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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rosh 직장인 Sep 06. 2022

난장이가 쏘아 올린 공 해석

학술서들로 해석해보자!


들어가며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을 선정한 이유는 소설 내용이 재미있기도 하고, 한국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아마 <난쏘공>은 고등학교까지 나온 사람들에게는 익숙할 것이다. 왜냐하면, 고등학교 국어시간 때 배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나오지 않은 필자는 대학교에 들어와서 위 작품을 접하게 됐다.

 조세희 작가는 난장이 연작을 그렸다. ‘철거 계고장’, ‘김불이’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한 <난쏘공>부터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로 끝을 맺게 된다. 모임원들이 <난쏘공> 하나만 보게 된다면 피상적인 해석밖에 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 또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피상에 의존하다 보면, 본질을 못볼 것이다. <난쏘공>에 관해서 작성할 때, <난쏘공>뿐만 아니라 ‘<난쏘공> 연작’을 꼭 보길 바란다.

 이번 <난쏘공> 글에서는 논문, 학술지, 해석, 비평서를 통한 해석을 할 것이다. 해석을 하는 이유는 문학에 대한 좀 더 넓은 시선을 갖길 바라기 때문이다. 문학은 한 시대를 묘사한다. 왜냐하면, 그 시대를 살고 있고 그것을 문학적으로 승화하기 때문이다.

 <난쏘공> 또한 마찬가지이다. “난장이와 같은 불구자의 모습을 통해 타자를 인식했던 조세희는 근대화과정의 양극화나 인간소외와 같은 유신독재의 당면 과제를 미학적 저항의 형태로 나타냈다. (중략) 1970년대 유신 독재라는 절대 부조리의 시기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응” 이처럼 조세희가 당대에 있었던 문제점을 몸소 느꼈기에 <난쏘공>을 집필한 것이다.

 문학비평으로 글은 쓴 이유는, “문학작품의 기본적 의미에 대한 이해, 기본적 의미 너머 심층적 의미에 대한 해석, 그리고 문학작품의 가치에 대한 평가로 이루어진다. 다음으로 이론비평은 문학(작품)의 본질과 기능에 관한 체계적인 이해를 시도하는 한편, 문학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평가하는데 필요한 용어나 개념을 다듬”기 때문과 그 시대를 살지 않은 or 그 시대를 다시 느끼지 못하는 학자들이 그 시대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될 수 있어 상당히 중요하다. 해당 시대를 잘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시대의 문제점을 이해할 수 있고,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비평은 인간에게 반성의 여지를 준다.

 서론이 길었다. 아무튼 이번 글에서는 논문, 해석서, 비평서를 기반으로 한 필자의 생각을 적어보려 한다. 재미있게 읽어주길 바란다.


1.  시대적 배경

 “자본가들이 공장을 세우고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것은 세계적인 현상이었고, 여기에서 일어나는 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 지배적 대립은 지주와 농민(소작농) 사이의 대립이었다. (중략) 산업화 이후에는 사회적 모순이나 대립구조가 동일하게 유지되지만 배역이 달라진다. 지주는 자본가로, 농민은 노동자로 변모한다. 한국은 1930년대에 이런 양상을 겪은 뒤 1950년 전쟁 때문에 폐허가 되고 그다음 재건을 거치며 공장들이 다시 들어선다. 1960년대에는 공장노동자가 60만 명이었다고 한다. 이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연작이 처음 쓰일 무렵인 1975년에는 265만 명 정도로 늘어난다. 15년만에 네 배 이상 성장한 것이다. 일방적인 노동계급 착취에 기반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1970년에는 전태일 분신사건이 일어난다. 산업화 초기인 1960년으로부터 딱 10년 만에 이런 비극이 벌어졌다. 이후 노동3권을 쟁취하려는 여러 사회적 움직임이 있었지만 노동여건은 쉽게 개선되지 않았고 이에 따라 노동문학이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한국에서 소설을 쓴다고 한다면 한국 사회의 지배적 현실이자 모순인 이 계급 문제를 다룰 수밖에 없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1970년대의 중요한 작품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이처럼 <난쏘공>이 왜 중요한 작품인지, 왜 이렇게 집필했는지 알려면 시대적 배경에 대한 이해는 필수다. ‘조세희 작가’는 당대의 현실이자 모순적인 상황인 ‘계급 문제’를 말하고자 <난쏘공>을 집필했다.


