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주의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로는 ‘사물이나 현상은 존재하지 아니하고 인식되지도 아니하며 또한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아니한다고 주장하는 사상적 태도. 동양의 불교나 노장 철학과 서양의 소피스트에서도 보이며, 니체가 이를 현대적 의미로 심화하였다. 그는 인간이 만든 신(神)을 인간 이상으로 신봉하면서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하여 삶의 존재 그 자체를 의심하면서 기성 질서와 기성 가치 체계의 붕괴를 역설하였다.’
사전에서는 모든 사물과 현상은 존재, 인식,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모든 사물과 현상(존재, 인식, 가치)은 삶에서 오는 것이기에, ‘삶의 허무’(또는 삶의 가치에 대한 허무)를 중심으로 허무주의를 말해보겠다.
‘삶의 허무’는 두 가지 책의 내용으로 다루어 보려 한다. ①다자이 오사무 - ‘인간실격’ / ②마루야마 마사오 – ‘일본의 사상’, 이 책들이 삶의 허무에 관해 잘 알려준다고 생각해 선정했다.
①‘다자이 오사무 - 인간실격’은 다자이 본인을 제삼자로 생각해 쓴 글이다. 여기서 나오는 남자 주인공 ‘요조’는 다자이 본인이다. 실제로 다자이는 2차 세계 대전 당대 일본의 강함과 패망을 직접 목격했다. ‘인간실격’에서 삶의 허무가 느껴지는 이유는 ‘다자이는 2차대전을 겪었고, 패망 이전과 이후의 삶이, 그의 공황적(恐慌的) 인생 배경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인간실격’은 이번 주제와도 부합돼 이 책을 선정했다.
②‘마루야마 마사오 – 일본의 사상’에서는 말 그대로 일본의 사상에 관해 이야기한다. 간략하게 이야기하자면 ‘일본사(日本史 또는 일본정신사)는 충분한 논쟁의 역사적 축적 없이 동서양의 종교, 철학 혹은 사상의 수입을 통해 전개되고 있기에 마루야마 마사오는 ‘정신적 잡거성’이라는 말로 일본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봤다.’ 이러한 흐름으로 보았을 때 1945년 패전 이후, 거품경제 이후에 왜 허무주의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음은 아마 정치적 허무주의와 연관돼 있을 것이고, 정치와 삶은 밀접한 관계에 있기에 이 책을 선정했다.
일본과 한국은 비슷하면서 다른 동양사상의 문화권이다. 한국은 ‘일본의 10~20년 전의 상황과 비슷하다.’라는 말처럼 필자가 생각하기에 20세기 이후 흐름(패션, 고령화 사회, 경제, 젊은이들의 문화생활 등등)을 생각했을 때 소름 끼치게 일본과 한국은 유사하다. 실제로 15~16년도에 나온 기사를 보면 한국의 경제가 20년 전 일본과 같다는 말도 나온다.
‘일본의 허무주의는 무엇인지?’ ‘왜 생겨났는지?’와 같은 그들의 허무주의를 이해한다면, 한국사회의 허무(虛無)를 어느 정도나마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이 글을 통해 허무주의와 현대사회의 대한 양질의 생각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
일본의 허무주의(거품경제 이전)
일본의 허무주의는 언제 시작됐을까? 아마 2차 세계 대전 이후(1945년)일 것이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서양의 문물과 문화 받아들인 국가였다. 서양 문물과 문화를 잘 쓴 덕일까? 그들은 거의 모든 전쟁에 승기를 잡았다. 러일전쟁, 중일전쟁에서 승리 한국의 일제강점기 등 그들은 무서울 게 없었다. 45년 이전까지 일본은 세계 강국 중 한 곳이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과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투하된 인류 최초의 원자폭탄 폭격으로 인해 그들은 패배와 동시에 패망하게 됐다. 패망과 동시에 일본은 근 20년 동안 불황의 시기를 겪게 된다. 국책 사업으로 성매매업소를 실행하고 , 미 군정 체제에서 오래 머물러 자신들의 것들을 검열당하기도 했다. 이런 점뿐만 아니라 에도시대의 흐름, 사무라이 정신, 할복 문화를 짐작해 보았을 때 일본의 ‘정신’을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특히 할복 문화는 동양 삼국중 일본만 가지고 있는 정신이다. 할복은 죽음이 최고의 무용으로서 권장되고, 죽음까지도 주군과 함께한다는 충성이 강조되는 가운데 탄생했다. 이처럼 ‘개인’보다 ‘집단의 최고 권력자’를 우선시하는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이상하다.
