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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May 29. 2021

‘멸망’이 찾아오자 하루의 소중함도 알게 됐다.

<어느 날 우리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 ( tvN, 2021)

   동경은 하루아침에 ‘교모세포종’이라는 진단과 함께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같은 날 3개월을 교제한 남자 친구가 유부남이란 사실 또한 알게 되었으나 거지 같은 하루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선 몰카범을 만나고 역사를 나오면서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비에 모두들 우산을 꺼내는데 그녀만 우산 없더라. 몸과 마음 모두 한계에 도달할 때쯤 아무도 없는 빈 집에 들어선다. 누구의 위로가 있었으면 눈물이라도 흘렸을까.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 온 연락은 학자금 대출 미상환에 따른 독촉 문자뿐이었다. 아님 정신 나간 전 남자 친구이거나.


   이런 날 가장 잔인한 건 자연이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검은 밤하늘에 미친 듯 별똥별이 쏟아진다. 황홀하게. 그 순간 동경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소원을 빈다. “이 세상, 망해버려라!” 시한부 선고를 받는 순간에도 눈물 한번 흘리지 않은 그녀다. 우는 건 부모님이 돌아가신 열 살에 멈췄다. 흐르지 못 한 눈물이 머리에 자리했나 보다. 만약 그녀가 그 아름다운 하늘을 보며 그저 아름답다고만 생각했다면 난 억장이 무너졌을 테다. 이렇게 거지 같을 수 없다 할 정도로 엉망이 돼버린 날, ‘멸망’도 세상의 멸망을 빌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동경의 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온 이유다.




  ‘멸망’, 그의 걸음 한 번, 손 짓 한번, 시선 한번 모두가 멸망으로 이어진다. 그는 ‘처음’과 ‘나중’에서 나중을 맡고 있는, 마지막을 위해 존재하는 존재다. 모든 것의 나중이라는 그는 어째서 세상의 멸망을 빌었던 것일까? 멸망을 위한 존재지만, 정작 자신과 세상은 멸망시킬 수 없었기에 그는 동경의 소원을 빌어 세상이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길 바랬다. ‘멸망’은 내내 멸망보다 더 지독한 게 삶이라고 말했고, 동경도 더 사다 한들 사는 게 멸망과 다르지 않을 거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들이 원하는 게 정말 멸망일까? ‘멸망’이 삶의 고단함에 대해 말하는 대사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 하지만 그 공감이 내일 당장 세상이 멸망하여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


  ‘멸망’은 세상이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동경의 소원이 마음에 들었기에, 남은 3개월의 시간 동안 병으로 아프지 않게 해주는 것 외에 하나의 소원을 더 들어주기로 한다. 당신이라면 어떤 소원을 빌겠는가. 당연히 살려달라는 건 구할 수 없다. 그녀가 죽어야지 세상이 망하니까 ‘멸망’은 그 소원만은 제외시켰다. 동경의 질문에 같은 직장 동료들 모두 돈을 말했다. 아, 막내는 명예를 말했고. 나도 단번에 떠오른 소원은 돈이다. 밀린 학자금 대출도 갚고, 남겨질 동생을 위해 집도 하나 사놓고, 그동안 못 해본 여행도 마음껏 하고 무엇보다 돈이 생기면 회사부터 그만둘 생각이었다. 하지만 동경은 소원을 말하지 않는다.


  “십 년을 산다면 돈을, 꿈을, 사랑을 원하겠지만 나는 고작 백일을 살뿐.”

  “살고 싶은 게 아니라 행복하게 살고 싶은 거야. 나 그걸 이제 막 깨달았거든.”


  동경은 고작 100일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어제와 다를 것 없이 하루를 산다. 지옥철을 뚫고 출퇴근을 하고, 상사와 클라이언트 사이에 치이고, 철없는 동생을 챙기며, 자신을 찾아온 ‘멸망’을 이해하는 노력을 기울인다. 소원권은 정말 의미 있게 사용하고 싶다는 말과 함께. 그녀의 삶에 ‘멸망’이 찾아오고 나서 지루하고 지치는, 무감했던 일상이 행복을 느끼게 하는 수 만가지로 가득했다는 걸, 동경은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개인적으로 꽤 피곤하고 신경이 곤두선 2주를 보냈다. 지치고, 지루하고, 고단했기에 ‘멸망’이 삶을 회의적으로 말할 때마다 공감했고,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돈도, 꿈도, 사랑도 격하게 바라고 원하는 걸 보면 나는 인생에 멸망이 오길 바라는 게 아니다. 오히려 영원히 살 것처럼 살기에 오늘을 놓치고, 그래서 살아있는 지금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것처럼 사고 있는 게 아닐까? 사실 내 삶에도 ‘멸망’의 그늘이 드리워져있다. 우린 살고 있다고 말하지만 실상 죽어가고 있는 거니까. 이미 멸망, 그 나중이 곁에 있다. 그러니 나는 오늘 하루 담긴 수만 가지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같은 날, 같은 소원을 빈 ‘멸망’도 실은 동경과 같은 마음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죽지 않는 존재가 비는 세상의 멸망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죽을 수 없는 존재가 간절히 죽음을 원하는 모습에서 김신 장군, 도깨비가 생각났다. 하나 그도 자신을 무로 돌아가게 할 지은탁이 나타나자, 아직 더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니 ‘멸망’이 원하는 건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제대로 살고 싶은 건 아닐까. 모두들 자신을 원하지만 정작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동경은 그가 가져오는 마지막이 또 다른 시작이 된다는 걸 알아봤다. 그리고 그에게 이름을 붙여줬다. 이름은 불러주는 이가 있을 때만 존재한다.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우린 불러질 때 의미가 된다. 그렇게 ‘멸망’은 동경을 만나 존재함이 아닌 살아있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산다는 것에 대한 고민’은 오직 살아 있는 인간만이 가능하다. 그러니 그가 바랬던 그의 세계의 멸망은 ‘존재’를 끝내고 ‘사는 것’이 아닐까.


   사람의 이야기는  다른 초월적 존재, ‘처음 ‘나중에서 처음을 맡고 있으며 ‘멸망 존재하게  존재의 개입으로  다른 국면으로 접어든다. ‘처음 정해준 운명대로  것인가 아니면 운명에  다른 이야기를 만들까. 초월적 존재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단골 주제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런 드라마에서 인간은 언제나 생각지도 못한 훌륭한 선택으로 주어진 삶을 책임진다. 어떻게 살지를 고민하는  인간만이 하는 일이니까. ‘멸망 동경, 그냥 사는  말고 행복하게 살기 원하는  존재와  인간이 마지막까지 들려줄 이야기는 어떨까?


  꽤나 아름답게, 쓸쓸하게 삶과 죽음을 말하고 있는  #우리집현관으로멸망이들어왔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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