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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비타스 Feb 14. 2022

Andante e Cantabile

소녀의 세상은 길들여지지 않는다.

 살아가다 보면 후회하는 일이 적지 않죠? 1분 전 부린  게으름도 후회로 남겨두죠. 제게 음악은 '꿈'입니다.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를 말하는 것이 아닌, 여름 더위에 지쳐 잠깐 든 선잠에, 부시게 찬란하고 아름다운 신의 장난 같은 신기루가 음악이고 무대입니다. 제 가장 큰 후회는 어린 시절 나를 위한 욕심과 떼를 부리지 않았다는 것이죠.




 제가 처음 공연을 마주한 건 제주도에서 서울로 이사 온 해였습니다. 그러니 초등학교 5학년 때, 친척의 배려로 그가 선물 받은 초대권을 양도받았습니다.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있었던 교향악단의 공연이었죠. 클래식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그저 어머니 손 붙들고 나선 종로 나들이에 가슴 설레어했던 시절. 어떤 기대도 없이 갔던 공연에 저는 감동했습니다. 어떤 곡이었다 기억이 나진 않지만, 느낌만 가슴에 남아 그날을 떠올리면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로비의 천정이나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별개로, 가슴을 치던 고동이 남아 좀 더 저 앞으로 나가 가까운 거리에서 그들과 마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바라던 마음이 아직도 남아있으니,  그날 오케스트라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반한 게 맞습니다.





 그 음악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심을 부리진 못했지만요. 우리 가족이 제주도 생활을 서울에 온 이유는 집안 형편이 나빠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실패와 보증이라는 흔한 집안 역사 스토리가 작성되는 시간. 친척이 운영하는 좁은 빌라에서 몸을 치대며 살았죠. 부모님의 '돈이 없다.'는 말이 인사보다 더 자주 들리던 시절. 무언가 사달라든가 원하는 것을 조르는 성격은 아니어도, 그저 학교에서 보내는 가정통신문 하나를 내밀어도 그게 어떤 주든 '돈이 없다.'는 말이 종결부를 장식했던 시절입니다. 차마 음악 하고 싶다 소리를 할 수 없죠. 그러니 음악의 미련을 그저 학교 활동으로 풀었습니다. 돈이 들지 않는 음악 특별 활동은 동요부에 드는 것이었죠. 거기서 만난 친구는 리틀엔젤스에서 활동하는 합창단원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노래 부르기를 즐겨했는데, 제가 부르는 노래를 듣곤 '네 소리가 참 아름답다.'라며 제게 이번에 있을 오디션에 참가하길 권했죠. 담당 선생님도 한 번 해보라고 권하셨지만, 전 그저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돈이 없어요.'라고 말이죠. 당시 선생님도 친구도 제게 돈이 없어도 활동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며 설득했지만, 저는 가슴을 누르며 거절했습니다. 그저 언젠가 마음껏 욕심을 부려도 좋을 때가 오면 음악을 공부하리라 마음속에 꾹꾹 소망을 적어왔지만, 때가 이렇게 늦어질지는 몰랐습니다. 사실 지금도 마음껏 욕심부리기 좋을 때는 아니죠. 원하는 것이 있다면 일단은 도전해 봐야 했다는 걸 그때의 전 몰랐습니다.




 그나마 제 소망을 신이 들으셨는지, 생각보다  다양한 음악을 접하며 성장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성당에서 그리고리오 성가를 들을 수 있었고, 발레 하는 친구를 통해 발레 공연을 보았죠. 선생님의 배려로 얻은 연극표로 연극을 보았습니다. 1년에 한 번 연말이면 오는 초대장은 돌고 돌아 제게 왔습니다. 지인들 덕택을 보며 오페라도 교향곡도 들었지만, 제가 딱 하나 제대로 듣지 못한 공연이 있습니다. 피아노 리사이틀이 바로 그것이었죠. 제가 들었던 최초의 피아노 리사이틀은 우연히 대학 공연에서 들었는데, 당시 기억이 불쾌해서 피아노는 절대 배우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진지하게 피아노를 배우고 있다는 것이 조금은 신기합니다.




  제게 피아노는 무엇일까요? 목표? 거창하게 생각한다 말하실지 모르지만, 제게 피아노는 신의 질문 같습니다. 그는 제게 과제를 주었죠. 네가 열등감을 뛰어넘어 너를 찾을 수 있는가? 하고 말이에요. 제 시작은 모두들 늦었다 말하는 성인이고, 천재도 아니죠. 하나의 음을 제대로 누르기 위해선 몇 배의 노력을 필요로 하고, 불안증은 저를 평생 괴롭히는 친구입니다. 체력이 좋은 편도 아니고, 강하고 단단한 마음을 지니지도 못했죠. 게다가 고정 수입이라곤 없는 세상의 낙오자. 소심해서 눈치 보고 긴장하는 열등감 덩어리. 그는 제게 피아노를 손에 쥐어주고 묻습니다.