“이슬로 와서 이슬로 사라지는 나의 몸이여, 나니와(오사카)의 일은 꿈 속의 꿈이로다." 살육의 삶 속에서 생겨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시는 일본의 전통적 ‘삶의 허무’를 이해하기 좋은 예시다. 이처럼 쇼와시대 일본 문화 + 2차 세계 대전 이후 패망은 일본의 ‘허무주의’와 접점이 많다.
일본은 자신들이 계속 승리할 줄 알았지만 결국 2차 대전에서 패망했고, 이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됐다. 당대 그들은 삶의 목적이 생존 이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가까스로 연명하는 생활, 사라지거나 굶고 있는 주변 사람들, 국가의 성매매 사업, 미 군정의 개입으로 주권 자체를 박탈당할 때 삶의 가치는 무의미했을 것이다. 무의미한 삶, 가치 없는 삶, 연명하는 생활, 개인이 발버둥을 쳐도 나아지지 않는 생활은 그들을 ‘허무’로 몰아넣기 쉬운 환경이었다.
1.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서 알아보는 일본의 허무주의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책 자체는 위에서 말한 일본의 허무주의와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없다. 하지만 다자이는 패망 이후의 사회상에 실망과 분노를 느끼고 새로운 문화와 표현을 갈망했고, 패전 후 다자이의 문학은 ‘무뢰파 문학’, ‘퇴폐주의 문학’으로 불리며 일본 사회를 비판하고 조소했다. 이처럼 ‘인간실격’은 단순히 다자이의 허무함에서 만들어진 책이 아니라 당대 일본 사회의 ‘허무’를 비판했을 것이다. 다자이의 삶을 제삼자로 생각해 만든 글이기에 자기반성에도 충분한 글이며, 그의 공황적 세계관을 이해하기 좋다. 지금부터는 ‘인간실격’의 대표적인 문장을 통한 삶의 허무를 알아보겠다.
①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아마 이 첫 문장이 다자이의 자기반성에 시발점이다. 어렸을 때부터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남자 주인공 ‘요조’는 공황(恐慌) 그 자체에 놓여있었다. 요조는 어렸을 적부터 내적 공황에 자주 빠졌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고민을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을 향해 본심을 얘기하는 게 무서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서움은 일본의 ‘와(和) 문화’를 떠올리게 했다. ‘와[和] 문화’란 '조화'를 나타내는 말로 일본 사람들이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전통 문화다. 벼 화(禾) 자와 입 구(口) 자가 합쳐진 형상으로 '사람들이 서로 밥을 나눠 먹는다.'라는 뜻을 내포한다. 상부상조하고 단체가 협동을 이루어야 하는 문화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와 문화’에는 이면이 존재한다. “화(和)를 강조해 타인에게 신세지고 폐를 끼치는 행동을 수치로 여겨 내적으로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하며 타인으로부터의 경계를 받지 않으려는 도덕과 윤리를 지키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강조하고 있다. 근면, 성실, 신용이 지켜지지 않으면 결국 무리에게 미움을 받아 화합하지 못하고 집단 따돌림을 당한다고 생각한다. 내면을 억제하고 살다보니 자연스레 개인주의가 팽배해 다소 폐쇄적인 면도 보이는 듯하다.”
‘요조’의 어렸을 적 내적 공황과 ‘와 문화’는 연관성이 있다. 타인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되니 자신의 고민을 내면을 숨기고, 내면을 숨기다 보니 폐쇄적일 수밖에 없다. 결국, 이 문장은 ‘와 문화’를 비판적으로 이야기 한 것이다.
예전에 스쳐 지나가듯 ‘일본인들이 자기표현능력이 부족해 정신과 상담을 받는 사람이 많다.’라는 기사를 봤다. 이를 보았을 때, ’와 문화’의 영향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처럼 ‘와 문화’는 현대에는 너무 구세대적인 문화방식이며 개선될 일본 사회의 문제점이며, 다자이는 ‘요조’를 통해 이러한 일본 사회의 문제점을 짚은 게 틀림없다.
