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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Mar 26. 2022

그만둠을 응원하는 이야기들

<서른아홉> (JTBC) , <스물다섯 스물하나> (tvN) 2022

“너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해”


현준(이태환 분)이 호텔 세프 자리를 그만두고 자그마한 동네에 중식당을 차린다고 했을 때, 그는 이런 말을 듣고 싶었을지 모른다. “너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해” 적어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 중 한 사람에게서는 들을 수 있을 거라 믿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태환은 중식당이 어느 정도 안정적이 된 후에도 기대했던 말을 듣지 못했다. 그의 그만둠은 응원받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호텔을 그만둘 무렵 호텔의 다음 수석 세프로 그가 물망 위에 올라 있었고, 수석 세프로의 임명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들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가 선망하는 자리, 그 자리를 목전에 두고 예고도 없이 그만둔 그의 선택은 동료들은 물론이고 여자 친구인 혜진(오세영 분)도 이해할 수 없었다. 새로운 시작에 대한 응원보다 그만두며 잃게 될 것들을 셈하며 걱정과 염려로 그의 선택을 반대했다.


그만두는 건 언제나 옮다.

누군가의 내게 와서 하던 일을 그만두고 싶다 말할 때 평소에 잘 쓰지 않는 '단호체'로, 온 힘을 실어 말해준다. 잘했다고, 그만두는 건 언제나 옳다고. 불안이 일렁이는 마음이 잔잔해질 수 있도록 마법의 주문을 걸듯 말한다. 우리의 시작은 언제나, 대체로 응원을 받는다. 개업하는 매장만 가도 초록 잎이 반짝이는 화분들엔 “돈 세다 잠들어라”, “적게 일하고 많이 벌어라” 같이 재치 있는 응원의 메시지가 적혀있다. 하지만 그만둠이 응원을 받는 일은 글쎄, 짧은 내 인생만 놓고 봐도 흔한 일은 아니다.


대학교를 졸업하기도 전에 한 회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한 달만에 그만두었다. 실제로 출근해보니 채용공고와 많은 부분이 달랐다. 지금 이런 일을 겪는다면 회사 측에 허위 사실 기재에 따른 책임을 확인하거나 적어도 그만두는 일에 대해 망설임이 없었을 텐데, 그때는 처음 겪는 취업 과정이다 보니 모든 면에 서툴렀고, 내 탓만 같았다. 다른 업무와 환경 속에 위축되어가며 한 달 사이 4kg가 빠졌다. 몸과 마음이 고생이란 고생을 다 했음에도 회사를 그만둔다고 말할 때 나는 아주 큰 죄를 지은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그만두어도 괜찮다는 경험이 없었다. 하던 일을 그만둘 수도 있고, 멈췄다가 쉬었다가 다시 할 수도 있고 다시 해도 된다는 걸 몰랐다. 당시 지방에 계셨던 아빠는 내가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말하자 긴 침묵 속에 한 마디를 하셨다. 아마 한 마디만 하신 건 아니었을 텐데, 그 말만 기억에 남았다. “조금만 더 버텨보지.”


나중에야 그 말의 의미를 알았다. 버티는 게 필요한 순간이 있다는 것을. 그만두는 게 쉬우면 습관이 될 수 있기에 아빠는 이를 염려했던 것이다. 드라마 <스물다섯스물하나(tvN, 2022)>에 아빠의 염려와 닮은 이야기가 나온다. 펜싱 선수였던 예지(주보영 분)가 학창 시절 내내 해 온 펜싱을 그만둔다고 했을 때 양찬미 코치(김혜은 분)는 쉽게 그만두게 하지 않겠다며, 예지의 그만둠을 반대하고 나선다. 그러자 펜싱부의 에이스인 희도(김태리 분)와 유림(김지연 분)이 연습을 보이콧하며 예지의 그만둠을 지지하고 나서자 양찬미 코치는 다음 경기에서 예지가 8강에 진출하면 펜싱을 그만두는 걸 허락하겠다는 제안을 한다. 에지는 다음 시합에서 8강에 진출한다. 실력이 성장하지 않아 슬럼프를 겪던 예지가 이번 성취의 경험을 통해 계속 펜싱을 이어가겠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나의 오만이었다. 예지는 4강에 진출하지 않고 기권함으로 그렇게 자신의 인생에서 펜싱을 끝낸다. 양찬미 코치는 두말하지 않고 예지의 그만둠을 응원한다. 사실 양찬미 코치는 새로운 기회를 어떻게 얻어냈는지, 그 시작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알려주고 싶었다.



