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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May 01. 2022

서른아홉, 인생의 절반에서 가져보는 생각

<서른아홉> (JTBC,2022)

어떤 죽음은 괜찮을까?

천하의 못된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그 죽음은 괜찮을까? 사실 잘 모르겠다. 죽음은 예기치 못한 손님의 반갑지 않은 방문이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죽음이 가져오는 단절을 생각하면 나이가 많든, 적든 그 사람이 악한 던 지, 선하던지 무관하게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그 감정에 농도 차이는 있겠지만.


드라마 <서른아홉(jtbc,2022)>의 방영 예정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땐 그야말로 기대가 높았다. 특정 나이가 제목에 있다 보니 그 나이에 가질 고민들이 다뤄지겠다는 기대에, 그 나이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나는 개인적인 기대감이 생겼고, <슬기로운 의사생활(tvn, 2020)> 에서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던 전미도 배우가 캐스팅 목록에 올라와 있어 그 기대를 더욱 높였다. 하지만 1회가 시작하자마자 내 기대는 와르르 무너졌다. ‘뭐야 우리 언니 죽어?’


마흔을 문턱에   여자의 우정과 사랑, 일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하며 막연히 <멜로가 체질(jtbc, 2019)> 같은 결을 상상했던 내게 전미도 배우.. 아니 전미도 배우가 연기하는 찬영이란 인물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1회의 오프닝은 가히 충격이었다.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찬영 불륜에 가까운 연애를 하고 있는 상황과 선우(연우진 ) 동생 소원(안소희 ) 성인이 되어 파양 되면서 받은 상처로 인해 유흥주점에서 일한다는 설정은 소원의 방황을 굳이 이런 모습으로 담았어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솔직히 하차를 고민하게 했다.


그런데 나는 이 드라마를 어떻게 완결까지 볼 수 있던걸까?



찬영은 건강검진 결과 췌장암 4기, 시한부 선고를 받는다. 5%도 안 되는 가능성을 믿고 병실에서 갇혀 지내느냐 지금의 일상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찬영은 항암을 포기하기로 한다. 처음엔 미조와 주희가 격렬히 반대하지만 찬영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두 사람은 어렵게 그녀의 뜻을 존중한다. 치료받자는 얘기는 더 이상 안 할 테니 지구 상, 역사상 제일 신나는 시한부가 되어달라고 부탁한다. 주희는 자신이 당첨된 4등 로또까지 파쇄기에 넣어버리면서까지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을 찬영을 위해 빈다. 각별한 세 사람의 우정이었다.


이후 세 사람은 천천히 찬영의 죽음을 준비한다. 신나는 시한부가 되기란 말처럼 쉽지 않았지만 세 사람은 그때마다 기지를 발휘했다. 찬영의 버켓 리스트대로 미조는 친엄마를 찾았고, 주희는 연애를 시작했다. 물론 이 또한 쉽지 않았지만 그 어려움을 이들은 이제껏처럼 함께 이겨낸다. 과거 사고로 배우의 꿈을 접었지만, 마지막이 얼마 남지 않자 그녀는 배우로 작품에 출연하기 위해 오디션을 보았고, 그녀의 도전을 두 사람은 찬영이만큼 간절한 마음으로 응원했다. 웃는 영정 사진을 갖고 싶다는 찬영의 말에 두 사람은 바로 카메라를 챙겨 출사를 나갔고 그곳에서도 많이 웃고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이 외에도 이들은 순간, 순간 즐겁고 신나게 보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찬영이 남긴 부고 리스트를 브런치 리스트로 바꾼 일이다.


형식적인 관계의 사람들이 하는 피상적인 조문을 받고 싶지 않았던 찬영은 하루하루가 아쉬운 지금, 밥 한 끼 먹자고 연락이 오면 기꺼이 나갈 사람들을 기준으로 자신의 부고 소식을 전할 리스트를 만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미조는 내내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생각은 찬영의 마음에 닿지 못할 정도임을 깨닫고 속상해한다. 하지만 그건 찬영이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른다. 자신의 마지막을 믿고 맡길 정도의 친구들이었지만, 부고 리스트를 브런치 리스트로 만들어 헤어지기 전에 보고 싶은 이들을 볼 수 있는 자리를 만들 줄이야. 이들의 우정은 그저 돈독하다 말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상상할 수 조차 없는 모양으로 나타날 때마다 말할 수 없는 감정이 차올랐다. 나는 내 마지막 순간을 믿고 맡길 사람이 있을까? 내게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맡길 사람은 있나? 평균 수명을 80년으로 보는 요즘, 마흔을 앞둔 찬영은 인생의 절반밖에 살지 못했지만 양보다 질이라고, 충분한 삶이었다고, 더 할 나이 없는 인생이었다고 고백한다. 신나는 시한부는 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시한부였으리라.