누군가한테 자신의 고민을 말하지 못하는 삶, 내면을 억제하는 삶, 타인에게 기댈 수 없는 삶, 결국에 이러한 삶은 개인을 망가트린다. 이러한 점은 개인의 삶을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서 성기훈이 강새벽에게 “원래 사람은 믿을만해서 믿는 게 아니야, 안 그러면 기댈 곳이 없어서 그런 거지.”라는 대사가 떠올려진 문단이었다.
② “무저항이 죄입니까?
“무저항이 죄입니까?” 이 말 자체가 필자가 생각하기에 ‘인간실격’ 전체를 관통하는 문장이며, 크게 보았을 때 ‘삶의 허무’와 부합된다. ‘요조’는 타인에게 반항하지 않은 삶을 살았다. 타인의 의견대로, 순리대로 삶을 살아왔다. 그는 일생을 저항하지 못했고, 저항하지 못함이 계속 쌓이고 쌓여 결국 그를 파탄으로 몰았다. “저항하지 않음도 죄인가?”라는 의미는 ‘와(和) 문화’를 비판한 대목이다. ‘와 문화’는 좋게 말하면 이타적이며 협동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타인에게 순종적이다. 다자이는 이 점을 꼬집었다.
필자가 이 문장이 크게 보았을 때 ‘삶의 허무’와 부합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일본은 순종적인 사람은 원하고, 이런 식으로 사람들을 양성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점은 ‘요조’에게서도 볼 수 있었다. ‘요조’가 정신병원에 갇히게 된 순간까지, 그의 인생은 타인의 선택으로 좌지우지되다 끝나게 됐다.
어른들과 국가에 공경과 충성을 다 하면 좋은 행동이라고 했다. 타인에게 맞춰주는 행동은 배려 있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것이 과도해지면 타인의 선택으로 자신의 삶이 정해지고, ‘나’의 삶의 의미는 없어진다. 이와 반대로 행동하면 따돌림을 받거나 배척당한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당대 젊은이들과 필자가 ‘인간실격’에 열광한 이유는 사회의 이중적인 모습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단체에서 벗어나는 행위, 단체에 복종하는 행위 둘 중 하나를 선택해도 결국 ‘나’는 파멸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선택은 할 수는 있을까…?’ 슬픈 일이다. 둘 중 무엇을 선택해도 ‘자신’이 파멸되는데, 이러한 선택을 밖에 없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 유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삶은 空, 파멸”이라는 말이 절로 생각났다.
③ “저는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백발이 눈에 띄게 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살 이상으로 봅니다.”
‘요조’와 ‘다자이 오사무’의 최후를 말한 문장이다. 필자는 ‘인간 실격(미니북)’을 2019년에 처음 읽었는데, 이 책 맨 뒤 문단에서 다자이 오사무를 연구한 학자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요약하자면 학자는 인간실격에서 “‘저는 올해로 스물일곱이 되었습니다. 백발이 눈에 띄게 늘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흔살 이상으로 봅니다.’라는 문장을 보았을 때 다자이가 자살할 것을 예측했고, 실제로 다자이는 자살했다.”라고 서술했다. 이처럼 ③번 문장은 ‘다자이’와 ‘요조’의 최후를 보여주는 문장이다. 과연 ‘다자이’와 ‘요조’의 최후만 보여주는 문장이었을까?
