.' 그렇게 발견한 행복을 일상에 콕콕 박아두자. 작은 행복을 발견했을 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큰 행복을 가져오고 누리게 해 줄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 일은 자신을 아끼는 방법 중 하나가 되어줄 거라고도 믿는다.



브런치 #고작그정도라해도행복이야 의 일부. 전문은 브런치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덕출 씨가 말한 "끝까지 가지 마"라는 말이 내내 맴돌았다. 따뜻하지만 단호한 이정표 같다.


축구부가 갑자기 해체되고 동료였던 선수들은 한 두 명씩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채록은 발레를 시작했고, 현범은 대학생이 되었다. 하지만 호범은 길을 찾지 못했다. 현범은 골키퍼를 하기에 사실 키가 작았다. 채록이는 축구에 재능도 실력도 없었으니 마음을 빨리 정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호범은 축구가 좋았고 나름 실력도 있었다. 하루아침에 꿈을 빼앗긴 호범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아마 그도 채록을 탓하고 원망하는 게 아무 소용없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채록이, 현범이 잘하고 좋아하는 걸 찾은 게 부러우면서도 화도 났을 것이다. 좋아는 하나 할 수 없는 상황도, 마음처럼 길이 보이지 않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해서 또 화가 난 상태이었을지도.


그런 호범에게 덕출은 끝까지 가지 말라고 한다. 악한 마음을 끝까지 갖고 가지 말라고. 네게도 날아오를 수 있는 날개가 있으니 이만 돌아와 날아오르라고 호범을 붙잡는다. 채록을 향해 보였던 믿음을 호범에게도 보였다. 호범의 지금 상황을 탓하거나 비난하거나 그래서 그를 어두운 곳에 더욱 몰아 놓는 게 아니라, 덕출은 그 끝이 가보지 않아도 되는 곳임을 호범이 날아오를 미래를 보여줌으로 붙잡았다. 그의 미래를 생각해 그만 거기까지,라고 말해준다.


어쩌면 호범은 누군가 자신을 이렇게 잡아주길 바랬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내밀어준 손을 잡는 건 호범의 몫이다. 그가 날아오를 첫 스텝이기도 할 테다.


"남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도 중요하지만 그 사랑을 제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도 그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 #장영희 #내생애단한번


나는 이 드라마에서 호범이 날아오를 모습도 볼 수 있길 바란다.

긴 말 없이 위로하는 덕출 할아버지.

불안 속에 가라앉게 될수록 한 번은 꼭 자신을 믿어줌이 필요한데, 그러기 위해선 이러한 따뜻한 온기의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 덕분에 제대로 날아올랐던 채록. 두 사람의 케미가 날로 날로 더 두터워지는


호범에겐 끝까지 가지 말라고 말해주고, 채록에게는 다음이 있다고 말했다. 다른 듯 보이는 말이지만, 사실 같은 말이다. 호범이가 끝까지 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도 채록에게 말한 그다음 때문이니까. 아직 어린 두 사람에게 남아있는 수많은 기회와 가능성을 믿어 의심치 않는 덕출의 안목과 덕출이 살아온 시간이 준 지혜가 녹아 따뜻한 격려를 만든다. 이런 어른이 있어 채록과 호범 그리고 손녀 은호, 다음을 살아갈 세대가 마음까지 자라게 된다.


나도 덕출 할아버지를 만나보고 싶다. 바라는 만큼 나도 마음을 열어 듣고 또 자라나서 덕출 할아버지 같아지길 ◡̈

큰 용기를 내서 시작한 발레지만 아직 모든 가족이 그의 발레를 응원하는 건 아니다. 그를 오래 뵈었던 지인도, 동네 사람들도 그가 발레를 배운다는 소식에 춤바람이 났다거나 나이 먹어 뭐하는 일이냐고 핀잔을 줬다. 마음 굳게 먹고 시작했지만 이런 말들 속에 덕출은 발레를 시작한 걸 후회하는 마음이 들었다.


마음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다. 내가 나를 믿어주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렇다 해도 혼자선 버티지 못하는 바람이 있다. 덕출은 승주의 초대를 받아 간 작은 발레단에서 휠체어를 타고 발레를 선보이는 한 무용수를 만난다. 장애를 가졌지만 그녀는 무용수로서 멋진 발레를 보여줬다. 승주의 응원과 무용수의 공연을 보며 덕출은 다시 힘을 낸다. 혼자 맞던 강한 바람을 이길 다정한 응원들로 그의 마음이 한창 단단해졌다.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설령 그게 부족함이더라도 그건 틀린 게 아니라, 나만의 것을 찾게 해주는 귀한 열쇠가 되기도 한다는 걸. 그리고 나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도 이와 같단 생각이 들었다. 나의 부족함을 감추고 숨기려만 하지 말고, 그 속에 감춰진 다른 이야기를 찾아봐야겠다고 덕출 할아버지를 보며 느꼈다.


