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보 May 04. 2021

쓸쓸하고도 슬픈 <낙원의 밤>

 *영화 <낙원의 밤>에 대한 개인적 감상으로 스포일러가 될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드라마 <빈센조>를 보다 누아르 장르물이 보고 싶었다. 때마침 넷플릭스에서 누아르 분위기 물씬 풍기는 <낙원의 밤> 소식이 들렸다. 그래 봤자 내게 있어 누아르는 영화 <무간도> 하나다. 여러 영화가 있겠지만 드라마를 많이 보는 내 세상에 누아르 영화는 오직 <무간도> 다. 이젠 기억에서도 희미해진 그 영화에 대한 나의 향수는 주인공이 보여주는 의리에 있다.


<낙원의 밤>은 박훈정 감독의 작품이다(각본도 감독과 동일하다). 드라마 덕후인 나는 감독의 전작 중 본 작품이 없다. 하지만 익히 들어 제목부터 익숙한 영화 <신세계>, <부당거래>, <마녀> 등 감독의 작품을 떠올리면 잔인하고 어둡지만 축축하지 않은 그런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낙원의 밤>이 가진 어둠은 해가 뜨기 전 가장 어두운 밤에서 새벽 동이 틀 무렵을 닮았다.


영화가 시작한 지 5분 만에 어떻게 흘러갈지 후반부가 그려졌다. 예언자가 된 것처럼 태구에게 일어날 일이 줄줄이 떠올랐고 내가 생각한 것처럼 이야기는 진행됐다. 일부로 사전 정보를 보지 않았음에도 그의 죽음까지 어떤 모양일지 그려낼 수 있었다. 재연이 등장하면서 그녀가 가지고 올 엔딩도 영화를 보는 동안 예상됐고, 그대로 흘러갔다. 그러나 희미한 기억이지만 내 기억에 머물러 있는 누아르 속 인물들만큼 <낙원의 밤> 속 조직원들은 멋지지 못했다. 품위가 없었다. 배역들이 특별한 개성 없이 흘러가는 듯 보였다. 그런데 어떠한 반격도 없던 태구를 보며 몹시 마음이 상했다. 나는 왜 <낙원의 밤>을 본 뒤 밤새 뒤척였던 걸까.

개봉한 영화에 대해 궁금한 게 생기면 제일 먼저 찾는 김동진 작가의 브런치에 역시나 <낙원의 밤>에 대한 글이 있었다. (글 바로가기). 김동진 작가는 이 영화를 어떤 면에 주목해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기술될 수 있다고 했다. " '조직의 타깃이 된 남자' '태구'의 삶 혹은 전여빈이 연기한 캐릭터와 '태구'의 관계". 이 중에서 나는 후자의 시선으로 이 영화를 보고 있었다. 밤새 마음이 슬펐던 이유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재연(전여빈 분)과 죽을 날이 다가옴을 느끼는 태구(엄태구 분). 두 사람이 만나 함께한 시간은 일주일이 채 안된다. 하지만 서로의 생에 흐르는 죽음의 그림자를 알아본 건지, 혼자 남겨진 자가 갖는 슬픔과 고독을 알아차린 건지... 두 사람이 나누는 몇 안 되는 대사는 누아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실없는 웃음을 주었는데, 그렇게 웃는 와중에도 마음에 슬픔이 쌓여 숨통을 조였다.


태구는 차를 타고 오다 재연에게 갑자기 왜 말을 놓느냐고 따지듯 묻는 장면이 있다(생각보다 이 영화에서 말을 놓는 문제로 언쟁하는 장면이 많다). 그런 태구에게 태어난 건 내가 너보다 늦어도 죽는 건 더 빠르니 말 좀 놓아도 된다는 재연의 말을, 태구는 죽기 직전 자신을 향해 눈물을 흘리는 재연에게 돌려준다. 태구가 앞서 그녀가 병으로 한 차례 쓰러졌을 때 괜찮냐고 묻자 재연은 괜찮지 않은 거 뻔히 알면서 괜찮냐고 묻는 사람이 젤 싫다고 응수를 뒀는데, 태구는 마지막 순간에 이 말도 기필코 재연에게 돌려준다. 이런 장면은 내가 좋아하는 연출 중 하나다. 상대가 한 말이 그 사람에게 오래 남아, 서로의 문장으로 대화를 이어가는 장면은 깊어진 관계를 보여준다.


재연은 죽어가는 태구에게 그래 봤자 며칠 먼저 가는 건데 무슨, 이라며 끝까지 말을 올리지 않는다. 그러자 태구는 "내가 너 그딴 식으로 말할 줄 알았다"라고 말하며 웃는다. 고작 일주일 사이 두 사람은 어떤 말을 할지도 알게 된 건가. 이런 상황에, 이런 농담을 하며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는다. 죽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말과 장면이 오간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재연이 보여준 마지막은 단순한 복수로 다가오지 않았다. 그녀를 태구의 인생에 그저 흘려보낼 수 없었다.

글을 쓰면서 '누아르'에 대해 검색해 봤다. 결과는 내가 생각하고 있는 느낌과 달랐다. 누아르(noir)는 '검은'이라는 의미를 지닌 프랑스어로, 장르 자체가 검은, 인 것이다. 어두운 분위기의 범죄/스릴러를 필름 누아르라고 불렀다고 한다.  잔혹하고 잔인한 그러면서도 정의에 관해 모호한 게 누아르라면 내가 좋아하는 장르는 아닌 듯하다. 그래서 나는 <낙원의 밤>를 잔혹한 범죄 속에 타깃이 된 태구의 삶보다 재연과 태구가 서로의 생에 느끼는 연민을 더 크게 느꼈나 보다. 내가 기대했던 누아르 속 신의, 의리를 다름 아닌 두 사람 속에서 보았던 것 같다.


이 영화의 마지막은 태구와 재연이 다녀간 제주도 장소를 한 번씩 비추며 끝난다. 그리 많은 장소가 나오지도 않는다. 그러나 두 사람이 다녀갔을 때와는 사뭇 다른, 맑은 날씨의 제주는 평범하게 보인다. 비가 그친 뒤 햇살이 비추는 모습은 짙은 어둠을 물리치고 동이 트기 시작하는 새벽처럼 보였다. 두 사람은 낙원에 이르렀을까? 그곳엔 햇살이 비출까?


어쩐지 낙원엔 밤이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부디 그들의 시간에 밤이 끝나고 해가 떠오르는 아침을 맞이했기를 바랐다. 이미 끝나버린 그들의 생임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나 쓸쓸하고도 슬픈 <낙원의 밤>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악의 방식'으로 말하는 정의로운 것들에 대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