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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직장 생활 동안 가장 힘들었던 직장을 꼽으라면 서른 살에 일했던 회사다. 말도 안 되는 근무환경과 대우 속에도 일 년 반을 버티고서 이직을 했다. 그때랑 비교하면 스물여덟에 일했던 회사는 천국과 같은 회사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근무하는 일 년간 시름시름 앓다 결국 사표를 냈다. 뭐가 문제인지, 무슨 일이 이렇게 만든 건지 설명할 수 없었다. 힘들게 설명하면 내가 나약한 거라는 결론뿐이었다. 맞다, 이런 류의 설명은 언제나 힘을 들여 야했다. 물어서 대답했으나 이해받지 못 함에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고, 비어내지 못 한 무거운 마음이 쌓이고 쌓여 시름시름 앓았던 시절이다.
"누군가한테는 말하기 쉬운 게 어떤 사람한테는 어려울 수도 있잖아요." #갯마을차차차
따지고 보면 '고작'인 일이다. 완벽한 이해를 바라면 모든 게 '고작'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고작'의 일이 삶을 좀 먹었다. 드러나지 않게 조금씩 조금씩 자꾸 해를 입힌다. 자신이 무너져가고 있는 줄도 모른 채 무너지더라. 삶을 무너져 내리게 하는 게 어떻게 '고작'일 수 있을까. 내게 쉬운 일이라고 다른 사람에게도 쉬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이기적인지 생각해본다.
이 내레이션은 부정이 아버지께 남긴 버릇없는 유언장이다. 자식이 아버지에게 남긴 유언장이라니... 다행히도 이 편지는 아버지에게 닿지 않았다. 그러니까 부정이 죽지 않았다는 다행이다. <인간실격>을 보면서 마지막에 이들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을까, 그 길로 가는 이야기면 어쩌나 하는 불안이 들었다. 아직 보지 않았으나 기사를 통해 확인받은 마지막에 여전히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이 있어 다시 한번 다행이다.
하지만 이미 부정이 스스로 생을 끝내기 위해 시간을 가졌다는 사실만으로 완벽한 다행히 될 수 없다. 내내 마지막 회가 염려되었던 건, 부정의 마음에 핀 생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완전히 끝났다고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완벽한 이해는 나도 자신 없다. 다만 대단한 이유가 아닐지라도, 고작인 일일지라도 누군가 털어놓은 마음의 무게를 그저 고스란히, 그대로 받아들이는 온전함을 추구하고 싶어졌다. 부정도 그런 온전함으로 자신을 찾아, 무엇이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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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보기에는 먼지만 한 가시 같아도.. 그게 내 상처일 때에는 우주보다도 더 아픈 거예요."
아주 오래전에 본 영화다. 등장인물이 이나영, 강동원 배우였다는 건 포스터 때문에 기억하고 있을 뿐 내용도 가물가물한 영화에서 오직 저 대사만이 또렷이 기억난다. 앞서 부정은 아버지께 남긴 유서에서 자신이 죽으려고 하는 이유가 남들에겐 '고작'인 비웃음을 살 일일지 모를 그런 작고 흔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 대사에 나는 누군가의 완벽한 이해를 바라면 모든 게 '고작'일 뿐이라고 적었다.
부정은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모르고, 강재는 잃어버릴 것이 없어서 마음이 허하다. 부정과 강재는 원래부터 알고 있는 사이도 아니고, 많은 이야기를 나눠서 상대에 대해 알게 된 사이도 아니다. 하지만 스치는 순간에 본 눈빛에서, 왁-하고 다문 입 모양에서 그도 무언가 잃었구나 서로를 알아차렸다. 강재는 미안하다고 말한다. 이 말이 지금 이 상황에, 그것도 내가 하는 게 옳은지 모르지만 사과한다. 당신 앞에서 내가 더 힘들었다고 말해서, 그런 의미로 건넨 사과가 아니다. 내일이 오지 않을 것 같은 고단한 하루를 보내다 보니 이런 아픔 속에 있던 부정이 생각났을 뿐이다. 텅 비어버린 서로를 알아차린 두 사람은 자신이 가진 상실이 더 크다고 말하는 대신 모른 척 같이 걷는 것으로 상실감을 함께 나눈다. 그래서 미안한 거다. 괜히, 미안한 거다.
