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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Apr 06. 2022

어쩌다 발견한 '서브'

<어쩌다 발견한 하루> (MBC, 2019)

 “역시 양보 님. 서브에 진심이야.”
 
드라마를 매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인스타그램 계정(@by.ybo)에서 내가 인친(인스타그램 친구)들로부터 자주 받는 놀림이다. 나는 드라마를 볼 때면 주인공보다 통칭 ‘서브(sub)’라고 불리는 조연들이 가진 서사에 더 많이, 자주 매료되어 적극적으로 그들을 응원해 왔다. 모든 걸 다 갖춘 주인공들은 필연적으로 서로에게 이끌렸고, 그들에게 찾아온 어려운 시련은 행복한 엔딩을 위한 하나의 관문처럼 느껴지는 비슷비슷한 포맷이라면, 그들을 빛내주는 조연들의 이야기는 다양하다. 드라마 속 서브는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에 이야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지만 그렇기에 작가는 그들을 통해 조금 더 자유롭게,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나는 드라마나 소설을 보며 조연들의 이야기를 상상하곤 했다.  완벽한 주인공들과는 다르게 어딘가 부족한, 전부 채워지지 않은 조연들의 상황이 내 상황과 가까운 적이 많았던 이유도 있고, 주인공에게 편중된 시간 때문에 항상 부족한 서브들의 이야기는 알아서 떡밥을 찾고 해석하게 만들었다. 나는 그들이 궁금했다. 정확히는 그들이 가진 이야기가 궁금했다.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MBC, 2019)>는 나와 같은 상상을 하던 작가가 만든 작품이 아닐까 싶다.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 나와 같은 '서브'의 시선을 담고 있다.


은단오(김혜윤 분)는 잠깐, 잠깐 기억을 잃고 그러다 전혀 다른 장소에서 눈이 떠졌다. 우연히 학교 도서관에서 ‘비밀’이라는 만화책을 읽게 되면서 자신이 사는 세계가 그 만화책 속이며, 자신은 그 만화 속 등장인물이라는 걸 알게 된다. 기억을 잃거나 전혀 다른 장소에서 깼던 건 작가가 그려내지 않은 공간인 ‘쉐도우’에 있다가, 이야기 흐름에 필요한 순간 작가의 의도대로 ‘메인 스테이지’로 소환되면서 생긴, 자아를 가진 등장인물에게만 일어나는 이상 현상이었다.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 아닌 만화 속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단오는 충격을 받지만, 그보다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그 외 등장인물’ 중 하나로 주연인 ‘오남주(김영대 분)’와 ‘여주다(이나은 분)’ 그리고 비중이 큰 주연 ‘백경(이재욱 분)’을 위한 단역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는다. 재미있는 건 은단오 다음으로 인격이 생긴 만화 속 인물 이도화(정건주 분) 역시 자신이 만화 ‘비밀’의 등장인물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스스로 주인공이라 생각했다는 점이다.


 <피프티 피플>(창비)이라는 책에는 50명의 등장인물이 나온다. 한 인물 당 두세 페이지의 짧은 분량으로 이어지는 소설은 한 챕터에 주인공이 되는 한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들려준다. 하지만 그 인물은 다음 쳅터에선 주변 인물로 등장한다. 주인공이었던 A는 새롭게 주인공이 된 B의 친구로 등장하거나, A 가 주인공이었던 쳅터에서 A를 부딪히고 지나갔던 C는 한 참 뒤 쳅터에서 어쩌다 A와 부딪히고 갔어야 했는지 주인공의 시선으로 C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문득 주인공이 없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면 모두가 주인공이라 주인공이 50명쯤 되는 소설, 한 사람 한 사람은 이 색 밖에 띄지 않는다 해도 나란히, 나란히 자리를 찾아가는 그런 이야기를요.”