 "네가 가진 빛을 세상에 보일 수 있는가?"





 모르겠습니다.....






 세상에 실패를 딛고 일어난 사람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 축복 제게도 내려질까요? 그 대단한 축복 제 것이라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제게 그 자격 아직 남아있다 말해주실까요?



 "리시차요? 나쁘진 않는데, 좋아하려나?"



 여름이 끝날 무렵, 당시 제 감정 상태는 불안정해서 한 달 내내 눈물로 지냈습니다. 연습이 힘든 것도, 레슨이 힘든 것도 아니었죠. 단지, 묵었던 감정에 빗장이 열리며 똑바로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아파서 쇠사슬로 꽁꽁 묶어 심연 속에 던져놨던 과제들이 심연 위로 떠오르며 악취를 냅니다. 그리고 해결을 독촉하죠. 불안한 감정이 출렁입니다. 음악을 듣고, 연습을 하며 모르는 사이 느슨해진 빗장이 완전히 풀려 제 원초적인 문제가 홍수처럼 떠밀려 내려왔죠. 나를 감당할 수 없는 하루가 계속되던 어느 날, 우연히 본 홍보용 기사를 보고 한껏 욕심을 부려 충동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처음으로 내 돈을 주고 산 공연표. 발렌티나 리시차의 피아노 리사이틀입니다.


 좌석은 1층 C블록 8열 2번.



 "그 사람이 호불호가 강해요. 의외로 취향이 확고하잖아요? 좋아하는 스타일과는 다를 거예요. 그래도 공부하는 사람이 편식하는 것도 좋지 않죠. 다녀와요. 듣는 것도 공부니까요."




 발렌티나 리시차는 유튜브 스타라고 합니다. 그의 연주는 유튜브를 타고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실제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팬들의 요청으로 공연을 시작하게 되었죠. 물론 수상경력이 전무하다든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무대를 만들고 개척했다는 사실에 존경심이 생겼습니다.



 저는 연주 영상을 찾아보지 않았습니다. 아무 편견 없이 듣고 싶었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1년 만에 다시 찾은 서울은 여전히 정신없고 소란스럽습니다. 오래된 도시의 지린내. 바람은 뜨겁고 무겁습니다. 물기 없는 메마른 땅. 철제 사람을 담아 달리는 박스 안에는 피곤해 보이는 얼굴, 분노와 의심 가득한 노기 어린 시선이 어지럽게 엉켜갑니다. 어디든 경계가 뚜렷한 도시의 풍경. 현실만이 존재한다 느껴지는 공간에 사실 가장 많은 욕망과 꿈이 꿈틀거립니다. 그게 기묘한 불협화음을 내며, 악마적 매력을 지닌 연주를 합니다. 그 연주가 비록 제 취향에 맞진 않더라도 마음을 홀리게 하죠.




 숙소는 종로 인사동. 창가에 기댄 채 피아노에서 멀어져 느긋하게 세상을 내려봅니다. 시선 속에 망국의 슬픔을 안은 운현궁이 보입니다. 멀지 않던 과거 그 터에 앉아 계셨던 어른은 평생 자신을 숨기며 파락호를 자처했죠. 자처한 것인지 그의 성공을 본 사람들의 판단인지는 모릅니다. 어쩌면 그도 자신의 자리를 찾아 배회하는 중은 아니었을지, 그 안에 감당하지 못하는 열등감 안고 괴로워하시진 않으셨을까 묻습니다.



어르신, 당신은 당신을 미워하지 않으신가요? 

열등감이 당신이 오른 그 자리를 거부하진 않았나요?

어떻게 세상에 당신의 빛을 내보였나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미래는 보이지 않고 유리에 비친 저는 너무 늙어버렸습니다.





 공연은 예술의 전당 음악당 콘서트 홀. 빠듯하게 도착하긴 했어도 사인 CD사고, 나름 여유를 부리다 공연장으로 들어갔습니다. 피아노가 가장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는 온도와 습도가 제게 안정감을 줍니다. 무대는 잔잔한 금빛으로 은은하게 장막을 내리고, 그 안에 검은색 스타인웨이 그랜드 피아노 하나만 공간을 채워도 그 위엄이 오케스트라와 견주어 전혀 떨어지지 않죠. 어둠이 깔리고 빛은 무대에 집중됩니다. 저 자리의 주인이 누구일까요? 저 빛에 묻혀버리진 않을까요? 괜한 걱정에 손에 식은땀이 송글 맺힙니다.



 은빛에 가까운 금발을 가진 여인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와 객석을 향해 우아하게 인사합니다. 그의 인사에는 어떤 열등감도 구걸도 없습니다. 그는 이 무대를 당연히 본인의 것으로 믿고 있죠. 내가 서 있을 장소. 무대에 오른 그는 거리낌이 없죠. 빛 속의 여인은 더 아름답고 강하게 반짝입니다.