필자가 생각하기에 ③번은 ‘삶의 허무’에 깊이 빠진 사람에 최후를 보여준 문장이다. ‘요조’의 어린 시절부터 백발이 될 때까지 삶을 보면 내적, 외적으로 전혀 순탄하지 못했다. 자신의 의견을 표출하지 못하고 내적으로 갈등한 모습, 술과 마약에 중독된 삶, 여자들을 이용하기만 한 삶에서 내적 갈등, 마지막 부인이 강간당하는 모습을 보았던 일, 사람들에게 배신당해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일까지 참으로 어지러운 삶이었다. 필자는 단언컨대 ‘요조’의 일생은 100% 이타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일본 사회가 원하는 인간상, 과도한 이타적인 삶, ‘와 문화’의 삶의 끝은 결국 개인의 죽음으로 몰고, 죽을 수밖에 없음을 다자이는 예언했다.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에서 알아보는 허무주의를 마치며
보통의 사람들이 ‘허무주의’를 생각하면 절망, 퇴폐, 조락(凋落), 패가망신 등을 떠올린다. 하지만 ‘허무주의’는 단순히 “이생은 너무나도 허무합니다. 그러니 죽는 게 낫습니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허무주의’의 의미는 우리의 삶에 각성과 반성을 요구한다. 사회가 시키는 데로 살고, 사회가 요구하는 데로만 살고, 타인의 선택으로 삶을 살고, 자신의 삶이 없다면, 그 끝은 결국 패망이라는 교훈을 남겨준 진정한 휴머니즘이다. 허무주의를 통해 우리가 사는 사회가 진짜 ‘순기능’만 있는지? 나는 누구인지? 개인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최선을 다할 수 있는지, 남의 말대로만 움직이고 가만히 있으면 어떤 최후를 맞이하는지 교훈을 준 ‘다자이 오사무 – 인간실격’은 오늘날에도 인기 있는 이유가 있다.
다자이의 희곡 「겨울의 불꽃놀이」(1946)에서 “졌다. 졌다고들 하지만 나는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해. 망한 거지. 멸망한 거라고. 일본 구석구석까지 점령당하고 우린 한 명도 빠짐없이 포로인데. 어쩜 그걸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고, 시골 사람들은 바보야.”라는 부분이 있다. 이러한 부분은 다자이가 전쟁 전후 망가진 일본 사회를 제대로 보고 지적했기 때문에 그가 주목받을 수밖에 없다.
자기반성, 갈등, 절망, 부조리에 대한 인식은 현대 사회에서 필요한 사항이다. 이러한 부분을 다자이 오사무의 글을 통해 직접 느꼈으면 좋겠다.
2. 마루야마 마사오 – ‘일본의 사상’에서 알아보는 일본의 허무주의
이 문단에서는 일본 사회의 흐름 전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서는 단순히 2차 세계 대전을 통한 허무주의를 알아보았지만, 이 문단에서는 일본사의 전체적인 부도덕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일본의 사상’을 전OO 교수에게 추천받아 군대에서(2020년) 읽게 됐는데 이 책이 너무 어려워 전 교수에게 메일로 물어보았다. 전 교수님은 필자에게 “일본정신사 혹은 일본사는 논쟁의 역사적 축적이 없이 동서양의 종교, 철학 혹은 사상의 수입을 통해 전개되고 있기에 마루야마 마사오는 ‘정신적 잡거성’이라는 말로 일본정신사 혹은 일본사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한국의 사단칠정론이나 인성물성론 그리고 심론 등은 다소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시간의 축적을 통해 전개되어 갑니다.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가 일본에 정착되어 학문적으로 축적된 적이 있던가요? 일본정신사와 일본사는 ‘만들어진 전통’입니다.”라고 답해주었다.
일본은 역사적 논의나 학문적 축적 없이 마구잡이로 동서양의 사상을 수입했다. 필자는 이러한 점과 책의 세부내용에서 일본은 자처한 ‘정치적 허무주의’를 느꼈다. 이러한 정치적 허무주의는 곧 ‘삶의 허무’와 관련성이 높다. 필자는 정신적 잡거성, 서민들의 무한책임과 지배층의 무책임을 통해 ‘삶의 허무’를 알아보고자 한다.
① 정신적 잡거성
‘정신적 잡거성’은 마루야마 마사오의 사상을 가장 잘 보여준 단어이다. 우선 사전적 의미로 정신적 잡거성을 이해해보자. “정신에 관계되는 것이 여러 가지 섞인 성질”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신은, 국가 정신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국가 정신이 여러 가지 섞인 성질’을 ‘정신적 잡거성’이라 말 할 수 있다. ‘이게 왜 비판적이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루야마의 주장을 좀 더 설명해 보겠다.
