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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May 08. 2021

나빌레라 : 대사 편 3

채록이 슬럼프를 이겨낼 수 있던 건 스스로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믿을 수 있었던 건, 채록에게 날아오를 날개가 있다는 걸 먼저 믿어준 덕출의 믿음에서부터였다. 나는 ‘내가 할 수 있을까?’ 자주 의심하는 편인데, 이를 이겨내는 방법으로 나를 믿어주는 이들의 안목을 신뢰한다. 나는 미처 보지 못 했거나, 간과한 나란 사람이 갖고 있는 가치를 신뢰할만한 사람들을 통해 발견하고 인정해 나간다. 간혹 나라는 사람 자체를 사랑해 내가 한 거라면 모든 좋게 봐주는 경우도 있지만, 아주 깊은 바닥에 놓였을 땐 그런 순수한 사랑에서도 힘을 얻는다.


믿음을 받아들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반대로 믿음을 주는 일도 쉽지 않다. 충고하고 평가하지 않고 믿고 기다려주는 게 어떤 모습일지, 채록의 친구 세종의 비유를 통해 그려 볼 수 있었다. (이 친구 비유를 통해 위로의 달인인 듯.) 받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것처럼, 받은 믿음을 보여줄 순서가 됐을 때 굳건한 믿음을 가져 한 발자국 더 걸었던 것처럼, 그대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길.


끝내 날아오르길 �‍♂️

덕출의 세계는 조금씩 천천히 그러다 갑자기 무너져 내렸다. 사라져 가는 기억 속에서 그가 지키고 싶었던 건 사랑하는 가족, 그들과 함께한 시간 그리고 발레였다. 모든 기억이 사라진 순간을 경험해보지 않은 나는 알츠하이머라는 병을 앓는 사람이 느낄 감정 중 두려움이 상당히 크겠다고, 덕출을 보며 생각했다.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은 깜깜한 공포에 갇힌 그의 앞에 익숙하게 눈에 익은 동작이 보이기 시작했다. 머리가 아닌 몸에 밴 동작, 각인된 몸짓은 그를 심연에서 이끌어 냈다.


사라져 가는 기억 속에서도 발레만은 아직 굳건하다는 걸 안 채록이 덕출 앞에서 보인 발레 동작들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어느 무대 위 공연보다 감동적이었다. 흔들리며 방황하던 덕출의 눈동자가 반듯이 채록을 보며, 마침내 그의 이름을 불었을 때 다시 한번 덕출에게 발레가 무엇인지, 그 진심을 느낄 수 있어 순간 말을 잃었다.


일흔 노인이 뒤늦게라도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도전하는 내용이었어도 충분히 감동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남은 생을 걸고 두렵지만 그 일을 해내고 있는 덕출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다. 매일 늙었다고 말하는데 정작 나는 아직 삶의 무게도, 진심도 모르는 철부지다.


채록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이 나이에 발레를 시작한 게 맞는지, 잘한 건지 덕출도 흔들렸다. 덕출이 발레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이미 알고 있던 것들이다. 갑자기 튀어나온 생각은 아니었다. 아무리 마음먹어도 이따금씩 흔들릴 수 있다. 몸이 힘들어서, 피곤해서, 생각만큼 마음만큼 일이 풀리지 않아서, 나만 좋아하는 것 같아서 흔들린다. 마음이 크다는 게 마냥 좋은 일은 아니었다. 작은 바람에도 크게 낙심되더라. 하지만 포기하자니 그럴 수 없었다. 그만두기에 그가 이룬 것이 많다거나, 갑자기 모두의 인정을 받아서가 아니다. 자신을 흔드는 사람들의 말과 상황 속에 그가 발레를 향해 가져야 할 마음이 무엇인지 깨달았을 뿐이다.