시작은 무언가 끝났을 때, 그만둠으로 얻어진 기회다. 시작의 순간 무한대로 펼쳐지는 가능성은 이후 펼쳐질 어려운 순간을 낙관하게 만든다. 그러다 만난 고난은 앞서 품은 모든 희망을 단번에 부서 버리고 비극적인 결말로 이야기의 엔딩을 상상하게 만든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그 때야 말로 힘들게 그만두었던 순간과 어렵게 거머쥔 시작을 떠올리는 ‘근성’을 가동해야 할 때다. 포기가 도전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근성이 미련함이 아니라는 걸 드라마는 동시에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당시 아빠의 말은 서운했으나 그 말이 내게 버티는 근성을 길러준 건 사실이다. 그만둠을 응원하는 사람이지만 나는 근성을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중요한 덕목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건 고민하는 삶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만두는 사람보다 더 많이 고민한 사람은 없다. 태환이 성공가도라고 불리는 그 길을 이제 그만 걷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험한 길을 걷기까지 수많은 밤을 잠 못 이루며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태환에게 있어 호텔에서 버티던 날들보다 고만고만한 동네지만 자신만의 요리를 하는 지금이 더 행복하다. 현준의 여자 친구는 그에게 호텔에서 수석 세프 자리를 제안했고, 이를 그가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을 사랑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수석 세프가 되어줄 수도 있는 게 아니냐고 묻었다. 아니 사실 화를 낸다. 어떻게 보면 혜진의 말처럼 동네 중식당보다 호텔 세프가 더 좋아 보인다. 하지만 현준이 원하는 삶은 수석 세프가 아니었다. 그러니 현준의 입장에서 보면 혜진의 말은 틀린 셈이다. 결국 두 사람은 이별을 한다. 현준은 자신의 행복이 혜진에게 불행이면 그건 슬픈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누구의 탓도 아닌 서로 다른 거라고 말한다. 그렇다. 우린 모두 다르다. 내가 보기에 좋아 보여도 그 삶을 살아가는 본인이 힘들고 불행하다면 그래서 그 일을 그만두고 싶다면, 내가 나의 가치와 기준으로 ‘안된다’ 쉬이 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재능 있는 어린 제자가 펜싱 말고 제빵을 배워보고 싶다며 결국 8강까지 가서 기권을 하고, 선수 생활을 그만둔다 했을 때 양찬미 코치는 그런 마음으로 예지를 이해하며, 새로운 시작에 작은 조언을 해줄 뿐 더 이상 잡지 않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어설픈 참견이 아닌 그 사람의 선택의 이해하려는 자세와 적극적인 응원일 테니까.


드라마 <스물다섯스물하나(tvN, 2022)>에는 긴 시간 노력해온 일을 그만두는 또 하나의 인물이 나온다. 전교 일등이었던 승완은 수능을 한 달 정도 앞둔 시기에 학교를 자퇴한다. 그래야겠다고 말하는 딸에게 승완의 엄마(소희정 분)는 딸에게 묻는다. “지금까지 달려온 일 년을 버리겠다는 거네. 네 인생에서 일 년을 버릴 만큼 이 문제가 너한테 중요한 문제니?” 승완은 교내 체벌이 금지되었음에도 학생들을 폭력으로 체벌하는 교사의 행동이 잘못되었다고 말했고 그 일을 계기로 소위 말해 학교에 찍힌다. 조회시간에 온 학생들 앞에서  반성문을 써서 읽어야 하고, 폭력을 행사한 교사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 일들을 승완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승완이 맞은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승완은 남의 일이라고 모른 척하고 나만 아니면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그릇된 일에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공부 잘하는 딸이 수능을 코 앞에 두고 학교를 자퇴한다니, 엄마에게 있어 하늘이 무너질 일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자신보다 딸이 갖고 있는 가치와 신념을 존중한다. 왜 그러냐고 타박하며 딸의 행동이 마치 잘못된 행동이라고 단정 짓기 전에,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먼저 묻는다. 그렇게 알게 된 딸의 속사정은 엄마의 생각보다 훨씬 대견했다. 온전히 이해함으로 딸의 자퇴를 지지한 엄마 덕에 승완은 자신이 품은 신념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확인과 함께, 이후 승완의 인생까지 지켜지게 되었다. 물론 엄마도 양찬미 코치처럼 작은 조언을 했다. “휘어지는 법도 알아야 해. 부러지는 법만으로는 세상 못 살아.” 승완은 엄마 품에 안겨 울며 말한다. “알아 근데 그게 아직 잘 안돼”.

승완과 예지가 마지막으로 학교를 나서는 순간도 쉽지 않았다. 평소와 다르게 굳게 잠겨 있는 교문을 두 사람은 서로를 밀어주고 끌어당겨주면서 교문을 넘어 나왔다. 사실 교문을 잠근 건 희도와 유림이 짓이었지만, 여러모로 쉬운 엔딩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두 사람에게 ‘휘어지는 법을 모르고 부러져봤다’고 말하는 내레이션만 있었다면 앞서 잘 쌓인 메시지가 무너졌을 텐데, 교문을 걸어 잠그고서 희도와 유림이 준비한 건 두 사람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해주는 일이었다. 케이크에 초를 꼽고 두 사람을 향해 화사하게 “너의 새로운 시작을 축하해”라고 말하는 장면은 희도가 그만두고 싶다며 우는 예지에게 “힘들었겠다, 몰라줘서 미안해”라고 말한 장면과 함께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글의 맨 앞에 있는 문장은 이 장면 속 대사다.