이 책을 쓴 정세랑 작가는 주인공이 없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고 했다. 아니면 모두가 주인공이라 주인공이 50명이 되는 이야기가 되거나. 사실 인생의 주인공으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상상하긴 어렵다. 단오와 도화가 그랬듯 모두들 자신을 인생의 주인공이라 생각하지만,  <피프티 피플>처럼 다른 각도로 보면 나는 누군가의 인생에서 조연이 된다. 그래서 내가 서브들이 가진 이야기를 궁금해했던 것 같다. 저마다 갖고 있는 이야기, 그 '고유성'을 생각하면 내 옆에 있는 누군가도 존중받기 마땅한 주인공이 된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재미있다. 단오는 만화책 '비밀'에서는 '오남주'와 '여주다'를 연결해주는 서브지만, 만화 작가가 부여한 설정값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려고 하는 드라마 상에선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마치 전설의 용을 잡고서 용사가 되듯,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어야 주인공이 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단오는 전개가 바뀌지 않을 거라는 진미채 요정(요정처럼 근사하다는 별칭이다, 이태리 분)의 부정적인 조언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만든 스테이지를 바꾸기 위해 스테이지와 쉐도우를 종횡무진한다. 그러던 중 한 아이를 만나 처음으로 작가의 메인 스테이지가 바뀌는 걸 경험하게 된다. 작가가 이름도 붙여주지 않고 이목구비도 그려주지 않았던 '그 아이'는 슈퍼초울트라급의 엑스트라여서 오히려 작가의 설정 속에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단오는 그 아이에게 '하루(로운 분)'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그 아이를 만나고서부터 자신의 하루가 바뀔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생겼고, 그런 소망을 담은 이름이다. 그날 이후 하루는 '쉐도우'에서도 더 이상 사라지지 않는다. 작가는 물론 독자도 모르는  '쉐도우'의 공간에서 하루와 단오는 그들만의 장면을 쌓아가고 이후 두 사람은 전엔 상상할 수 없던 놀라운 하루, 하루들을 만들어간다.


하루는 이런 단오와의 시간을 "extraordinary"라는 영어 단어에 빗대어 표현하는 장면이 있다. '보통'이라는 뜻의 'ordinary'와 단오와 하루 같은 'extra'를 합치면 "놀랍거나 대단하다"는 뜻의 "extraordinary"가 된다. 단오의 인생에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 무명(無名)의 단역이었던 '하루'이자 그와 동시에 새롭게 쌓여가는 두 사람만의 하루, 하루였다(드라마의 영어 제목이 "extraodinary you" 이기도 하다).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를 보고 난 뒤 프레임 밖으로 사라진 등장인물을 상상하는 일은 더 자연스러워졌다. 단역에 불과한, 보통의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그 안에는 놀랍거나 대단한, 숨겨진 이야기를 발견해 나갈 때 나의 애정을 먹고 자란 서브는 주인공 못지않은 입체적 인물이 되었다. 어쩌면 '서브병'의 증상은 주변을 다채로운 시선과 호기심 어린 눈길로 보며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서브의 마음이 드러난 대사나 깨닫게 된 그들의 이유를 코멘트로 적었고, 내가 적은 코멘트를 보면서 '이 드라마에 이런 대사도 있었네요'라는 반응을 보면 흡족했던 것 같다. 내가 애정 하는 인물이 다른 이의 삶에서도 의미 있게 존재하게 된 것 같아서. 마치 은호에게 이름 지어진 '하루'처럼.


한 사람을 알게 되면 뜨거운 마음이 생긴다. 그의 행동이, 말이 이해가 간다. 어쩌다 발견한 그들의 하루는 내가 자기중심적 삶에 갇히지 않도록 다채로운 시선을 선물했다. 그리고 상대를 향한 이해는 자주 나를 향한 이해로 돌아왔다. 비록 황정은 작가의 에세이  <일기(창비, 2021)> 속 문장처럼 “그래서 안다고 말하는 것이 내게 늘 얼마간 책임을 지는 일로 느껴”지는 부담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는 이런 이해와 앎을 놓지 못하고 서브 중심의 시선을 이어갈 듯싶다.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를 쓴 작가님과 책 <피프티 피플>을 쓴 작가님도 나처럼 ‘서브병’을 앓는 분들이 아닐까?


익숙한 주인공들을 향한 시선과 함께 서브에게도 관심을 가져보면 드라마나 소설에서 다른 재미를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생생하게 자기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그들도, 주인공이니, 그들을 향해서도 관심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 이렇게 서로의 시선을 나누고 알아가는 노력이 쌓이면 너와 나 모두가 주인공이 되어가는 세상이 될 것 같다.


조금 다른 시선으로 주인공을 발견하게 하는 <어쩌다 발견한 하루>는 웨이브에서 감상 가능합니다.

 



어쩌다 발견한 하루 (32부작)
원작 어쩌다 발견한 7월 다음웹툰 작가 무류

제작사 래몽래인 방송사 MBCC

제작진 연출 김상협, 김상우 극본 송하영, 인지혜

김혜윤, 로운, 이재욱, 이나은, 정건주, 김영대, 이태리 등 출연


 원고는 wavve 리뷰단 활동의 일환으로 '웨이브(wavve)'로부터 소정의 원고료를 지원받아 관적 평가를 포함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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