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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Apr 25. 2022

네 잘못이 아니야

<너는 나의 봄> (tvN, 2021)

은하(김예원 분)는 친구 다정(서현진 분)에게 전화를 걸어 울분을 쏟았다. 그 장소가 도로 변이라  지나가던 사람들이 은하를 쳐다봤지만, 그런 시선을 의식할 상황이 아니었다. 도대체 헤어진 지가 언제인데 은하와 준호의 헤어짐을 두고 주변에서는 아직도 말이 많다. 그녀의 집안은 부유했고 남자 친구는 가난한 연극배우였으니, 사람들은 은하가 가난한 남자 친구를 버렸을 거라고 추측했다. 두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다 헤어지기까지 한 가지 이유만 있지 않듯, 한 사람의 잘못만 있을 수도 없는데 비난의 화살은 매번 은하에게만 쏟아졌다. 정작 당사자들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말이다.


갑작스러운 은하의 전화가 당황스러울 법한데도 다정은 그런 내색 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몇 번의 몇 번이고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줄 준비가 되어 있었고, 언제나 그랬듯 그렇게 말해주었다. 다정은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했고,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은하는 계속 다정에게 자신이 옳았다고 말해달라고 한다. 아마도 은하는 자신의 선택이 틀렸고, 이별에 책임이 사람들의 말처럼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도 드라마 속 은하처럼 마음이 눅눅해져 있었다. 그녀의 마음을 눅눅하게 만든 건 사실 이미 끝난 일이다. 일로 만난 사이였고, 일을 하다 중간에 파트너를 바꾸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었지만, 그 사이에 쌓인 정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쉽게 마음을 거두지 못했고, 다 끝난 일라고들 하나 계속 마음이 쓰였다. 그녀는 받은 만큼 일한다거나 적당히 하는 법을 몰랐다. 모든 관계에 진지함을 담아 최선을 다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촌스럽다 느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떠난 파트너가 남긴 숙제를 홀로 감당했다. 사실 그녀의 몫이 아니었음에도 그녀는 자신이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 일들을 정리해갔지만 그사이 자신도 모르게 상처가 생겼었나 보다. 어떻게 지내고 있냐는 한 마디에 눈시울이 붉어진 걸 보니. 지인은 천천히 마음의 우물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무엇이 부족했었을까, 무엇을 더 했어야 했나... 지인도, 은하도 예상하지 않았던 결말에 일이 이렇게 된 이유를 곱씹다 모든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았을지 모른다. 다정에게 남자 친구를 흉봐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내 편을 들어달라는 것도 아닌 자신이 옳았다고 말해달라고 한 걸 보면. 하지만 은하도 지인도 틀리지 않았다. 애당초 옳고 그름을 따질 일이 아니다. 굳이 따진다면 모두의 잘못이다. 그냥 그렇게 된 것뿐. 나는 두 사람이 느끼는 부채감은 상대를 향한 마음이 컸기 때문이라, 사랑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런 거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눈물을 떨구는 지인에게 너의 부족함 때문이 아니라고 말했다. INTJ 답게 그렇게 생각한 합리적이고도 논리적인 이유도 덧 붙여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말해준 이유가 특별한 것들은 아니었다. 그녀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이유였지만, 자신의 잘못만 찾고 있는 그녀 눈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마음의 우물에 빠지면 시야가 좁아지고, 혼자선 헤어 나오기 힘들기에 그저 알고 있을 사실들을 한번 상기시켜줌으로 그녀 주변을 감싸는 공기를 환기시켜주었다. 내 말을 듣던 지인은 일전엔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겸손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녀를 좋아한다. 


차츰 부드럽게 풀리는 그녀의 표정에 내 마음도 조금 편안해졌다. 그녀의 표정이 풀린 건 내가 말해준 이유가 납득되어서라기 보단, 자신을 생각하며 마음 써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대한 안도감으로 보였다. 그녀는 그동안 조금 외로웠었다고 말했다. 신혼인 사람이 무슨, 이라고 말했지만 원래 이렇게 급하게 약속을 잡는 사람이 아닌데, 다급히 만나자고 한 것만 봐도 마음이 고립된 상태였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편하게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요즘, 그녀가 말하는 외로움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내일'을 살아갈 힘이 없어 스스로 생을 포기하려는 이들을 구하는 저승사자들의 이야기 드라마 <내일>에서 저승을 관리하는 옥황(김해숙 분)이 '고작 말 몇 마디로 살아갈 힘을 얻을 거면서 왜 쉽게 죽음을 선택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인도 관리 팀 박중길 팀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 간단한 말 몇 마디를 듣지 못해서 죽음을 선택하는 자의 심정은 어떻겠어. 장담하건대 죽음을 쉬이 선택하는 자는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아."

내가 그녀에게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던 건 내게도 다행인 일이다. 은하가 다정에게 전화를 한 이유도 그 마음에 확신을 갖기 위함보다(물론 그럴 수도 있지만), 자신을 아는 이가 주는 위로를 받고 싶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 많은 그곳에서, 당장이라도 그 말을 듣지 않았다면 죽을 것 만같아서, 그런 절박한 마음으로 건 전화를 다정이 놓치지 않았던 것 처럼, 나도 늦지 않게 그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던건 다행인 일이었다. 그렇다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말은 마음의 우물 속에 빠져가는 이를 구하는 구명조끼가 아닐까. 누군가의 '내일'을 지켜주는 말이 아니었을까.


살아가다 보면 잘잘못을 가리기 힘든 일이 참 많다. 어떤 일은 정말로 그냥 일어나버린, 해프닝이기도 하다. 나도 참 내 탓 잘하는 사람인데, 모든 일에 원인을 찾고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걸 조금씩 깨닫고, 무식한 책임감을 내려놓으려 하는 중이다. 그러니 선한 당신이여(아마도 당신은 자신이 선하다고 인정하지 않겠지만, 일에 있어 본인을 먼저 되돌아보는 마음을 가진 사람을 나는 선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모든 일을 큰 마음으로 대하는 그대의 선함을, 상대를 향한 그 배려를 조금 덜어 오늘의 당신에게도 나눠주었으면 좋겠다. 그 모든 게 당신의 잘못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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