차라리 미안하게 낫다. 당신을 위한 일이라고 해도 무언가를 주고 텅 비어버린 당신에게서 고마움을 받느니, 차라리 나는 미안하다 말하는 쪽이 되고 싶다. 텅 비어버린 당신에게 고마움조차 ‘받고’ 싶지 않다. 미안한 마음이라도 ‘주고’ 싶다. 오늘 나의 하루가 죽을 만큼 긴 하루였다 해서, 내일이 오지 않을 것 같은 하루를 보낸 당신의 오늘을 ‘고작’이라 하고 싶지 않기에 … 이런 말이 옳은지 모르겠지만,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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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 대본집에 보면 극이 시작되기 전 인물에 대한 소개가 담긴다. 콤마와 콤마로 이루어진 문장에 마침표는 어쩌다 한번 나온다. 한 인물에 대한 설명은 긴 한 문장 속에서 여러 번 충돌한다. 그렇게 복잡 미묘한 게 인간이다.
'마음 한 곳에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소중히 남아 있는,
가파른 오르막길 앞에서 방향을 잃어가는, 얼마 전까지 소년이었던 남자.'
강재에 대한 설명 중 마지막 단락이다. '보통의 부자'가 되길 바랬지만 그런 강재 마음속에는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결국 이 세상에서 나를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나한테 돈을 제일 많이 쓰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그런 나쁜 생각"을 했었다던 강재가 처음으로 돈도 아닌, 이기고 지는 것도 아닌, 작고 이상한 마음을 따라 처음 만나는 세상 안으로 들어갔다.
마음을 따라 반대편으로 열심히 걸어가는 강재를 상상해봤다. 즐거웠을까? 소풍 가 듯한 발걸음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보단 조심스러운, 찬찬히 내딛는 더딘 발걸음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닿고 싶었는데 어디쯤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버렸다. 한걸음도 가까워지지 못했다. 그렇다고 한 걸음도 멀어지지 못했다.
힘은 힘대로 썼는데 제자리를 맴돈다는 것만큼 지치는 기분을 들게 하는 것도 없다. 그래서 마음을 먹고 다른 세상 속으로 걸어간 그를 다시 제자리로 불러들인 '아키라' 실장이 야속하다. 물론 실장의 부름을 뿌리치지 않은 건 강재다. 싫어도 익숙한 곳으로 우린 지나치게 쉽게 돌아오게 되는 관성 같은 게 있다. 그러니 마음 가는 대로 가본다는 건 집 앞에 있는 편의점을 가는 정도의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어딘지 모르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세계를 찾아 떠나는 모험에 가까울 수도.
그래도 그가 태어나 처음으로 마음을 따라갔다. 낯선 길을 걸어봤다. 그 길을 걷는 동안 불안했겠지만 처음 보는 풍경에 새로운 기분도 들고 좋았을 것 같다. 점점 그 길을 따라 걷는 게 즐거웠을 수도 있겠다. 비록 지금은 다시 제자리를 걷는 기분이겠지만, 한 자리에 서서 계속 발을 구르면 내가 서 있는 땅이 단단히 다져진다. 그리고 계속 구르는 두 다리는 언제든 어느 곳으로 갈 수 있는 추진력을 얻을 상태다. 더 좋은 것을 맛 보아 알았으니, 나는 강재가 마침내 단단한 땅을 딛고 이상한 마음을 따라 다시 한번 어딘가를 향해 떠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우리도 지금 엉망인 것 같으나 그런 추진력을 얻는 시간일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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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오래도록 헤맨 부정이 좁은 텐트에 몸을 누웠을 때, 구부정한 몸이었지만 어느 곳에 있는 것보다 편안해 보였다. 아무것도 달라진 건 없지만 가장 창피한 순간을 이젠 말할 수 있게 됐다. 그동안은 들어주는 이가 없었고, 들어줄 것 같은 사람이 생겼어도 말할 수 없었다. 평생, 그런 마음의 상태로 살 것 같지만. 그런 순간은 마치 끝나지 않는 나선형의 미로에 갇힌 것 같은데 그렇게 헤매다 덜컥 미로 끝에 도착했음을 느낀다. 그야말로 ‘순간’ 일뿐이다. 정확히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됐는지, 어쩌다 출구를 발견한 건지 설명할 수 없지만 “그냥 그렇게 되었어” 또는 “그냥 그랬었어”가 되는 그런 순간을 우리도 몇 번은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부정이 드디어 자신 속에 있는 마음을 꺼냈다. 꾹 담은 입술을 열었다는 건 그 마음을 열었다는 것과 같다. 부정은 분주하게 헤매는 발걸음을 멈추고 그 순간을 맞이할 기다림을 시작한다.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말할 수 없지만 사실 알 것도 같다. 정확히 무어라 말할 수 없지만. 코멘트를 썼다 지웠다 하게 하는 드라마다. 사실 이 코멘트보다 부정의 독백 같은 고백을 몇 번 더 읽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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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것도, 싫은 것도, 쉬운 것도, 어려운 것도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는 그냥 다 비슷해요."
