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방학도 슬슬 끝나가는 8월이다. 읽고, 봐야 하는 작품은 많은데 몸은 하나다. 몸이 하나라서 욕심이 앞선다. 요즘은 책을 볼 때 하나의 작품만 많이 보는 것이 아닌, 대여섯 개 책을 꺼내 놓고 10~20페이지를 읽고 있다. 나름 좋은 방법이다. 책 읽는 방법을 바꾸고 싶은 독자분들이 계신다면 이 방법을 추천한다.
1.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14화를 보고.
정명석 변호사는 '행복 국수'를 먹고 싶어 했지만, 폐업한 가계를 보고 아쉬워했다. 아픈 정 변호사에게 '행복 국수'의 국수를 먹여주고 싶어 한 우영우와 한바다 동료들은 행복 국수의 사장님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서울로 돌아가기 직전까지 찾지 못했다.
그들은 돌아가기 전 '황지사' 주지 스님의 권유로 절의 국수를 먹게 됐다. 국수를 먹었을 때 행복 국수와 비슷함을 느낀 정 변호사는 '비슷한 것 같은데?'라는 의문을 제기했고, 우영우는 여태까지 모든 단서를 조합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요리사를 만나러 갔다. 실제로 절에서 국수를 만들어 주던 사람은 '행복 국수' 사장이 맞았다!
행복 국수 사장에게 정 변호사의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주겠다고 말해 설득한 뒤 그들은 '행복 국수'의 고기 국수를 얻어먹었다.
구하고자, 만나고자 하는 인연은 만나게 될 것이다. 만나지 못했다면 아직 시간이 허락해주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니 그 시간이 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버틸 수밖에 없다.
2.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를 읽고
최근 바흐친 - <바흐찐의 소설미학>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 있는데,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책에서 바흐친은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을 ‘다음향성’-다성악적-을 가지며 이야기할 때 “실상, 객관적이고 폐쇄된 형상들을 그리는 작가들에게 있어서 언어의 차별화와 언어로 주인공의 성격을 그리는 일은 다음향적인 작가들에게 있어서 보다 훨씬 큰 의미를 지닌다. 한 인물이 객관적이면 객관적일수록 그 인물이 말하는 담화의 모든 양은 점점 더 뚜렷해진다. 다음향적인 소설 속에서 언어적 다양성과 담화양식들에 의한 성격부여의 의미는 보존되긴 하지만 약해진다.”(바흐찐의 소설미학, 20p.)
바흐친이 리얼리즘을 중요시하고, 대화와 의사소통을 중요시한 것은 알겠으나 다음향성과 관련된 이론들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아 고민하고 있었던 찰나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를 읽고 어느 정도 이해가 됐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 대해 러시아의 문학이론가 미하일 바흐친은 ‘독백적 소설’과 대비해서 ‘대화적 소설’, ‘다성악적 소설’이라고 얘기했죠. 독백적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는 톨스토이입니다. 작가가 신적인 위치에서 작품의 모든 것을 다 지배하고 관장합니다. 그러니까 인물들을 마치 인형처럼 조종하죠. 당연히 작품의 주제는 항상 작가의 사상이나 이념으로 수렴됩니다. 이와 달리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에서는 작가가 인물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대등한 목소리를 갖고서 등장합니다. 작가와 인물이 지분을 똑같이 갖는다고 할까요. 그래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주제에 대해서도 독자들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어요. 작가의 생각은 알료샤나 조시마 장로의 편을 드는 것인데 작품에서는 이반 카라마조프 같은 인물이 대단히 매혹적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즉 소설만 읽어서는 작가가 어느 편을 들고 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203~204p, 필자가 굵게 처리함.)
이 파트를 읽고 나서 ‘내가 문학 이론에 정말 무지했구나.’와 ‘로쟈 선생은 정말 똑똑하시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바흐친의 ‘다성악적 소설’은 작가와 인물이 지분을 똑같이 갖는 소설이다. 그리고 작품의 주제가 작가의 사상이나 이념에 수렴되지 않는 소설이다. 그리고 주요 등장인물들이 대화를 통해 작품을 만들어가니 이는 ‘대화적 소설’이라 볼 수 있다.
