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dante e Cantabile
고마움과 존경을 담아.
"넌 나를 만나면 항상 그 선생님 이야기야."
하고 볼멘소리를 했었습니다. 제 투정을 듣는 친구는 저보다 나이가 어렸고, 성악가를 꿈꾸는 친구였죠. 가곡을 좋아하던 아이는 저를 만나면 항상 그의 선생님 자랑을 그렇게 늘어놓습니다. 한껏 들떠 홍조를 띠고 시작된 이야기 끝은 '닮고 싶다'로 맺어지죠. 그러다 언젠가 한 번, 이 말을 꺼낸 겁니다. 그랬더니 그 친구 곰곰이 고민해보다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언니, 언니가 언젠가 말이야 음악을 하게 된다면, 그때는 언니에게 좋은 선생님이 생겼을 때일 거야. 지금 내가 어떤 말로 설명해도 언니는 이 감정을 이해하기 어려울 거야. 언니가 나를 가끔 질투하는 걸 알아. 나는 언니도 언젠가 음악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 그때가 되면 언니도 알게 될 거야. 동경하며 고마워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
제가 사랑하며 존경하는 두 음악가가 있습니다. 마우리치오 폴리니와 루돌프 부흐빈더. 두 분의 스타일이 비슷한가 묻는다면 전혀요. 온도가 확실히 다릅니다. 폴리니가 좀 더 섬세하고 봄날에 가깝다면 부흐빈더는 단호하고 가을이나 겨울의 느낌이 더 듭니다. 덕분에 같은 베토벤이라고 해도 두 분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재밌습니다. 같은 음악을 이렇게 표현하시는구나 하고 즐기게 됩니다. 곡의 전경이 바뀌죠. 향기도 맛도 달라지니 그 재미가 쏠쏠합니다. 그리고 바라게 되죠. 또 만나고 싶어. 또 듣고 싶어. 이 들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고백하자면 제게는 존경하며 사랑하는 또 다른 음악가가 있습니다. 이 분의 음악은 마음대로 들을 수 없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을 모릅니다. 음반이나 음원도 없죠. 순간이 지나면 그저 기억을 더듬어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더 소중한 음악이 있습니다.
바로 저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의 음악입니다.
어린이 바이엘을 끝내고 원전 바이엘로 넘어가는 시점이었습니다.
"작품 하나 해볼까요?"
라고 무심하게 툭 던지시는 겁니다. 마음속에선 '아니요! 절대 못해요!'하고 소리치는데 입은 굳어 아무 소리가 나오질 않습니다. 그렇게 있으니 마음의 소리를 들으신 건지 어쩐지.......
"괜찮아요. 쉬워요. 유치원 아이들도 다 하는 거예요. 유치부 애들 콩쿠르에 자주 나오는 곡 중 하나죠. 바흐 평균율 프렐류드 1. 이거 한 번 도전해 보죠."
하곤 너무 평온하게 말씀하셨죠. 다행히 집에 미리 평균율 악보도 사놨고, 폴리니가 연주한 평균율 CD도 있어 예습 겸 지정해주신 곡을 들었습니다. 곡을 듣고 있으니 손발이 떨립니다. 눈으로 악보의 음표를 좇는 것은 가능하지만 도저히 이건 제 수준으론 무리인 겁니다. 이 악보는 도대체 어떻게 연주해야 하죠? 이상한 곳에 쉼표가 찍혀있는 겁니다. 일주일 동안 남는 시간에 음악을 들으며 악표를 보는데 한 숨만 깊어지는 겁니다. 결국 수업이 있던 전날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수업에 갔더니 제 상태를 걱정하며 물으셨죠.
"진지하게 도망갈까 고민했어요."
했더니 크게 웃으시는 겁니다.
"뭐야아~ 할 수 있다니까요. 정말이지. 도망가면 잡아다가 옆에 앉혀놓고 가르치면 되니까 걱정은 그만하고 악보에 집중해 봅시다!"
하고 악보를 풀어주셨죠. 왜 제가 어렵게 생각했는지, 찬찬히 둘러보면 아무것도 아닌 문제지만 겁을 먹어 더 악보가 보이지 않았을 거라고 하시면서 말이에요.
"이 경우는 화음으로 먼저 연습하는 거예요."
하며 더듬더듬 화음으로 잡아가니 제가 들었던 음이 나옵니다.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지만, 손이 잘 움직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저는 손이 작은 편이라 한 옥타브가 겨우 닿았죠. 겨우 새끼손가락으로 눌렀는데 4번째 손가락이 같이 눌리며 음이 지저분하고 명확하지 않습니다. 결국 수업 중에 손가락에 색연필을 끼어두고 더듬더듬 연주하는데, 통증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이를 악물고 천천히 건반을 눌러보는데, 입에서 비릿한 철분제 맛이 납니다. 입술이 살짝 터졌는데 나아지는 건 없이 악보 끝까지 삐끄덕대며 도착했습니다. 좀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과 제 수준이 그대로 드러나 부끄럽고, 이것도 해내지 못하나 싶어 자신에게 실망감만 듭니다. 도저히 고개를 들지 못하니 선생님께서 활기차게 말씀하셨죠.
"자, 그럼 잠깐 일어나 볼래요?"
하시곤 피아노 앞에 앉으셨습니다.
"이 노래를 제대로 연주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면서 연주를 시작하셨죠. '심장이 하늘에서 땅까지 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는 시어가 그대로 현실로 일어났습니다. 공기가 순식간에 변합니다.