마루야마는 ‘메이지 유신 이후 문명개화를 실시해 몇백 년의 배경을 가진 ‘전통사상’이 소갈머리도 없이 서구화의 거센 파도에 휘말려 버린 일.‘, “사상적 ’관용‘의 전통에서 유일하게 이질적인 것은, 바로 그런 정신적 잡거성의 원리적 부인을 요구하고, 세계경험의 논리적 및 가치적인 질서를 내면적으로 강제하는 사상.”,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를 ‘이론신앙’과 ‘대세순응’으로 생각한 일.’, ’수입된 사상과 전통의 충돌‘이라 주장했고, 이 말은 정신적 잡거성을 이해하기 충분하다.
일본의 수입된 사상은 지금도 해결된 사항이 거의 없다. 말 그대로 좋아 보이는 사상을 수입해 적용하기만 했지, 이에 대한 적절한 논의가 많지 않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문명개화를 실시해 본인들의 ‘전통사상’을 뭉개버렸지만, 표면적으로만 사라고, 이면에는 남아있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수입된 사상을 논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전통사상’과 충돌이 있었다. 역사적 축적 없이 당대 수입된 진화론, 변증법, 마르크시즘, 기독교 등등이 시대착오를 불러왔고, 이로 인해 수입 사상과 전통 사상의 충돌은 당연하다고 마루야마는 주장했다.
이러한 역사를 가진 일본인데 그들의 ‘무 지성적 사상수입’과 ‘축적 없는 행위’는 정치적 허무를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일본인들의 삶을 허무로 몰아버린 ‘mental disease’의 원인이다.
② 권력층의 이기심과 허무주의에 관해서
근대 일본의 국체(혹은 국체 이데올로기)는 천왕(제) 중심의 국가체계였다. 다카시 데쓰야 교수는 일본의 국체 이데올로기를 ‘신화적 국가관’이라 말했다. 신화적 사고는 ‘주관과 객관에 대한 구별 없이 주어진 대상 그 자체에 들어가 그것과 하나가 되어 즉자적(卽自的)으로 파악하는 사고.’를 의미한다. 이를 보았을 때 다카시 교수가 말한 ‘신화적 국가관’은 위에서 말한 ‘정신적 잡거성’과 유사한 의미로 보인다.
‘일본의 사상’에서는 토론, 역사적 축적 없이 사상을 수입한다던가, 메이지 때 신분 해방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상하 관계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수입된 사상들은 전통 사상을 뛰어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사상이 잘 정리돼 있지도 않았다.
당대 존재한 천황제 파시즘(혹은 황권 중심주의)은 천황을 위한 것이 아닌 당대 ‘고위층과 지식인들’을 편하게 만든 방어적 수단이었다. 그 예시로 메이지 헌법 체제에 관한 이토 히로부미의 발상을 마루야마는 “사상적 = 일상적인 자유를 권력의 침해로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모든 권력체계의 정당성을 판정하는 근거를 국민들 스스로의 손에 확보해야 한다는 발상”, 일본은 근대에 관료적 사고와 로퍼적 사고의 악순환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사상의 수입만 의존하고 윗사람들 입맛대로 적용해버리니 잡거성만 심해졌다. 이를 보았을 때 전형적인 국민 책임의 관념이 보인다. 천왕 제 국가로 만들려다 보니, 당대 가부장제, 가족국가 이론들이 나오기 시작했다.(마루야마는 이 책에서 가부장제와 가족국가의 연관성을 이야기했다. 그는 "가부장제 가정은 아버지가 최고 권력자이다. 이 점을 가족국가 이론에 접목하면 결국 우리의 아버지는 천왕이 되고, 그가 최고 권력자이다. 이러한 점에서 당대 일본 사회는 가부장제로 분위기를 조성했다."라고 언급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은 신분제를 없애버렸지만, 제국주의적 형식과 재건을 노리고 있었고, 마루야마는 이를 비판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거품경제 이후의 일본은 피폐했다. 동양에서 ‘허무주의’ 문학이 가장 잘 발달 된 나라는 ‘일본’이라 생각한다. 일본의 ‘허무주의’는 쾌락이 지고, 절망이 떠올라서 나온 것이 큰 이유겠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과정이 있음은 분명하다.
도쿄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적 있는 레더러(E. Lederer)는 난바 다이스케의 섭정궁 저격 사건과 ‘천황의 사진’을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꺼내려다가 많은 학교 교장들이 목숨을 잃은 사실에 대해 ‘충격적인 두 사건’이라 말했다.