마지막에 덕출 씨가 보여줄 공연은 얼마나 눈물짓게 하려나 ㅠ

덕출 할아버지가 흘리고 간 수첩에서 채록은 할아버지가 갖고 병에 대해 알게 된다.


이후 장면은 6개월 전으로 흘러 덕출 씨가 의사로부터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는 병원을 보여준다. 덕출은 혼자 공원에 앉아 지난 일들을 떠올린다. 가족에게 부담이 될 것이 걱정되고, 사랑하는 가족을 잊을까 눈물 나는 마음이 스쳐 지나가는 회상 장면들로 보인다. 그리고 끝내 엄마, 아버지를 찾는다. 아무리 나이가 많고 어른이 되었다 해도, ‘엄마 아버지’ 그 부름은 의지가 되며 동시에 눈물이 된다. 이때 깔린 음악까지... 작정한 연출과 연기를 보면서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쳤다.


그러고 나서 그가 발레 스튜디오를 찾았음을 우린 안다. 이제 그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너무도 알게 되어 두 손을 모아 덕출 할아버지의 날아오름을 바라게 됐다. 드라마 속 인물임을 알지만 덕출 할아버지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우리 엄마와 아빠를 그리고 내게 올 이후의 시간들 속에 마주할 도전과 상황을 응원하게 되었다.

난 가끔 내가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생각이 꽤나 자유함을 준다. 이 말을 달리하면 나는 내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산다는 뜻이 되려나. 아니 그보단, 아무것도 아닌데 계속해서 무엇이 되려 해서 힘들어하는 것 같다.



채록은 모처럼 멋지게 뛰어올랐다. 그를 붙잡고 있던 부담감, 중압감에서 놓여 그야말로 날아올랐다. 잘하고 싶던 바람이 이뤄진 그 순간, 다리를 다치고 말았다. 부상의 정도는 심하지 않았지만 큰 대회를 앞두고 모처럼 찾은 좋은 컨디션에 채록의 마음은 더욱 급해져 간다. 그런 그에게 친구 세종은 천하의 메시도 골을 못 넣기도 하는데 네가 뭐라고 함부로 좌절을 하냐고 한다. 세종의 일침에 나도 채록도 어딘가 후련해진 기분이다.


NOTHING. 아무것도 아닌 나는 참으로 가볍다. 기대의 시선도, 잘하고자 하는 마음도, 열심히 해 온 내가 주는 부담도 영으로 만들어 어떤 좌절도 낙심도 없게 제로로 만든다. 아무것도 아닌 건 그러므로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게 아닐까. 내가 무엇이란 생각보단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좀 더 건강한 것도 같고. 가끔은 아니 자주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서 다행이다. 세상을 구할 것도 아니고. 그냥 내게 주어진 오늘을 살자. 그럼 뭐라도 돼 있지 ◡̈


채록은 발레가 잘하고 싶어 지자 괴로워졌다고 했는데, 잘하던 발레를 갑자기 그만둬야 했을 승주의 괴로움을 어땠을까? 가장 높은 자리에서 하루아침에 내려와야 했던 승주는 그래서 어쩌면 발레란 이래야 한다, 는 고집 같은 게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승주가 변했다. 그가 지금까지 추구하며 그렸던 완성형 발레와는 거리가 먼 덕출의 발레였지만 일흔의 노인이 전심으로 추는 발레가 우아했다. 그가 보여준 진심에 나이가 많다고 발레를 향한 그 마음이 작다 말할 수 없다는 걸 승주도 알게 되었다.


감탄을 자아 내는 게 감동을 주는 것보다 어렵구나. 나는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게 더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음을 움직이려면 진심이 담겨야 하는 일이라는 걸, 아마 알고 있었겠지만 이제야 깨닫게 된 승주일지도. 덕출을 만나 승주도 변했다. 다신 날아오를 수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승주에게도 다음이 있어 보인다. 감동을 주는 연출자, 스승으로의 다음. 인생에 있어 끝을 함부로 내어선 안 되겠다고 호범을 통해, 승주를 통해 다시 한번 느낀다.

(다른 의미로) 타고난 기억력으로 뭐든 잘 잊어버리는 나도 어릴 적 가족 간의 추억이 별로 없는데, 내 기억 속에 없을 뿐 부모님 기억 속에 나의 모든 순간이 가득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센조의 엄마가 어릴 때 그가 보여준 환한 미소를 잊지 않고 평생 간직했던 것처럼.


그리고 실제로 채록의 아버지는 그와 네 살 무렵에 목욕탕에 간 적이 있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대하듯 채록을 생각해주는 덕출에 기억 속에도 채록이 오래 남아있길 바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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