  곡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소나타.




  연주는 첫 4마디, 첫 소절에서 결정됩니다.  그는 강하고 거침없이 세상에 출사표를 던집니다. 격정적이고 꾸밈없지만 어딘지 모르게 미숙하죠. 그 미숙함은 초심자가 가진 부족함이 아닙니다. 소녀이기에 세상에 거침없이 도전하고 달려 나가는 야생적인 본능입니다. 여인이 되기 전 소녀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꿈꾸고 상상하죠. 세상이 여성에게 요구하는 여러 규범을 부정하고 오로지 나로 살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이목이야 어찌 되었든 맨발로 선 나는 그 자체로 완벽하죠. 내 인생을 증명할 이유는 없습니다. 나는 원한다면 한 마리의 야생마가 되고, 고원의 대지와, 얼어붙은 숲 위를 날아다니는 독수리가 될 수도 있죠. 그의 연주는 소녀가 가진 무한의 힘. 그 힘으로 그는 저를 설득합니다. 나는 나 자체로 빛이라는 것을 말이죠. 신에게 받은 질문을 그는 그 연주에 담아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나는 빛으로 태어났다!"



 라고 말이죠. 그렇죠, 이미 그 존재인 것은 증명이 필요 없습니다. 만약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면, 그것은 내가 빛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내 스스로 숨겨둔 것이죠. 왜곡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나를 벗겨내야 합니다. 처음 태어나 내가 가진 본래의 모습을 찾아야 하죠. 태어남이라는 것이 축복이고 삶이 기적인 일상을 선물 받은 나는 그 가치를 스스로 잊어버렸습니다. 대신 벽 뒤로 숨어들어 모든 걸 부정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어떤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며 타인에게 시선을 돌려 질투하죠. 신에게 사랑받는 평범한 것들!이라고 못난 질투를 합니다. 연주자는 그 못난 고리를 끊으라고 합니다. 네가 신에게 대답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라 큰 소리로 다그칩니다. 나에게 반해 가슴 설레는 제 모습을 보며 내 세상을 동경하는 너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라고 소리칩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방법은 이미 알고 있죠. 가장  단순하고 어려운 방법. 길들여지지 않을 내 안의 세계를 찾는 일. 소녀인 내가 품은 이상하고 아름다운 야생의 세상을 발굴해야 합니다. 그렇게 가슴을 쥐고 천정을 바라보니 따스한 봄볕이 내립니다.




 무대 위, 빛의 세례를 받는 소녀는 피날레를 장식하고 미소를 짓습니다. 그의 압도적인 강인한 세계. 그는 당당하게 자신의 세계를 밝힙니다. 그는 승리자의 여유로 제게 묻습니다. 나 만큼 네 빛을 세상에 보일 수 있는가? 그렇네요. 신은 내가 가진 빛을 증명하라고 묻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일 것이냐 물었죠. 저는 떨리는 두 손을 꼭 붙잡고 속삭입니다.




  가 꼭꼭 숨길 걸 찾아내야죠. 멋지게 보여줄게요. 세상이 반할 만큼 아름다운 빛. 저 조명에도 묻히지 않을 빛을 공부하는 동안 찾아낼게요. 저의 시간은 이제 흘러가고 있죠. 난 늙지 않았어요. 세상이 준 나이는 게 의미 없다는 것을 알면서 스스로 잡힌 어리석음을 반성해요. 그 시작은 무엇일까요? 알에서 깨어난 소녀예요. 막 깨어난 저는 연약하고 야들 거리는 피부를 가졌지만, 이미 난 내 손으로 알을 깼어요. 내게 힘이 있다는 걸 믿어요. 오늘 밤 당신은 답을 찾아 고민하는 제게 멋진 멘토가 되어주었어요.



고맙습니다. 고마워요....




 

 "어땠나요?"



 "굉장히 야성적이고 솔직해요. 손의 움직임이 과감하고 거침없어요. 제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확실히 아니지만, 즐거웠어요. 직접 들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신 이야기를 이해할 수 있었어요. 강인한 체력도 마음도 닮고 싶어요. 배우고 싶어요."





 아직도 때때로 저는 어린 시절 부리지 못한 욕심을 후회합니다. 마음을 청소하는 일만으로도 벅찬 하루를 보냅니다. 수면으로 올라온 빛바랜 감정을 풀어내고 있지만 어느 하나 쉬운 문제가 없습니다. 그렇게 다 거둬내면 제 세상의 전경이 보이게 될까요? 저는 어떤 모습인가요? 사춘기가 된 소녀는 미숙한 몸짓으로 버둥대며 찾고 있습니다. 무대 위 그 여인에게 배운 것을 내 안에서 찾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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