승완과 예지가 휘어지는 법을 모르고 부러진 이번 일들을 통해 나는 이들이 그만둬도 괜찮고, 때론 멈췄다가도 괜찮다는 것을 배웠단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번 결정으로 남들보다 1-2년 늦어질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살아가야 할 인생의 방향을 스스로 점검하고 기틀을 세웠기에 결정적인 순간에 역전도 가능할지 모른다. 늦었다고 볼 수 없다. 타인의 선택을 이해하려는 자세와 그로 인한 존중 그리고 자신이 내린 선택에 책임을 지는 법도 함께 배운 시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런 경험은 보호와 안내를 받을 수 있는 어린 시기에 많이 이뤄질수록 좋다. 나는 몇 번의 그만두는 과정을 통해 약 십 년간 익힌 경험과 깨달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생각해볼 수 있는 드라마에서 많이 이야기되고 있는 게 참 고마웠다. 이런 장면을 보다 아빠에게 그 때 걱정보다 이해가 먼저 였다면 좋았을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빠는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보다 쉽게 이해하셨고, 여전히 잔소리가 많지만 그래도 예전같이 권면만을 하지 않는다. 이해를, 노력을, 믿음을 보여주셨다.


사실의 나의 그만둠은 한 분야에서 어떤 정점에 오른, 화려한 경력이 있는 현준이나 예지, 승완보다 주희(김지현 분)의 상황과 닮았다. 주희는 태환이 그토록 듣고 싶었던 그만두는 선택을 유일하게 칭찬한 사람이었다. 오며 가며 식당의 단골손님이 된 주희는 우연한 기회에 현준과 대화를 하며 그가 행복해지고 싶어 호텔 세프를 그만두었단 이야기를 들었고 “멋있다” 짧은 감탄을 내뱉는다. 주희는 19살, 대학 진학 대신 대장암에 걸린 엄마를 병간호했다. 그리고 남들보다 빨리 사회에 나와 일을 시작했고 백화점 화장품 매장의 매니저로 10년을 넘게 성실히 일하는 중이었다. 현준이 왜 중식당을 열었는지 알게 된 얼마 이후 주희는 백화점을 그만둔다. 그날도 무례한 손님의 도를 넘는 행동이 있었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었기에 유연히 대처할 수 있었지만,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현준과 대화를 했던 날 이런 손님들의 행동이 이젠 너무 상처가 된다는 말에 현준은 나이가 들어서가 아니라, 아무리 어려도 상처라고 말한다. 소개가 늦었지만 현준과 주희는 드라마 <서른아홉(jtbc, 2022)>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서른아홉의 미조(손예진 분), 찬영(전미도 분), 주희 세 사람의 우정을 다룬 이 드라마에서 주희는 순수한 소녀 같은 인물이다. 마흔을 코 앞에 둔 나이 때문에 상처받는 일마저도 눈치를 보게 되고, 선택은 시작이던 끝이던 그게 무엇이든 더욱 어려워졌다. 그런 그녀가 갑자기 백화점을 그만두었다는 말에 찬영과 미조는 충동적인 선택은 아닌가, 신중한 성격의 주희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걱정한다. 한 직장에서 10년을 넘게 일한 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웬만한 일엔 도가 튼다. 그렇기에 이렇게 급진적인 전개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는 건 그동안 주희 안에 오랜 고민이 있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주희 엄마(남기애 분)는 주희에게 그동안 고생했다며 대학도 포기하고 생업의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오래 수고한 딸에게 이제라도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며 그동안 결혼자금으로 모아 왔던 돈을 준다. 딸의 선택을 믿는다. 태환은 주희의 실직상태를 되려 반기며 자신의 중식당 아르바이트로 채용한다.

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추고, 남들의 인정을 받지 않는 그런 시간이 아니었다고 해도 오래 공을 들인 일을 그만두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고민과 고민의 연속이고 그런 고민의 시간은 괴롭기까지 하다. 내가 그만두는 상황과 상당히 비슷한 주희여서 그런지 몰라도, 그녀가 그만두고 마주한 막막한 미래 속에서 여러 응원을 받고 아무렇지 않게 일상으로 이끄는 태환의 모습들을 보는 게 좋았다. 그런 응원을 통해 주희는 해보고 싶었던 일, 오랜 시간 마음속에 두었던 자그마한 꿈을 살펴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자주, 그만두는 선택을 하게되는 과정을 겪을 것이다. 무언가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그 마음과 씨름하다 결국 그만두겠다는 선택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고단할지 상상만으로도 숨이 가쁘다. 치열한 고민 끝에 어렵게 내린 선택임을 알기에 나는 당신의 그만둔 그 선택을 응원한다. 주희처럼 그만두어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도 있다. 그러니 그만두어도 괜찮다. 시작은 다른 방향에서 보며 끝이기도 하고, 끝은 시작이 되기도 하니 그러고보면 그만둠은 포기도, 실패도 아니다. END가 아닌 AND로 이어져 계속되는 인생이 될 수 있도록, 우린 서로의 그만둠을 이해하며, 더 많이 응원했으면 좋겠다.


(사실, 이 글은 내가 가장 받고 싶은 응원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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