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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Nov 24. 2021

'무엇'이 되는 것보다

<인간실격> jtbc, 2021

    어릴 적부터 나는 '무엇'이 되는 상상을 자주 했다. 그때 '무엇'은 상당히 구체적이었고 대부분 직업적 모습을 가졌다. 선생님이라던가, 가수라던가. 금세 다른 '무엇'이 생기면서 내가 그리는 미래의 나는 자주 변경되긴 했지만, 그 나이 땐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는 희망적 자신감이 충만했기에 '무엇'이 된 나를 그리는 일은 즐겁기만 했다. 지금도 여전히 '무엇'이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바라던 '무엇' 중 된 게 하나도 없다. 이제는 '무엇'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실현해야 한다는 부담과 이뤄내고자 하는 치열함, 그 크기만큼 커지는 실망이 희망을 대신하고 있다. '무엇'이 되는 상상은 이제 습관 같다. 이 마음만 없어도 삶은 조금 편해질 것 같은데 놓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부정이 "환상이 없는 현실은 삶이라기보다 죽음에 더 가까워요"라고 말했을 때, '무엇'을 향한 갈망은 여전히 내게 희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 <인간실격>은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길을 잃은 여자와 결국 아무것도 못 될 것 같은 자기 자신이 두려워진 남자의 이야기다. 드라마 소개만 보면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난해하다. 하지만 부정과 강재가 말하는 '아무것도'가 무엇인지 알게 되자 먼, 추상적인, 다른 누군가의 이야기로 남지 않았다. 부정이 그린 마흔 즘의 모습은 마당이 있거나 서재가 있는 집에서 아이는 하나 아니면 둘을 키우며, 자신의 이름으로 된 책이 서점에서 사람들을 기다리는 삶이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보니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사실 그녀는 보여주고 싶었다.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니 아이가 없거나, 자신의 이름으로 책을 출간하지 못하게 된 건 사실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물론 아이를 잃은 건 슬픈 일이다. 하지만 바라던 그 모습이 아니었어도 무언가 되었다면, 될 수 있다면 지금처럼 깊은 상실을 느끼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는 건 자신은 아무 쓸모없는 사람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그녀가 아버지에게 아무것도 되지 못해 죄송하다며 자신을 실패자라고 말한 건 삶에 가졌던 희망을 잃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는 부정과 아무것도 되지 못할까 두려운 강재가 느끼는 감정은 다른 듯 보이지만 결국 같은 결이었다. 강재는 '남'이 되고 싶었다. 정확히는 '남들처럼' 되고 싶었다.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밥을 먹고, 비슷한 대화를 하고, 비슷한 곳을 바라보며 그렇게 그냥 원래부터 비슷한 사람인 척, 괜찮은 생각을 하는 그런 사람. 같이 있을 때 특별한 시선을 받거나, 무리에서 그은 선의 경계를 느끼지 않아도 되는 평범하다고 불러지는 남들과 같은 삶을 살게 되길 바랬다. 하지만 남들처럼은 물론 아무것도, 그 어떤 것도 되지 못할 것 같다. 이 세상에 그 어떤 의미도 되지 못 한 자신을 향한 실망과 두려움은 무엇이 되기 위해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부정이 느끼는 막막함과 결코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런 두려움과 막막함을 나 역시 잘 알고 있다. 드라마 <인간실격> 등장인물 소개를 보면 '성' 없이 이름만 적혀 있는 걸 확인할 수 있다. 한 사람의 뿌리를 알 수 있는 '성'이 없다는 건, 특정한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닌 모든 이의 이야기라는 메시지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이들이 말하는 '아무것도'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고, 이들이 찾는 '무엇'을 함께 찾았다.