누군가 오해할 수도, 의심할 수도 있지만 발레를 향해 그가 가진 진심이 무엇인지 확인한 덕출은 아무렴, 괜찮아졌다. 애당초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 시작한 일이 아니니까. 그저 발레가 좋고 소중한 하루, 하루를 좋아하는 일로 채워 나간다. 그러다 생긴 목표를 향해 그 누구보다 반짝이는 시간을 갖는다. 연약해 보이지만 포기하지 않을 때 생기는 강함을 아는 덕출은 묵묵히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때론 많은 말로 보다, 진심을 다해 걸어가는 발자국이 더 강하고 확실한 메시지가 된다.


흔들리는 마음이 연약해 보여, 이런 마음이면 그만해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하는 내게 조금 더 해보라고,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걸어 나가는 것 자체가 어떤 힘을 가지는지 덕출이 그리고 윤여정 배우님이 ◡̈ 보여주셨다. (갑툭 윤선생님 ◡̈ )


많은 대화 없이도 그저 미안하다, 한 마디면 되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살아가면 갈수록 더욱 커지는 부모와 자식의 이야기. 매회 눈물이 날 수밖에.

그렇게 채록이를 괴롭힐 땐 언제고. 공원에서 힘 없이 앉아있는 덕출을 보자 호범은 채록에게 덕출에 대해 문자를 보낸다. 아직 카톡 친구가 아닌걸 보니 내외하는 것 같긴 한데 � 츤츤거리면서도 덕출을 걱정하고, 덕출이 한 말을 귀담아 못 다 핀 날갯짓을 시작한 호범이 정말이 멋지다.


덕출 할아버지가 보여준 꿈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을 따라 그의 아들 성관도, 호범도 머뭇거리던 발걸음을 한 발자국 떼기 시작했다.


뒤늦게 꿈에 도전하는 덕출 할아버지만큼 한번 크게 좌절했음에도 다시금 도전하는 호범도 강하다. 그가 자신의 날개를 저버리지 않게, 끝까지 가지 않을 수 있게 믿음을 나눠준 덕출 할아버지 같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그런 모습을 꿈꿔볼 수 있게 덕출 할아버지는 내 인생에서도 앞서 걸어주고 계신 듯하다.

기억을 잃는 시간이 잦아지면서 채록은 덕출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발레를 그만두라고 했다. 자신의 상황과 진심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채록의 말이었기에 덕출은 그냥 흘러 들을 수 없었다. 핸드폰도 끄고 덕출이 찾아간 곳은 친구 교석이 잠든 나무다. 덕출에게 네 가슴에 무엇이 있느냐 묻던, 전진호를 타고 바다에 나가고 싶어 했던,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끝내고 만 친구 곁에서 덕출은 하루를 꼬박 고민한다.


걱정하던 가족이 마침내 아버지를 찾았고 덕출이 성산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자신을 걱정해 찾아다니던 채록을 만난다. 그리고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채록이 앞에서 발레 동작을 선보인다. 처음에 그가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것을 찾고, 시선을 이겨내며 그 꿈에 도전하는 모습이 좋았다. 동시에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어떤 힘듬을 가져오는지 공감했고, 막막한 환경 속에서 포기하기 버다 고민하는 덕출을 보며 내 마음을 살폈다. 그러면서 점점 짙어지는 덕출의 진심이 나를 부끄럽게 하다 이내 반성하게 했다. 어쩌면 이 작품을 찍는다는 건 박인환 배우님에게도 도전이었을지 모른다. 발레를 잘 모르지만, 배우님의 손 끝, 발 끝에 덕출의 진심이 묻어있음은 느낄 수 있었다.


12회로 종영을 맞은 어제 마지막 회를 보며 따뜻한 사람에 대해 알게 된 기분이 들었다. 매회 마음을 가득 채우며 지금 살아가는 나와 가족이 대해 살펴보게 하는 작품이 얼마나 될까. 아직 대사는 남았지만, 아주 꽉 찬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니 눈물 걱정 말고 많은 사람들이 덕출 할아버지를 알게 되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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