2.  작가론적 관점

 ‘조세희 작가’(이하 조 작가)는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1978)은 발간 이후 미학적 실험과 더불어 산업사회의 저소득층과 공장노동자 문제를 조명하는 소설로 주목을 받았다. “내가 이른바 우리 산업사회의 첫 세대”라며 작가 스스로 세대적 정체성을 표명”했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작가는 자신이 산업사회의 첫 세대라며 스스로 세대적 정체성을 표명했다. 이를 보았을 때 조 작가는 산업사회를 거쳐가는 한국의 문제점을 봐왔을 것이며, 그에 관한 문제점을 소설로 고발했다. 그리고“조세희에게 노동은 언제나 가난과 결합되어 있다. (중략) 특히 그의 관심은 쉼 없이 정직하게 노동을 하는 데도 왜 계속 가난할 수밖에 없냐는 질문으로 모인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갈려 나갈 것을 알면서도 산업 발전에 매진했을까? 그 이유는 산업화로 잘살 수 있을거란 관한 믿을 때문이었다. “가난은 나태함과 무능의 증표이며 노동을 통해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 산업 발전에 매진하는 ‘산업 역군’들이 품은 희망이었다.” 하지만 그 희망은 신기루에 불과하다고 조 작가는 보았다.

 첫 번째로 <난쏘공 연작>을 보았을 때, 김불이도 죽고, 큰아들도 사형을 받아 죽는다. 그리고 난장이네 가족들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회장 동생을 찔러 죽이지만, 이는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는다. 그 자리는 다른 누군가로 대체할 것이다. 물론 서사적인 원인에서 아쉬운 점이 있지만, 결국 조 작가는 달라지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두 번째로는 “조세희의 글쓰기는 일차적으로, 가난은 사라지거나 극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빈곤의 최전선으로부터 그려내는 일에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가난이 사라지거나 극복되지 않기에 ‘산업 역군’들이 품은 희망은 조 작가에 눈에 ‘신기루’에 불과하다.

 “이 문면에서 되물어야 하는 것은 ‘난장이를 죽이면 안 된다’는 또 다른 ‘나’의 초자아적 억압이다. 난장이의 죽음을 둘러싸고 둘로 분열된 ‘나’의 갈등, 즉 ‘죽을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살아야만 하는’ 난장이의 모순이란, 산업화 사회에서 사랑과 희망을 말해야 했던 작가 조세희의 곤경을 보여준다. ‘가난’의 극복이 사회적인 과제로 대두되는 1970년대적 특성을 염두에 둔다면, 산업 발달의 조류에 편승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측과 도덕적인 가치를 앞세워 비 인간적 산업화를 저지하려는 측의 팽팽한 갈등이란 자연스러운 상황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조세희가 문제 삼는 것은 이러한 갈등이 흑과 백, 적군과 아군처럼 뚜렷하게 상반된 두 개의 입장으로 나뉘지 않고 하나의 개체 안에 공존한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조세희 문학의 한계는 ‘이분법적 선악’과 ‘모더니즘문학이 갖고 있는 문제점’이 있다. ‘이분법적 선악’의 경우 노동자계급의 사람들은 항상 약자로 취급한다. 항상 당하기만 한다. 그리고 자본가는 영악해서 노동자계급의 사람들을 등쳐먹기 바쁘다. <난쏘공>을 예로 들면, ‘자본가’의 꾐에 넘어간 난장이 가족들은 매매 계약서를 쓴다. 영희는 자신의 집 매매 계약서를 돌려받기 위해 한남자에게서 순결을 잃었다. 이러한 문장만 보아도 참으로 이분법적이다. 자본가는 악하고, 노동자는 어리숙하고 착하다. 그래서 이분법적이다. 물론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작성한 조 작가의 심정과 의도는 이해하지만, 이분법 자체가 ‘한쪽에만’ 힘을 실어주는 것이기에 바람직하지 못하다.


다음으로는 ‘모더니즘문학이 갖고 있는 문제점’이 있다.