    아무것도 되지 못해 슬퍼하는 부정에게 아버지 창숙는 '너는 내 자랑이야'라고 말한다. 그 말이 또 한 번 부정을 슬프게 했다. "너는 나보다 나아야지"라는 말도 부정을 슬프게 만들었다.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는 건 다른 누구보다 부모에게 죄송한 마음이다. 하지만 창숙를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부정이 무엇이 되길 바란 적이 없다. 창숙에게 부정이 무엇이 되고, 되지 않음은 결코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것 이전에 부정은 이미 그의 자랑이었다. 태어난 그 순간, 그것만으로도 부모에겐 큰 의미가 된다. 그러니 무엇이 되려 하기보다 무엇을 할지 고민하길 바랬다. 창숙이 자신의 생애 동안 부정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처럼.


       그리고 강재가 말했다. 세상은 계속해서 그녀에게 화가 났다고 말했고 당신은 위험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당신은 화가 난 게 아니라 슬픈 거라고, 슬퍼 보인다고 말했다. '세상 사람들 모두 다'라고 생각하겠지만, 자신은 그리고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을 그렇게 보지 않는다고 알려주었다. 부정은 아버지를 오해한 적이 없지만, 그 때 하셨던 말이 무슨 의미인지 그제서야 깨닫지 않았을까? 부정은 자신을 온전히 바라봐주는 사람으로 인해 잃었던 존재를 찾는다. 강재 역시, 부정을 보며 처음으로 누군가 자신을 사랑해 무엇을 해주는 것이 아닌, 자신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는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 같아 두려워했지만, 부정을 위해 아무것도 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 그녀에게 아무것도 되지 않음이 그녀를 위한 일이며, 무엇이 되는 것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이 그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사랑임을 깨닫는다. 아무것도 되지 않기로 하자 그때야 비로소 강재는 그토록 바랬던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내내 어둡던 드라마는 마지막 장면에 가서 점점 환해진다. 물론 주관적인 느낌이다. 부정은 그녀를 괴롭게 했던 아란박지영의 소식에 더 이상 화가 나지 않았다. 이 세상에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며 사랑해주는 아버지가 없지만 그 사실이 또 다른 상실이 되지 않고, 사랑받던 존재란 기억으로 그녀의 삶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며 그녀에게 찾아온 번역 일은 수락한다.  ‘무엇’이 되는 것보다 무엇을 해야할지 찾은 희망에서 나는 드라마의 온도가 바뀌었다고 느낀 것 같다. 


      나는 꽤 오랫동안 무엇이 되려 했지만 혼자서는 무엇도 될 수 없었기에 희망이 좌절로 변했던 것 같다. 대게 많은 경우 우린 서로의 의미로 존재하며, 도무지 나로서 버티기 힘든 순간을 건강하게 지나가는 방법이 됨을 <인간실격>을 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이는 내게 뿐 아니라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일로 소중했다. 부정은 부정이어서 충분했듯, 나도 나여서 이미 충분하다. 때론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도 의미가 될 수 있다. 그러니 창숙의 말처럼 중요한건 무엇이 되려하기 보다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하는 일임을 그럴 때 바라지 않아도 무엇이 되는 일련의 과정을 생각해봤다. 결국 이들이 말하던 '아무것도'라는 것이, 찾던 '무엇'은 '존재의 의미'가 아니었을까.


   긴 리뷰를 섰지만 이 글을 읽기보다 드라마 속 대사와 독백을 한번 더 읽어보길 조심스레 권한다. 이들의 고백과도 같은 문장을 따라 읽는 것만으로도 불안하고 막막한 마음에 위로가 스민다. 그러다 정주행을 하기로 한다면 이어폰을 꼽고 보길. 담담한 목소리로 천천히 전하는 배우들의 독백은 오디오북으로 나와도 좋겠다는 반응이 있을 정도니 읽는 것을 넘어 직접 대사를 들어보길 바라는 마음도 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연말에 이들의 이야기에 천천히 녹아들어 지금 되고픈 자신의 '무엇'이나 '아무것'을 향한 진짜의 마음을 확인해보고,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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