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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May 09. 2022

추앙하고 싶은 해방의 세계

<나의 해방 일지> (JTBC,2022)

낮은 목소리로 무감하게 말하는 미정(김지원 분)의 말들에 천천히 이어폰 볼륨을 높였다.


“추앙”하라던. 낯선 단어를 던진 그녀의 말이었지만 지금까지 미정이 들려준 그녀의 속 마음은 두 번 곱씹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내 안에도 흐르고 있는 감정들이었다. 그래서 어떤 대사는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알아 들었다.



현아(전혜진 분)는 미정이 말로 사람을 홀리겠다는 의지가 없어서 그래서 미정이 하는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다 귀하다고 했다. 생각해보면 하루에 침묵을 유지하고 있는 시간이 없다. 참 많이 말한다. 업무상 필요한 말이었다고 하나 그 말들에는 '내'가 담겨 있지 않아 대화가 아니고, 웃으며 주고받은 화기애애한 대화는 "존재하는 척 떠들어대는 말"이라 대화를 했다는 기분보다 뛰어난 낱말 연결 실력을 가졌단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쉬는 말이 하고 싶"다는 기정(이엘 분)의 말에 동의했고 그렇게 <나의 해방 일지> 속 대사는 머리와 가슴을 넘어 나의 일상에 와닿아 부딪혀 퍼져갔다.


“배우는 건 그만하고 싶어.”


미정이 다니는 회사는 사내 동아리 활동을 적극 권장했다. 이 회사 사람들은 전부 오락부장 출신이었냐는 의문이 들 정도로 확신의 E 성향을 가진 직원들 속에서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은 미정은 ‘관심 사원’이었다. 아무것도 안 할 수 있는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회사 분위기는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사회의 압박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지금도 충분히 바쁘게 살고 있다는 소리를 듣는데도 운동과 영어 수업을 알아보고 등산을 가며 주말에도 무언가 했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나는 매일이 버겁게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이상한 안정감을 느꼈다. 이런 사회에 길들여진 나와 달리 무엇에 갇혔는지, 어디에 갇혔는지 모르겠지만 꼭 갇힌 것만 같은 이 갑갑한 세상 속을 뚫고 나가고 싶다던 미정은 사내동아리로 “해방 클럽”을 만든다. 이 동아리엔 그녀처럼 어느 동아리에도 속하지 않았던 박상민 부장(박수영 분)과 조태훈 과장(이기우 분)이 참여한다. 그리고 이들이 동아리 활동 증빙자료로 제출하기 위해 쓰게 된 일지가 바로 <나의 해방 일지>다(사담이지만 나는 이들이 글을 써서 자신이 갇혀있는 것을 찾아보는 방식도 마음에 들었다. 물론 쓰는 행위는 타인(동아리 관리자)에 의한 것이었다 해도).


드라마는 기회 의도부터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살면서 마음이 정말로 편하고 좋았던 적이 얼마나 있었나? 항상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하루를 알차게 살아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면서도, 몸은 움직여주지 않고, 상황은 뜻대로 돌아가지 않고. … 지루한 나날들의 반복. 딱히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행복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문제가 없다는 말도 못 한다.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고.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는, 행복하지 않다는 것.”


자신을 소몰이에 비유하며 ‘가보자, 왜 살아야 하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지만 사는 동안 단정하게 가보자’ 하루, 하루 어렵게 자신을 끌고 간다던 미정과 ‘뭔가 하루를 잘 살아내야 하는 강박은 있는데 제대로 한 건 없고 계속 시계만 보면서 계속 쫓기는’것 같다던 박상민 부장의 모습 속엔 성실한 무기징역수에 비유되었던 작가의 전작 <나의 아저씨(tvn, 2018)> 박동훈(이선균 분)이 보이는 것도 같다. 전작에선 평안에 이르렀는지 묻던 작가는 이제 마음껏 추앙하라 말한다.


현대인이 가진 허무함, 무기력함, 지친 듯 저 깊은 곳에 덮어놓은 감정을 잘도 찾아내는 작가의 작품은 공감 가는 만큼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이번 작품은 일상에 가깝게 풀어냈다. 텅 빈 눈과 무거운 발걸음으로 지하철을 타고, 마을버스에서 내려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 도로를 걸어 집과 회사를 오가는 경기 주민 염 씨 세 남매의 출퇴근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도 인생의 고단함을 전해준다.


“모든 관계가 노동이에요.

눈뜨고 있는 모든 시간이 노동이에요.”