다만 속절없이 다가오는 헤어짐의 시간 앞에 이들은 여러  눈물을 삼킨다. 무너진 마음이 날카롭게 누군가를 향하게 되는 찰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이들은 품위를 잃지 않는 성숙함을 보인다. 슬프지만 다시 오질 않을 시간을 다정하면서도 아름답게 보냈고, 마지막 순간까지 아니 찬영이  이상  사람과 함께 하지 않는 작별 이후에도 서로를 향한 친애와 성숙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과연 이런 태도가 가능할까? 미조가 부잣집으로 입양된 사실을 알고 자신을 통해 돈을 뜯어낼 궁리를 하는 친엄마를 만나서 보여준 결자해지 장면에서도 단호히 인연을 끊으면서도 예의를 지키는 모습은 닮고 싶을 정도로 성숙한, 품위 있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작품을  유영아 작가의 전작 드라마 <남자 친구(tvN, 2018)> 이따금 다시 보는  쿠바의 풍경이 멋져서도 있지만, 수현과 진혁이  사람을 상처 주는 상황 속에서 서로를 지키는 말의 품격, 우아한 태도가 그리워서다. 입에서 단내가  정도로 많은 말을 하고, 때로는 원하지도 않는 말을 해야 하는 일상을 살며 우영아 작가가 그려낸 말과 태도는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와 위안을 받는다. <서른아홉>에서도 그런 위로와 위안이 흐르고 있다. 내가  작품을 끝까지   있었던 힘은 아마 이것이 아니었나 싶다.


사실 드라마 <서른아홉>을 보며 ‘가족’이란 무엇이며, ‘가족’이 되어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미조와 선우네 두 입양 가정과 가족 같다는 말로 부족한 세 사람의 우정을 보며 생각하게 된 것들도 있지만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다음 기회로 미루려 한다.



드라마 <서른아홉>은 서른아홉, 그 나이에 일반적으로 그릴 수 있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인생의 절반을 지나는 세 사람을 통해 사는 일과 죽는 일, 그 사이에 소중한 게 무엇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게 했다. 생각해보니 ‘그 나이에 일반적인 모습’이라는 게 있기나 한 걸까? 또 어이없는 착각을 했다. 마치 그런 게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미조는 서른아홉에서야 오래 가져온 자신의 뿌리에 대한 불안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녀가 경험했던 혼란과 방황은 소원을 이해하며 그녀가 다시 자신의 삶을, 그리고 가족을 사랑할 수 있게 도왔다. 두 사람의 고민은 닮았으나 조금 더 구체적인 상황을 지난 미조는 스물 후반의 소원을 도울 수 있었다. 주희는 이십 년 넘게 다녀온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일에 도전하는, 찬영이 더 이상 이들과 함께 하지 않는, 그런 마흔을 맞는다. 찬영이 없다는 것 빼곤 다를 게 없는 마흔. 그러니 우리의 고민은 서른아홉이라서, 스물아홉이라서, 열아홉이라서, 마흔아홉, 쉰아홉이라서 달라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반복되고 더 구체적이 되어가는 건지 모른다. 더욱이 죽음 앞에 놓인 우리 삶을 생각하면 그 모든 해의 고민은 동등한 무게를 갖는다. 그렇다면 드라마 <서른아홉>은 인생의 절반쯤에서 이를 돌아보며 앞을 생각하게 하기 위해 서른아홉이란 나이를 제목으로 삼은 게 아닐까?


결국 살아간다는 건 반갑지 않은 손님을 맞이하는 일이겠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이나 그 여정을 이들처럼 서로를 위하며 따뜻하게, 품위를 잃지 않는 태도로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는 것만큼 죽음을 준비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해 주었다는 점에서 묵직한 마음을 갖게 하지만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더 생각나는 드라마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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