에어컨에서 차가운 공기가 폭포처럼 쏟아지는데, 이 공간은 봄날처럼 따스해졌죠. 한 순간 신의 손길로 이 공간은 성스럽게 물들었습니다. 은은한 빛이 모여들어 온전히 한 사람을 빛나게 합니다. 창가를 통해 내려온 빛이 그의 스포트라이트가 됩니다. 사람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인간이 이렇게 빛나는 존재일 수 있을까요? 저는 이 감정에 적당한 단어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감동했습니다. 제가 연주할 때 피아노 소리가 아닙니다. 같은 피아노가 아닌 듯합니다. 분명 같은 피아노인데 말이죠.
그는 당당하고 또박또박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어떤 기도일 수도 있고, 과거 회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중간중간 음악을 연주해 주신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본격적으로 연주해 주신 건 처음입니다. 웅장하고 섬세하게 건반 위로 손가락이 떨어질 때마다 음은 명령에 화답합니다. 그는 공정하고 명료합니다. 하지만 엄격하기만 한 군주는 아닙니다. 장난스럽게 농담을 건네고, 웃음을 즐기고 그리고 결국 모든 것을 포용하는. 그 세상의 유일무이한 여왕입니다. 88개의 건반이 내는 소리는 관객이 된 제게 닿아 그의 이야기를 절제되고 명확한 소리로 그려내니 그저 속절없이 매료됩니다. 방어할 틈도 없이 벽은 허물어지고, 처절하게 반해버린 저는 백기를 듭니다. 마치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 말이죠.
이 곡의 연주 시간은 2분 남짓. 마지막 마무리를 짓고 당당히 승리자의 미소를 보내니, 그 순간 팬심인가? 동경일까? 한 단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남아 도저히 진정이 안됩니다. 수업이라는 것도 잊고 손이 절로 올라갑니다. 그러다 간신이 정신을 차려 두 손을 꾹 쥐었죠. 맞잡은 두 손에 땀만 송골송골 맺혀 감정을 최대한 억눌러봅니다.
"어때요?"
"예뻐요."
겨우 떨리는 소리를 붙잡아 뱉어봅니다. '예쁘다'라는 말에 선생님이 성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는 말까지 어렵게 담아냈지만, 이 마음은 알아채지도 못하시고 천진한 소녀처럼 웃으며 말씀하셨죠.
"이 곡이 단순하지만 아름답거든요."
하고는 선생님의 의자로 돌아가셨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그대로 몸이 굳은 터라 그대로 멍하니 서있으니,
"의자에 앉혀 줄까요?"
하고 장난스레 묻는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리곤 어렵게 수업을 이어갔습니다. 얼마나 떨리던지....... 다시 한번 더 연주해 달라고 조르고 싶은 마음 간신히 잡고 수업을 끝냈습니다.
그날 이후 선생님의 음악을 다시금 듣고 싶었죠. 그 마음 편지에 가득 담아 보내기도 했지만,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었죠. 음원이라도 있다면 언제든 들을 수 있겠지만, 그런 것도 없습니다.
선생님은 어떤 분일까요? 전 선생님이 궁금해졌습니다. 6개월이 지난 시점에서 말이에요. 그래서 그저 기억 속 선생님의 행동과 말을 더듬어 유추해봅니다. 이 분의 음악은 어떤 형태일까요? 전 이 분의 어떤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배움이라는 소통 안에서 보이는 모습에서 가늠해 볼 뿐이죠.
음악에 어떤 거짓도 숨김도 꾸밈도 없는 정직함. 단단하고 강한 본인을 향한 믿음과 확신. 꾸준한 노력. 음악을 진지하게 여기며, 본인의 길에 한치의 망설임 없는, 그리고 이 길의 귀함과 소중함을 아는,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
제게 선생님은 이런 분입니다. 음악에 도전하고 즐길 수 있도록 가르쳐주시고 용기를 주신 고마운 분. 제게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세상을 열어주셨죠. 한 번의 연주로 그리움을 주셨고, 폭넓은 지식을 풀어 설명해주시면 존경과 동경이 꽃을 피우죠. 함께 악보를 펴고 음악을 이야기하고 배워가는 모든 시간이 즐겁고 소중해 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쉽습니다. 언젠가 다가올 이별을 미리 상상하면 눈물이 맺힐 만큼 가슴이 아려오는 건, 그래요, 그 날 보았던 빛에 눈이 멀었기 때문입니다. 항상 입안에서 맴도는 많은 말들. 아마 선생님께선 제가 들뜬 아이처럼 얼마나 많은 말을 걸고 있는지 모르실 겁니다.
혼자서 속삭이는 말들,
선생님께 음악을 배우는 게 좋아요. 그게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해보고 싶은 것도 많아요. 언젠가 제가 선생님의 음악을 오염시키지 않을 정도로 성장하면 연탄곡도 해볼 수 있을까요? 선생님께 후회가 남지 않는 제자가 되고 싶어요. 선생님도 저를 가르치시는 게 즐겁기를 바라요. 음악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비가 내리는 날은 수업 대신에 하루 종일 선진의 음악을 듣고 싶어요. 선생님은 어떤 광경을 보세요? 어떤 이야기가 그려질까요? 항상 그렇게도 전 궁금한 게 많아요. 귀찮을까요? 선생님의 음악을 듣고 싶어요. 시끄럽게 떠들며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하지만 전 입을 꾹 다물고 웃으며 그저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라는 한마디에 이 가득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습니다.
존경합니다. 닮고 싶어요. 동경합니다. 고맙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레 그 친구와는 연이 끊겼습니다. 그 친구도 어디선가 본인의 음악을 하고 있을 겁니다. 이 길을 걷다 보면 다시 만나게 될까요? 그때가 되면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 시간 못난 마음을 품은 것을 사죄하며 말하고 싶습니다.
"나도 이제는 네가 느꼈던 그 마음 알 것 같아. 동경하고 고마워하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언제나 자랑하고 싶은 선생님을 만났어."
라고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