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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비타스 Feb 07. 2022

Andante e Cantabile

산책

 오랜 팬데믹 상황에 익숙해진 걸까요? 제주도에는 관광객이 찾아왔습니다. 거리에도 사람 삼삼오오 걸어 다니죠. 올여름은 코로나가 기승을 부려도 작년만큼 삭막하진 않습니다. 뉴스에선 연일 관광객이 얼마나 입도했는지, 코로나 환자가 얼마나 늘었는지 보도하고 있지만, 사실 이제는 으레 나오는 일기예보 같습니다.




 여름에 접어들면서 어머니께서는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이제까지 가게를 하시느라 여유가 없어 못하셨던 성당 활동을 시작하셨죠. 게다가 처음 어머니께서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은 성당이라 느끼시는 특별함이 남다르신 듯합니다. 아이처럼 설레는 마음이 그대로 전해져 저도 덩달아 기뻤습니다.




 그래서 자주 구서귀포로 나가셔야 하니, 수업 가는 길은 어머니의 도움을 받기로 했죠. 어머니께선 미사를 빠지고 수업에 데려다주신다 하시지만, 저는 어머니의 수고가 죄송해서 수업이 있는 날이면 아침 미사 시간에 맞춰 나갔습니다.



 성당 아침 미사 시간은 10시. 제 수업시간은 11시. 시작 시간은 10시라 해도,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으로 인해 미사는 전체 좌석의 30%만 참석이 가능했으므로 넉넉하게 9시 30분쯤 도착할 수 있도록 서둘렀습니다. 미사 시간과 수업 시작 시간 차이가 많이 났지만 저는 내심 이 시간을 즐겁게 생각했습니다. 제 즐거움과 별개로 어머니는 걱정이 많으셨지만요. 코로나로 느긋하게 머무를 곳 없는데 일찍 와서 고생을 시키는 것 아니냐시며 말입니다. 절대 아니라고 단단히 설득시켜드렸지만, 왠지 고마우면서도 미안해하시는 듯합니다. 그저 이럴 땐 호들갑을 떨며 설득하기보다 모른 척해드리는 게 못난 딸이 생각하는 배려입니다.




 잠시 들리는 성당은 제게도 고향 같은 곳입니다. 저 또한 여기서 첫 영성체를 했습니다. 당시에는 돌로 지어진, 마치 귤 창고를 닮은 형태의 작고 아담한 성당으로, 성당이라기보다 공소에 가까운 분위기를 가진 곳이었습니다. 마당이 넓어서 미사가 끝나면 뛰어다니며 놀았고, 종탑 밑에는 아담한 놀이터도 있었습니다. 미사가 끝나면 교리를 받고 작은 종이 한 장 받았는데, 이건 '은총 티켓'으로 1년에 한 번 은총 시장이 열리면 화폐로 쓸 수 있는 유용한 것이었죠. 집에 돌아갈 무렵이면 신부님께선 성당 앞에서 기다리다 제 또래 아이들에게 땅콩사탕을 하나씩 주셨습니다. 슈퍼에 가면 파는 특별난 것 없는 사탕이 신부님께 받으면 더 기쁘고 소중했습니다. 신부님의 수단 주머니에서 나오는 사탕이 마르지 않는 샘물 같아서 신부님의 주머니 속엔 분명 사탕을 무한으로 만들어내는 신비한 것이 있을 거야 하고 상상하기도 했죠. 지금은 다시 성당을 지어 옛 정취가 사라졌어도 그 시절부터 하얗게 웃고 계시는 성모님이 자리에 남아 두 팔 벌려 반겨주시니 마냥 서운하다고만 할 순 없습니다.




 미사에 참석하지 않아도 성모님께 잘 다녀오겠노라 꾸벅 인사하고, 귀에 이어폰을 낀 채 거리로 나갑니다. 성당은 위치가 좋습니다. 이중섭 거리도 가깝고,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내려가면 천지연 폭포와 세연교를 갈 수 있죠. 위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작가의 산책로가 나오는데 여기는 사람이 적고 폭포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이어폰을 빼고 자연의 소리를 듣기에 좋습니다. 하지만 전 오래된 길을 선택하죠. 특별한 이유는 없습니다. 여기가 경사가 그나마 완만합니다.