인생의 반을 출퇴근하는 길 위에서 보낸다는 이들의 농담이 내겐 형식적인 것들에 허비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말하는 것 같았다. 어느 사이 관계의 정의는 ‘사람이 생존, 생활을 위해 특정한 대상에게 육체적, 정신적으로 행하는 활동’인 “노동”이 되어 허비되는. 나쁜 사이는 아닌 그렇다고 완벽히 채워지는 사이도 아닌, 노동의 관계. 익숙해서 몰랐는데 결코 행복한 건 아니었다는 걸 깨달을 무렵, “추앙”이 다가온다.


미정은 구 씨(손석구 분)에게 자신을 추앙하라 말했다. 선포에 가까운 이 낯선 표현에 당황한 건 나만이 아니었다. 구 씨도 ‘추앙’이라는 단어를 인터넷에 검색해 본다. “높이 받들어 우러러 봄”. 미정은 왜 이런 어색한, 낯선 행동을 요구했을까.


누군가를 추앙하는 일은 ‘무조건적’이어야 한다. 추앙하는 대상에게서 실망스러운 모습이 보여도, 흔들림 없는 충성을 보이는 맹목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그녀는 이제까지 고르고 골라 만난 사람이어도 전적으로 응원하지 않았다. 나보다 잘났으면 좋겠는데 나보다 아주 잘라지는 말아야 하는, 이율배반적인 마음이 전부를 줄 수 없게 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본성이지만 그래서 한 번도 제대로 준 적도, 받은 적도 없었다. 아니 받을 수 없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라면 그녀뿐만 아니라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람도 그랬을 테니까. 진짜를 잃은 노동이 돼버린 관계에선 더 이상 출구를 찾을 수 없다. 그래서 미정은 꽉 채워진 상태를 갈망하며, 생경한 ‘추앙’이란 단어를 마음에 품고 있었을지 모른다.


결국 미정은 구 씨를, 구 씨는 미정을 추앙하기로 한다. “응원하는 거. 너는 뭐든 할 수 있다, 뭐든 된다 응원하는 거.” “상대방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에 나도 덩달아 이랬다 저랬다 하지 않고 그냥 쭉 좋아해 보”기로 한다. 사랑과는 다른. 사랑으로는 안 되는 오직 “추앙”.


그렇다고 이들이 보여주는 추앙의 방법이 특별한 것도 아니다. 어딘가에 내 편이 있다는, 보이지 않지만 닿아 있는 지지다. “추앙”은 미정이로 하여금 어색해진 동료에게 먼저 가 말을 걸게 했고, 상사의 지적에도 마음이 상하지 않게 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일과가 끝나면 술만 마시던 구 씨는 쌓아 놓은 술병을 치우고 방을 청소했다. 무언가 확연히 달라졌다 할 수 없지만 건, 무감해졌던 감각의 끝에서 꿈틀거리는 생동감이 느껴진다. 거짓된 위로와 관계 속에서 진짜를 만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아주 소소한 변화일 뿐인데 메마른 삶에 윤기가 흐르는 듯 보였다.


이제 더 이상 ‘추앙’이 낯설지 않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추앙에 열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서로를 향해 거짓되지 않은 웃음을 짓게 된 저들이 만들어가는 ‘추앙’의 세계에 들어가고 싶다고 너도나도 말할 정도다. 우리 내면에도 저런 온전한 채워짐을 갈망해서 일 수도 있고, 이들이 서로를 추앙하는, 이전에 하지 않았던 행동을 함으로 달라진 자신을 만나고자 한 그 변화를 갈망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날 추앙해요. 그래서 봄이 되면 당신도 나도 다른 사람이 돼 있을 거예요.”

“한 번도 안 해봤을 거 아니에요. 난 한 번도 안 해봤던 걸 하고 나면 그전 하고는 다른 사람이 돼 있던데?”


그래서 우리가 무언가를 계속 배워왔던 것이다. 지금과는 다른, 달라진 내가 되길 바래서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왔다. 하지만 그래서 더 분주했고 더 공허했던 거란 걸. 저들이 보여준 ‘추앙’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이젠 추앙하고 싶은 해방의 세계다. 내가 벗어나고 싶은, 내가 갇혀 있는 곳은 어디인가. 저들은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다른 내가 되어 저들을 옭아매던 것들로부터 해방되었을까?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 속 모든 대사를 모아 놓아 본다. 그리고 내 삶에 부딪혀 흩어지게 둔다. 분명 네모난 화면 속에서 오고 가는 대화인데, 이것이야 말로 가짜인데 진짜보다 더 진실되게 삶에 부딪혀 간다. 나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토, 일을 기다린다. 마침내 나도 그 해방에 닿길 바라는 심정으로.


• <나의 해방일지> 대사는 인스타그램 #양보손글씨_나의해방일지 를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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