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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Oct 05. 2021

'운명'을 움직이는 이야기

<홍천기> (2021, SBS)

“ 하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것입니까?”

“ 적어도 내가 사는 세상에선, 그렇소.”


하람(안효섭 분)은 천문, 지리, 풍수를 담당하는 왕실의 서문관 주부다. 하늘에 수 놓인 별을 보며 앞 일을 헤아려야 하는 일이지만 하람은 앞을 보지 못 한다. 어릴 적 나라에 깃든 오랜 가뭄을 해갈하기 위한 기우제에 참여했다 그는 시력을 잃게 된다. 당시 기우제를 관장한 국무당의 무수(채국희 분)가 물의 기운을 타고 난 하람을 제물로 받치는 인신 공양으로 기우제를 준비했고, 하람이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었다. 그 시각 왕의 초상화를 보관하는 경원 전을 찾은 주향 대군(곽시양 분)과 양명대군(공명 분)에 의해서 선대 어용에 봉인된 마왕이 풀려난다. 마왕의 봉인을 푼 건 주향 대군의 탐욕이었지만, 마왕은 자신의 몸을 숨길 대상으로 하람을 택하면서 하람은 목숨을 부지하게 되지만 시력을 잃는다. 하람의 몸에 들어가면서 잃은 마왕의 시력은 같은 시각 물에 빠진, 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 했던 천기(김유정 분)에게 들어갔고 그날 이후 천기는 앞을 보게 된다.

 

왜 하필 천기였을까?

하람과 천기의 인연은 두 사람의 아버지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상왕 영종은 마왕의 힘을 빌어 천하를 얻지만, 마왕의 힘은 갈수록 통제되지 않고 그 힘을 자신의 초상화에 봉인하기로 한다. 이 의식을 주도한 3대 명인 중에 한 사람이었던 하상진(한상진 분)이 하람의 아버지였고, 왕의 초상화를 그린 신령한 화공이 천기의 아버지 홍은호(최광일 분)였다. 하지만 마왕이 봉인된 뒤 하상진은 국무당의 배신으로 목숨을 건 도망을 가고, 홍은호는 마왕과 눈이 마주치면서 광인이 되고 만다. 그렇게 9년 만에 왕이 주관하는 기우제에 참석하기 위해 궁으로 향하던 중 하상진과 홍은호가 재회하게 되면서 하람과 천기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알게 된다. 마왕의 봉인이 있던 날 하람과 천기가 태어났다는 사실을.


마왕이라는 소재가 유치하다는 건 인정한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마왕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도록 드라마 <홍천기>는 시간을 빠르게 달린다. 보통 이런 류의 사극은 초반 1-2회에 아역 배우를 등장시켜 성인이 되어 만날 주인공들의 서사를 미리 다져놓는데 , <홍천기>는 2회 만에 성인 배우가 등장하며, 아역 배우들이 나오는 1회에서고 두 차례나 시간을 뛰어넘는다. 그러면서도 음모와 배신, 주인공 간에 필요한 서사를 부족함 없이 알맞게 잘 남겨 놓았다. 드라마 <홍천기>는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해를 품는 달>의 원작을 쓴 정은궐 저자의 신작 《홍천기》를 원작으로 한다. 극본을 담당한 작가가 따로 있겠지만, 여러 번 소설을 드라마로 만든 경험으로 스토리 진행 상 필요한 서사가 무엇인지 정확히 간파한 노련함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인이 되어서도 이야기는 거침없이 흘러간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서로를 금방 알아보고 마음을 전한다. 다만 복수를 준비 중인 하람이 그녀를 밀어낼 수밖에 없는 상황과 다정다감한 서브남 양명대군의 등장으로 시청자들의 설렘 세포를 깨운다. 불필요한 어긋남, 안타까움 같은 걸 구태어 길게 가져가지 않았다는 점도 요즘 시청자들이 원하는 포인트를 지혜롭게 반영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안다.