작품의 주제가 작가의 사상이나 이념에 수렴되지 않고, 철저히 등장인물의 위주로 돌아가는 소설이니, 등장인물이 작가에게 놀아나지 않는다. 오히려 등장인물의 진행 때문에 작가가 더 곤란해질 수 있다. 그래서 ‘톨스토이 - <안나 카레니나>’ 작품 평과 달리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대한 평은 독자마다 갈린다.
루카치 - <소설의 이론> 또한 도스토옙스키론의 서론 격으로 쓰였다. 하지만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루카치는 현실에 집중한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굳이 문학을 통해 우회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188p.)
“이 책의 마지막 대목에서 루카치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단 한 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다른 세계에 속한다”고 썼습니다. (중략) 그는 소설에서 ‘본질은 시간과 함께 주어진다.’고 규정합니다. 세계의 본질을 시간 속에서 파악한다는 얘기입니다. 서시시는 무시간적 세계인 것과 달리 소설은 철저하게 시간적 세계입니다. 하지만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에서는 시간이 별 의미가 없어요. (중략) <전쟁과 평화>에서도 주인공 나타샤가 소녀에서 아이 엄마가 되기까지의 시간을 다루면서 그 안에서 인물들이 변화하고 성숙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니까요. 그런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는 시간이 변수가 되지 않습니다. ‘다른 세계’라고 볼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188p.)
실제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죄와 벌>은 작품 속 시간으로 보았을 때, 일주일도 안 돼서 끝나버린 작품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았을 때 시간적 세계에 맞지 않는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이라는 형식이 감당할 수 없는 내용을 소설에 구겨넣은 형국이니까”(188p.)
로쟈는 책에서 “이런 평가를 종합해보면 도스토예프스키라는 작가는 세르반테스 이후 잘 다듬어져온 소설의 미학적 형식을 존중하거나 준수하지 않은 작가”라고 말한다.
‘괜히 로쟈 선생님이 박사가 아니구나.’라는 생각과 나는 아직 많이 모자르다는 생각을 했다.
3.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고.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박완서 작가의 ‘소설로 그린 자화상’이라고 설명한다. 나는 이 소설을 읽기 전 <엄마의 말뚝1>을 읽었기에 박 작가의 어릴 적 상황을 대강 알고 있었다.
“종전과는 좀 다른 방법으로 글짓기를 해 봤다고 해서 내 소설기법에 어떤 변화의 계기를 삼아 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화가가 자화상 한두 장쯤 그려보고 싶은 심정 정도로 썼다. (중략) 교정을 보느라 다시 읽으면서 발견한 거지만 가족이나 주변인물 묘사가 세밀하고 가차없는 데 비해 나를 그림에 있어서는 모호하게 얼버무리거나 생략한 부분이 많았다. 그게 바로 자신에게 정직하기가 가장 어려웠던 흔적이라고 생각한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박완서의 이러한 말을 보고 정직하게 묘사하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했다. 소설로 풀어낸 자기 묘사는 ‘다자이 오사무 - <인간실격>’ 이후 처음이라서 기대했다.
어릴 적 기억은 <엄마의 말뚝1>에서 본 내용과 거의 다를 게 없었다. 좋았던 표현은 어릴 적 비애를 맛본 경험을 말할 때 “바람이 유난히 을씨년스럽게 느껴지는 저녁나절 동무들과 헤어져 홀로 집으로 돌아올 때, 홍시빛깔의 잔광이 남아 있는 능선을 배경으로 텃밭머리에서 너울대는 수수이삭을 바라볼 때의 비애를 무엇에 비길까. (중략) 가슴에 고인 슬픔이 눈물이 되어 흐르길 가만히 기다렸다.”(28p.)
개인적으로 “민감하다는 건 깨어지기가 쉽다는 뜻도 된다. (중략) 선한 사람 악한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사는 동안에 수없는 선악의 갈림길에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90p.)라는 문장에서 그녀의 연륜을 느낄 수 있었다.