감정에 무감해졌다던 지난 부정의 말을 기억한다. 시작은 상실이었다. 착실하게 살아온 하루, 하루를 단 한 순간에 빼앗겼다. 누구의 잘못인지 따지거나 피해를 보상받거나 하는 일보다 그녀는 사과가 먼저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사과하지 않았고 위로하지 않았다. 그 순간 그녀가 잃게 된 건 직장, 꿈, 아이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이었다.
매일 화가 나있어.
같이 있으면 너도 어떻게 될지 몰라.
안타까운데 어쩔 수 없잖아.
왜 이렇게 예민해.
이런 말들이 그녀 주변을 채웠다. 자신을 잃은 부정은, 희미해진 그녀는 그러니 주변에서 하는 말이 사실이다, 전부다, 그게 나라고 받아들였다. 익숙한 것을 선택하거나 남들이 그렇다는 걸 인정해버렸다. 화가 났던 거였든, 그게 쌓여 분노가 되기도 하고 이렇듯 슬픔이 될 수 있는데, 감정의 성질이 사람을 닮아 무한하고 유기적이라는 걸 잊고 학습된 하나에 담으려 했다. 주변 사람들 시선에 나를 맞추고, 그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무엇이 되려 하는 것처럼 감정에게 마저도 그랬던 건 아닌지.
사실 그녀는 잘 아는, 그녀의 역사가 아닌 부정이라는 이름의 뜻을 알고 정 많은 부자로 정말 살길 바라는 다정한 시선도 있는데, 익숙한 듯 맞추는 건 언제나 왜 냉랭한 시선들에게 인지. ‘모두 다’라는 가정은 대부분 틀린 답이다. 부정이 어렵게 꺼낸 이야기에 귀 기울어준 한 사람으로 인해, 부정은 곁에 내내 맴돌았던 다정한 시선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봐준다. 어쩌면 슬픈 거일 수 있다. 수고한 마음이 짓는 여러 표정을 그녀처럼 기다려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해주는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
일전에 코멘트를 쓸 때도 그런 생각을 했지만, 강재가 역할 대행을 하는 이유에 무엇이 된다는 만족도 있었던 것 같다. 누군가의 친구가 되기도 하고, 연인이 가족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최선을 다할수록 허무한 일이다. 모두가 현실로 돌아가지만 강재만 그곳에 남겨져 있다는 게, 텅 빈 무대 위에 혼자 있는 배우의 모습이 연상됐다. 어디를 가도 머무를 내 자리가 없는, 불안함은 불완전한 상태로 강재의 발 밑을 서늘하게 했을 테다. 그래도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는 건, 외로우니까.
이제 와서 출근하고 등교하는 인생에 낄 수 없다는 강재 말이 나는 비겁하게 들리지 않았다. 사실 역할을 대행하고 있을 때에도 그를 무시하는 시선이 따라다닌다. 어쩌면 그 시선엔 내가 저 사람보다 낫다는 우월감도 들어있을 테다. 그런 필드에 꼭 들어가서 경쟁해야 하는 걸까. 지는 싸움은 누구도 하고 싶지 않다. 물론 질걸 알고서도 해야 하는 싸움이 있지만 그보다 나는 그에게 더 많은 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다.
아직은 친구니까,라고 말했을 때 부정은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을 말했고, 친구 할 수 있냐고 물으며, 강재는 자신이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말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친구로 볼 수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지만, 인생에 손님이 아닌 친구가 생기자 두 사람에 비어버린 삶 가운데 그토록 찾던 무언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꼭 누군가의 무엇이 되어야 존재의 의미가 생기는 건 아니고, 그것만을 추구해서도 안되지만 강재에겐 그런 의미가 생기면 좋겠다. 그래서 조금 더 많은 친구가, 딱이와 민정처럼 강재를 생각해주고 부정처럼 그의 이야기에 들어주는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애쓰는 노력이 허무해지지 않게, 이번만큼은 무엇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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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에서 댓글이나 DM을 보낼 때 @ 골뱅이를 붙여 그 사람의 아이디를 입력한다. 그 행동이 나는 아직도 어딘가 불편하다. 그 공간에서 영어와 숫자로 조합된 짤막한 ID가 그 사람의 이름이겠지만, 그 뜻을 알 수 없고 발음할 수 없는 단어의 조합은 사람을 대하는 듯 한 기분을 주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어쩌다 이름을 알게 되면 가능한 이름으로 부르려고 한다. 달력 이벤트나 오월 어버이날 용돈 봉투 이벤트를 할 때도 신청인의 이름이나 부모님의 이름을 적는 수고를 기울이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름을 부를 때 그 사람의 의미가 생긴다. 김춘수 시인의 <꽃>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다. 물론 내 이름을 말하는 것과 이름으로 불려지는 걸 몹시도 어색해한다는 건 조금 우습지만. 누구 씨.라고 부를 때 그 사람은 내게 의미가 된다. 어쩌다 지나가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으로 내 시간에 존재하게 되는, 잊히지 않을 사람으로 조금 더 뚜렷이 남는다.