섭정궁 저격 사건의 경우 행위 자체보다도 오히려 ‘그 뒤에 오는 점’을 주목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자면 막연해서 끝간 데를 알 수 없는 책임을 치우는 방식, 그것을 오히려 당연하다고 여기는 무형의 사회적 압력은 레더러가 보기에 이채로운 광경이었다.
“‘천황의 사진’을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꺼내려다가 많은 학교 교장들이 목숨을 잃은 사실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교장의 죽음을 당연히 보고 있었고, 이는 일본의 천황제는 확실히 절대군주제만큼 권력 행사에 무자비해 보인다. 서구의 군주제와 제정(帝政) 러시아에서도 사회적 책임의 이 같은 존재 양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어느 쪽이 더 낫다를 말하는 건 아니다.”
여기서 일본의 87년도 헌법과 ‘지나친 우상숭배’ 사상체계의 숨은 문제점이 그대로 드러난다.
‘신민들의 무한책임, 절대군주제의 폐해, 천황 우상화 → 황권 중심주의의 위험성 → 하지만 겉모습만 황권 중심주의, 실체는 총리 중심의 내각주의’ 이를 보았을 때 신분 해방령 이후 제국주의적 형식과 재건을 보인 부정부패의 현실은 당대 일본 사회의 혼란을 주기 좋았다.
그리고 앞서 말한 일본의 거품경제 이후 고위층과 자본가들의 부정부패가 일본 전역에 알려졌다.(오노우에 누이 사건, 리크루트 코스모스 사건, 사가와규빈 사건, 이토만 사건 등) 물론 사건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파산하거나 법의 심판을 받았지만, 상류층의 부도덕함이 세상에 알려졌다. 서민으로서는 허무할 따름이다. '“부동산개발업체인 리크루트코스모스의 미공개 주식이 정계·관계에 헐값으로 양도된 사실이 1988년 드러났다. 이듬해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가 퇴진했다. 다케시타 정권을 이어받은 우노 소스케 정권 때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이 약진하면서 자민당은 참패, 과반 의석을 잃었고 이는 1993년 정권교체의 도화선이 됐다.” “1992년 택배회사인 도쿄사가와규빈에 의한 5억엔 불법 정치자금 스캔들이 일본을 뒤흔들었다. 이는 당대 자민당 부총재로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가네마루 신의 사직으로 이어졌다. 리크루트 사건과 사가와규빈 사건이 몇 년 간격으로 연달아 터지자 국민들의 자민당에 대한 불신은 1955년 자민당 탄생 이후 최고조에 다다랐다. 이를 이용해 당내 오자와 이치로 의원 등은 ‘정치개혁’을 내걸고 1993년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 불신임에 찬성, 당이 분열됐다. 결국 그해 7월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은 과반을 잃고 정권을 야당 연합에 내주었다.”'
위에서 본 리크루트 사건과 도쿄사가와규빈 사건의 경우 결국 국민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은 ’자민당을 뽑지 않음‘ 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법에 따라 심판될 따름이었다. 유죄 판결로 옥살이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 조치가 없었다.
국민들은 얼마나 분노하겠는가? 서민들은 하루에 수 시간을 일해 최저임금을 기준으로 좀 더 많게 적게 돈을 벌어서 살아가거나,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고위층들은 제도를 이용해 수억 엔을 쉽게 쉽게 벌고 있다. 위에서 말한 일본의 역사에 흐름이 ’정신적 잡거성‘의 흐름이었기 때문에 국민을 안일하게 본 것이다. 왜냐하면, 마루야마의 이론으로 보았을 때 일본 국민은 국가가 수용하면 ‘수용한 이유가 있겠지’, ‘전문가들이 알아서 해주겠지.’, ‘다 뜻이 있겠지.’라는 식의 방관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정신적 잡거성’과 ‘만들어진 전통’으로 나왔다.
아직도 현대 일본의 분위기는 근대와 다르지 않다. 입헌군주제를 표방한 총리 중심의 내각주의, 아직도 사회 통념인 ‘와 문화’, 노동 착취 및 구시대적 기업문화, 정치/역사 무관심한 시민들, 정해진 성 역할과 낮은 성 평등, 자민당의 장기집권을 꼽을 수 있다. 이런 점이 전부 근대의 사상에서 이어졌다.