하람과 천기는 인연이고 두 사람이 마왕을 함께 봉인하고 마침내 행복하게 살 운명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하람과 천기는 어떤 결말을 맺을지 모른다. 그건 그들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점은 우리도 마찬가지다. 많이 양보해서 인간의 운명이 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고 해도, 그 운명을 살아가는 지금의 나는 이것이 운명인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다. 그저 주어진 오늘을 살뿐이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이렇게 될 일었구나’ 운명을 깨닫게 되는 날이 온다 해도, 당장은 알 수 없으니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두 사람도 최선을 다한다.


이들이 정해진 운명을 어떻게 대하는지 북두칠성을 보며 이야기하던 대화를 통해 알 수 있다.

"그럼 사람들이 애쓰며 사는 것이 의미 없지 않습니까" 하람의 세계에 천기가 물었고, "주어진 운명을 바꾼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죠"라고 하람은 답한다. 어쩌면 하람과 천기에게 주어진 운명은 부모를 잃고 눈이  인생으로, 광증에 걸린 아비와 거리에서 구걸하며 사는 인생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하람은 왕의 임명으로 왕실 서무관에 입성하지만 보이지 않음에도 능통하여 주부(정6품 관직)가 되고, 천기는  화공으로서 왕실 고화원(그림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궁중 관서) 화공이 된다. 운명은 숙명과  뜻이 닮아 보이지만 '운명'에는 옮기고 움직이는 뜻을 담은 한자 () 사용된다. 이미 주어진 운명을 한번 이겨낸  사람에게 운명은 정해진 숙명이 아닌 셈이다. '주어진 운명을 바꾼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 하람의 대답에는 쉽지 않을 , 바뀔  있다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다. 그리고 운명은 이미 변했다. 보지 못 하게 태어난 천기가 앞을 보게 되었고, 가우재 때 죽을 운명이었던 하람은 살았다. 운명의 변화를 여러번 마주한 이들은 자신에게  운명에  순간 성실하게 애를 쓸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사극에서 운명에 맞서는 이야기를 자주 만나는 듯하다.

아마도 신분과 성별의 장벽이 지금보다  심했던 당시에는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선 아니,   있는 것을 하는 것조차  순간 운명이라 불리는 벽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로 '운명' 초인적인 힘에 의하여 이미 정해진 목숨이나 처지를 말하는 것일까? 오히려 주인공들 앞에 놓인 가혹한 운명은 인간이 만든 굴레일 때가 많다(오히려 신인 삼신과 호랑이 신은 천기와 하람을 지킨다). 그리고  장벽은 지난 시대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내가 사는 2021년에도 운명이라 불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장벽이 있다.  다른 신분이, 차별이 생겼고 세상은  앞에 순응하라고, 그게 네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한다. 그러니 운명에 맞서는 이야기는 비단 과거지향적 주제가 아니다. 오늘도,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다. 설사 마지막 날에 '이렇게  일이었구나' 하게 된다고 해도, 지금 내가 사는 삶이 신의 영역이라 할지라도 내게로  운명이라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서  빚음에 함께 해야 하는  아닐까? 비슷한 포맷의 퓨전 사극이 회를 돌아 찾아옴에도 계속해서 사랑받는 데는 이런 이유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10회 정도 방송된 드라마를 놓고 너무 긴 글은 쓴 건 아닌가 싶다. 혹자는 드라마를 보는 시각이 너무 과한 건 아닌가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익숙할 수 있는 패턴의 이야기지만 조금만 다른 시각으로 본다면 또 다른 이야기가 말을 걸 준비를 하고 있고, 이런 식으로 드라마를 만나는 건 내가 드라마를 즐기는 방법이다. 그렇기에 이번 드라마는 '운명'이라는 시선에서 봐 보는 건 어떨지 조심스럽게 권해본다.


운명을 빚는 하람과 천기의 이야기는 오직! 웨이브에서만 시청 가능 :)    



드라마 <홍천기>는 16부작(예정)으로

제작사 스튜디오S(SBS), 스튜디오 태유 방송사 SBS

연출 장태유 작가 하은 원작 《홍천기》저자 정은궐

안효섭, 김유정, 공명, 곽시양, 문숙, 조성하, 김광규, 장현성 등 출연


본 원고는 wavve 리뷰단 활동이 일환으로 '웨이브(wavve)'로부터 소정의 원고를 받고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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