 스튜디오까지 일직선으로 난 길은 제가 어릴 적 잠시 살았을 때부터 존재하던 오래된 길입니다. 그 시절에 보았던 음식점은 이제 사라져 낯선 거리가 되었는데, 그 시대를 수줍게 품어 향수만은 남은 느낌이 좋습니다.




 여름 내내 들었던 노래는 마우리치오 폴리니가 연주한 바흐 평균율 1부입니다. 노래는 약 2분 정도.  짧지만 음이 단아하고 편안합니다. 그래서 멍하니 듣다가 이어폰이 빠지면 음악 속 세상과 현실의 괴리감이 소름 끼칠 정도로 체감되죠. 화려하고 별난 기교는 없어도 충분히 소박하고 평안해서 좋습니다. 들뜨고 긴장되는 마음을 진정시키기에도 안성맞춤이죠. 가장 좋아하는 트랙은 2번. Fuga C major입니다. 첫 도입부에 나오는 폴리니의 목소리를 따라 저도 허밍으로 따라 부르면 그 음을 따라 깔끔하고 정제된 피아노 선율이 쌓이죠. 그럼 그 순간 '이 사람은 정말 피아노를 사랑하는구나'하고 저도 괜스레 마음 설레며 그의 마음조차 닮고 싶어 집니다. 




 제주도의 여름 공기는 바다 습기를 머금어 무겁고, 바람도 물에 젖어 눅눅합니다. 더위에 약한 저는 터덜거리는 걸음으로 거리를 올라가는데 땀이 송글 거리며 흐릅니다. 그게 부끄럽게 느껴집니다. 마스크라도 벗으면 숨이 좀 쉬어질 듯한데 그러지도 못하니 코로나만 원망스럽습니다.


 성당에서 스튜디오까지 걸어서 약 30분. 사실 시골에서 걸어서 30분 거리는 먼 거리도 아니죠. 가게도 보고 지나다니는 사람 구경도 하며 도착하면 10시 25분 정도 됩니다. 작은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 스튜디오에 도착하면 1층에서 살짝 이어폰을 빼 소리를 들어봅니다. 피아노 소리가 난다면 다른 분의 수업이 진행되고 있으니 들어가지 않고 계단에 공책을 깔고 앉아 악보를 펴고 손가락만 가볍게 움직여봅니다. 귓가에선 바흐의 노래가 나오니 움직이는 손가락과 들리는 음색은 달라도 벌써 예술가가 된 기분에 살짝 웃음이 나옵니다. 그러다 잠시 손가락을 멈추고 달콤한 향기를 따라 시선을 굴려봅니다.




 스튜디오의 옆집은 작은 대문을 가진 2층 집인데 정원을 예쁘게 꾸미셨습니다. 여러 나무가 울창하게 자리를 잡았는데 이 계절에 가장 눈길을 끄는 건 비파나무입니다. 여름 내 비파가 탐스럽게 열린 것을 보니 침만 꼴깍하고 넘어가는 겁니다. 여기까지 걸어왔으니 새콤 달달한 과즙 팡 터질듯한 과일이 얼마나 먹음직스러운지, 그 욕구를 누르는 게 또 마음 수련하는 일입니다.




 바람은 불고, 달콤한 향기, 소금기 머금은 향은 그 달콤함을 증폭시키고 계단 벽에 기대 눈을 감으면 피아노의 선율은 다음 곡, 또 다음 곡으로 이어가는데 그게 참 좋습니다. 어떤 수식어, 어떤 표현도 필요 없죠. 입으로 금붕어처럼 뻐끔거립니다.



 "좋다~"



 하고 말입니다. 이대로 잠이 들어버릴 듯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 사람 인기척에 놀라 벌떡 일어나 아무 일도 없던 듯 주변을 정리합니다. 그리고 괜히 도도하고 과묵한 표정으로 먼저 사람을 내려보내고 계단을 오릅니다. 표정은 그렇게 굳어도 마음은 연한 핑크빛. 문을 열면, 저 작은 현관문을 열면 반겨주시는 분이 계시겠네요.





 "어서 와요. 덥죠? 여름 너무 힘들지 않나요?"


 "안녕하세요. 그렇네요."




하며 마스크 밑으로 숨겨지지 않는 웃음을 지어봅니다.




수업이 시작되네요.

참 좋은 날,

참 좋은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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