그래서 부정도 밤하늘 별을 보러 갔다 헤어지는 버스터미널에서 강재의 핸드폰 속에 이름으로 저장되길 원했다. 강재 주소록에 부정은 어떤 이름으로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마도 손님의 한 사람으로, 그렇게 그저 스쳐 지나갈 존재로 기재되어있었을 테다. 하지만 강재는 부정의 이름을 바꿔 저장하길 원했고 부정은 동명의 사람이 없다면 자신의 이름 '부정'으로 저장해달라고 한다. 부정은 이후 강재의 번호를 지웠다. 핸드폰 속에 저장된 이름을 바꾼다는 건, 지운다는 건 요즘 시대에 관계의 모습을 담고 있다. 강재에게 부정은 이제 그저 지나가는 인연이 아님을. 핸드폰 속에서 지웠다는 건 부정에게 강재가 큰 의미였음을 전해준다.
이부정,
부정이 원했던 이름으로 누군가의 삶에 남게 된 이 날은 오래 헤매며 지친 부정이 사실은 화가 난 게 아니라 슬픈 거였다는 자신의 감정을 깨달은 날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며 상실감으로 버텨오던 기 터널에서 나오게 된 날이기도 하다. 나는 이 날, 부정이 잃었던 자신을 다시 찾은 날로 다가옸다.
그래서 부정이 부정이 강재가 보낸 문자를 받고 미소를 띤 게 그때 본 밤하늘이 예뻐서, 강재와 함께 했던 시간이 떠올라서가 아닌, 그보다 “이부정” 으로 불린 자기 자신이 반가워서는 아니었을까, 부정의 마음을 헤아리며 나는 울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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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떠나고 나서 부정은 정말로 혼자가 되었다. 하지만 이 이별로 부정은 깨닫는다. 내내 아버지가 그녀에게 보여줌으로 말하고 있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무엇이 되고 싶었던 걸까.
마흔에는 서울이 아니어도 좋으니 마당이 있는 집을, 아이는 하나 정도 있으면 좋겠고, 베스트셀러 작가는 아니지만 내 이름으로 낸 책이 서점에서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는 그런 모습을 상상했다. 그런 내가 되길 소망했다. 그러나 희망의 문턱 앞에서 산산이 깨져버린다. 그리고 “환상이 없는 현실은 삶이라기보다 죽음에 더 가까워요.”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당신을 떠난 아버지를 보며 그녀는 분명 죽음이지만 또 다른 삶으로 자신의 곁에 머묾을 느꼈던 것 같다. 결국 사는 것은 죽는 일에 속하고, 죽음 또한 사는 일에 하나라고 고백하는 걸 보면. 그래서 그녀는 무엇이 되지 못해 슬퍼하기보다,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기 시작한다. 강재는 무엇이 될지 몰랐으나 아무것도 되지 않음으로 의미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처럼, 두 사람 모두 각자에게 찾아온 변화 앞에서 찾아야 할 ‘무엇’을 발견했다.
“우리의 오랜 떠돎은 결국 무용하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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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되고 싶고, 무엇이 되려 하는 내네의 시간이 우리가 살면서 끝없이 하게 되는 본능적인 일이 아닐까. 이 드라마를 보며 강재와 부정처럼 돈이, 직장이 나인 것 같은 착각을 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무엇이 되는 것보다 무엇을 하느냐가 먼저였다는 걸 알게 해 줬다. 그에 따라 무엇이 될 때, 의미가 생긴다고. 긴 인생길에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존재가 단 하나라도 있다면 우린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을 수 있음을.
이 드라마를 향한 시선엔 너무 추상적이라고 생각하거나 공감하기엔 가벼운 상실이라고 보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찾는 과정에 혼자가 아닌 더불어 함께하는 누군가의 존재를 담아냈다는 점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도 되지 못했고, 무엇이 되고 싶은지 몰라 헤매던 강재와 부정의 모습이 곧 내 모습으로 다가왔다.
드라마 <인간실격> 인물 소개를 보면 이름에 ‘성’이 없다. 부정, 강재, 장수, 경은, 딱이, 민정 그렇다.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 하지만, ‘성’이 없다는 게 내겐 특정한 누군가의 일이 아닌, 우리가 한 번쯤은 해봤을 생각이고, 내 이야기가 될 수 있는 감정일 수 있다는 것을 담은 게 아닐까 생각해봤다.
마침내 ‘무엇’에 대한 각자의 의미를 찾은 부정과 강재 덕분에 많은 문장을 곱씹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