일본의 거품경제 이후 허무주의는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삶’에서 왔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을 것 같은 환경, 어차피 정해져 있는 승자, 안 좋은 일이 있어도 어차피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 힘들게 살 미래가 보이니 포기하게 되는 마음은 근현대 일본의 ‘삶의 허무’를 잘 보여주는 문장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사토리 세대’의 인터뷰를 짜깁기한 유튜브 영상에서도 위에서 언급한 문장을 20~40대 사람들이 많이 이야기했다.
필자가 마루야마 마사오 – ‘일본의 사상’을 통해 정치적 허무주의를 이야기한 이유는 정치가 삶과 밀접한 연관성도 있지만, 일본사는 논쟁의 역사적 축적 없이 “만들어진 역사”이며, 전근대 정치인들의 부도덕함, 이러한 행위가 현대에 와서 결국 실질적으로 밑천이 다 드러남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기적인 정치인들의 뻔뻔한 행위, 하지만 사회 시스템이 순응체제이니 가만히 있거나 정치에 관심 없는 국민, 힘들게 살 미래가 보이니 포기한 ‘사토리 세대’는 ‘삶의 허무’를 보여주기 충분했다.
이러한 역사를 보았을 때, ‘논쟁의 역사적 축적이 얼마나 중요한지’, ‘대화와 토론의 장이 왜 중요한지’, ‘상호작용이 왜 중요한지’ 알 수 있다.
글을 마치며
이 글에서 말한 허무주의는 ‘이러한 부도덕한 허무함을 보고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각성하라.’라는 의미에 있다.
위에서 언급한 다자이 오사무의 경우나, 마루야마 마사오의 경우 일본 사회를 비판하였다. 마루야마의 경우 일본 사회를 비판하는 소재가 여러 가지지만, 다자이의 경우 일본 사회가 불러일으킨 ‘삶의 허무’를 이야기했다.
‘허무주의’는 단순히 허무(虛無)만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허무를 통해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각성시킬 수 있는 이론이라고 생각했고, 일본의 경우 허무를 잘 보여준 대목들이 많았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6·25 이후, IMF 이후 삶을 보면 허무함 그 자체였다. 이뿐만 아니라 관료들의 부정부패, 병역기피, 갑(甲)질 등등은 허무를 불러오기 딱 좋은 요소이다.
필자는 군대를 다녀왔다. 그런데 모 정치인 아들은 국적이 미국이라서 군대에 가지 않지만, 한국에 살고 있다. 필자는 내 집 마련이 꿈이다. 그런데 청담동의 8살 어린이는 본인 앞으로 건물이 3채가 있다. 필자는 집에 돈이 없어서 실용음악을 그만뒀다. 그런데 어느 돈많은 집 자제는 돈도 실력이라고 말하며, 실력 없이 돈으로 뭐든지 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이러한 일들을 보았을 때 정말로 허탈함을 느낀다. ‘나는 엄청나게 고생해서 이만큼 벌었는데, 쟤는 아빠가 사장님이라서 용돈을 내 월급만큼 받네?’라던가 SNS에서 있는 사람의 돈 자랑은, 돈 없는 자들에게 쓴맛을 체험시켜준다. 독자들도 이러한 경험해본 적 있을 것이다. 현대 사회는 노력해도 될까 말까 한세상인데, 누군가는 코에 손도 안 대고 코를 풀고 있다. 이럴 때 세상이 정말로 허무하고, 다 포기하고 싶어진다.
결국, 이러한 불평등한 현대 사회를 바로 보기 위해서는 부도덕함, 불합리함, 자기반성, 갈등, 절망, 부조리에 관한 통찰력은 필요하다. 결국, 이러한 인식은 ‘추(醜)함’을 어디까지 볼 수 있냐는 질문이다. 추함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아름다움으로 바꿔나가고, 추함을 통해 개인의 삶을 반성할 수 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최선이 무엇인지’, ‘왜 상호작용이 중요한지’ 알려주는 안목을 길러주는 ‘ISM’이 ‘허무주의’다. 허무주의를 통해 우리는 ‘비교하는 삶’이 아닌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 거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