소설을 읽다 보면 박완서의 모친이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왜냐하면, 모친이 ‘신여성’이라 생각한다. 당시 여성인 박완서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 내려간다는 판단은 아직도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물론 박완서의 모친께서도 옛날 사람들의 마인드가 있지만, 그녀가 ‘신여성’ 적으로 행동한 이유는 자식들 때문이다. -물론 박완서는 어머니에게서 독립하고 싶어 했지만.-
박완서의 삶이 궁금하다면 꼭 읽어보길 바란다.
4.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을 읽고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은 목차만 보아도 하루키의 글 쓰는 센스를 엿볼 수 있었다. 아직 초장밖에 못 봤는지라 많이 말할 수는 없지만, 하루키의 관점에서 글쓰기의 중요한 점을 쭉 적어보겠다.
“소설가는 왜 많은 것을 관찰해야만 할까? 많은 것을 올바로 관찰하지 않으면 많은 것을 올바로 묘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소설가의 역할은 마땅히 내려야 할 판단을 가장 매력적인 형태로 만들어서 독자에게 은근슬쩍(폭력적이라도 딱히 상관은 없지만) 건네주는 데 있다. 잘 아시겠지만, 소설가가(귀찮아서 혹은 단순히 자기 과시를 위해)그 권리를 독자에게 넘기지 않고 자기가 직접 매사를 이래저래 판단하기 시작하면, 소설은 일단 따분해 진다. 깊이가 사라지고 어휘가 자연스러운 빛을 잃어 이야기가 제대로 옴짝하지 못한다.”(19p.)
“우리 소설가가 철저하게 허구에 구애되는 까닭은 대부분의 경우, 분명 허구 속에서만 가설을 유효하고 콤팩트하게 쌓아올릴 수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중략) 가설의 행방을 결정하는 주체는 독자이지 작가가 아니다.”(20~21p.)
“소설가란 이 세상의 굴튀김에 관해 어디까지나 상세하게 써나가는 인간을 가리킨다.”(23p.)
“그러나 적어도 문학은 전쟁이나 학살이나 사기나 편견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거꾸로 그런 것들에 대항하는 무언가를 만들어내기 위해 지치지 않고 꾸준한 노력을 계속해왔다. 물론 거기에는 시행착오가 있고, 자기모순이 있고, 내분이 있고, 이단이나 탈선도 있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문학은 인간존재의 존엄의 핵을 희구해왔다.”(30p.)
“그러나 이야기가 끝나면 가설은 기본적으로 제 역할을 마친다. 막이 내리고 조명이 켜지고, 포개어 있던 고양이들이 눈을 뜨고 기지개를 피며 꿈에서 깨어난다. 독자는 그 기억을 부분적으로만 간직할 뿐 원래 있던 현실로 되돌아간다.”(26p.)-이 파트에서 하루키는 소설 집필을 ‘가설’ 만드는 것과 동일시 하며 설명한다.-
하루키는 사이비 단체에서 빠져나온 사람에게 메일을 받은 적이 있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그는 사이비 집단에서 몰래 하루키의 소설을 들고 가서 읽었는데, 그 이후로 생각이 번쩍 트여 사이비 집단을 나왔다. 지금은 평범하게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하루키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곳에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필자가 생각했을 때도 그가 하루키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곳에 있었을 것이다. 위의 인용 문장을 보았을 때, 독자에게 가설-소설-은 다 읽었을 때 그 기억을 부분적으로 간직하고 현실로 돌아간다. 가설을 통한 경험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많이 나서 그는 도망쳤을 것이다. 만약 하루키의 책을 읽지 못했다면, 그는 그곳에 있었을 것이다.
참고문헌
1.미하일 M. 바흐친. (1988). 바흐찐의 소설미학. (이득재, 역). 도서출판 열린책들.
2.이현우. (2020).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 (주)현암사.
3.박완서.(2002). 그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주)웅진닷컴.
4.무라카미 하루키. (2011).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이영미, 역). 도서출판 비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