 “문체는 작가가 어떤 중요한 문제와 대결하는 데 있어서 활용할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다. 양날의 칼일 수 있기에 작가 자신도 다칠 수 있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1970년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였지만 이 작품이 지닌 아름다운 문체 혹은 생소한 형식으로 인해 노동자 독자들이 얼마나 읽고 이해했을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작품이기 때문에 연구자들은 이 작품을 상당히 좋아한다. 정확한 주제의식이나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들어오지 않으니 연구 대상이 된다. 그런데 정작 이 작품이 다루고 있는 대상, 즉 도시빈민이라든가 공장 노동자에게는 이 작품을 읽고 소화하는 것이 상당한 고역일 수 있다. 그것이 모더니즘문학이 갖고 있는 문제점이자 한계라 할 수 있다.”

 조 작가의 글은 ‘‘억압받고 힘든 노동자를 소재로 쓴 글’인데, 정작 노동자들은 이 작품을 읽어서 소화하기 힘들다. 오히려 ‘연구자들이 더 좋아하는 작품’’이란 소리다. 백낙청 또한 “노동자문제를 다루면서도 노동자들은 읽기 어려운 지식인 소설”이라고 언급했다. 이러한 견해는 “난장이 연작을 노동문학의 ‘미달형식’으로 평가하는 대표적 사례라 할 것이다.” 그리고 ‘신경향파 문학’-“신경향파가 등장한 시기를 대략1920년대 초반 중반부터 1927년까지로 본다. (중략) 이 작품들은 주로 살인, 방화의 장면으로 끝난다. 지주의 집에 불을 지르고 지주를 죽이고 자신도 죽거나 도망간다. 분노는 표출하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므로 단발성으로 끝나는 기분풀이밖에 되지 않는”문학이다.- 처럼 <난쏘공> 또한 단발성으로 끝나는 기분풀이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난쏘공 연작>이 중요한 이유는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씨의 병>에서도 보여주듯이 이 시스템에는 안과 밖에 없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제일 처음에는 가장 밑바닥에 있는 노동자들을 괴롭힐 것이다. 그다음에는 중간층을 위협할 것이다. 마지막에는 자본가들을 집어삼킬 것이다. 이렇게 사회 전체의 구조적 메커니즘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모순은 노동자계급만의 불행에서 끝나지 않는다. 중산층까지 궤멸시키고, 그다음에는 자본가에게까지 미칠 수 있다. 자본주의에는 외부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조세희의 문제의식이다.

 “자본주의 경제로의 전환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일련의 플랜과 함께 강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중략) 노동자를 계속 붙들어 두기 위해서는 우선 충분한 임금을 주면 안 된다. (중략) 이 작품에서도 난장이인 아버지는 물론 3남매와 어머니까지 일을 하지만 5인 가족이 벌어도 최저생계비에 미달한다. 끊임없이 적자에 허덕이고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노동자들은 일터에 나가지 않을 수 없다. 수익을 최대화하기 위한 자본의 노하우이자 관리 방식이다.” 조세희는 이러한 부분까지도 꿰뚫어 봤다. 이런 방식이 항상 용인되진 않는다. 그래서 큰아들 김영수가 은강그룹 회장 동생을 죽인다. 하지만 “일시적인 분노를 표출한다 해서 구조를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계급문학이라 보기 애매하다.

 어찌보면 자본주의의 모순과 자본주의 시스템은 안과 밖이 없다는 것을 깨우친 조 작가는 작중 ‘김영수’가 은강그룹 회장 동생을 죽이는 것은 자본가에게 자본주의의 위협이 덮쳐올 수 있다는 암시일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의 마지막 부분에게 튀어오른 가시고기들에게 몸이 찢기고 상처가 난 경훈의 꿈은 ‘자본주의의 위험성, 모순, 위협은 자본가에게도 닥칠 수 있다.’를 암시했다.


3.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텍스트 해석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장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옳게 보았다. 아버지는 난장이였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는 것 하나만 옳았다. 그 밖의 것들은 하나도 옳지 않았다. (중략)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 (중략)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80p.)

 사람들은 아버지를 보았을 때 ‘난장이’ 하나의 점만 옳게 보고, 그 이외의 점은 옳게 보지 않는다. 이는 사람들이 피상적인 것만 본다는 의미다. ‘난장이’는 난장이로서 존재한다. 이 존재는 피상이다. 하지만 그 외의 내부 요인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에서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앞의 책, 80p.) 이러한 문맥을 보았을 때 사람들은 ‘난장이 다섯 식구의 지옥’을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난장이라는 점만 생각한다. 우리의 삶 또한 마찬가지이다. 타인을 피상적으로만 생각하고, 타인에게 무감각하다. 왜냐하면, 타인은 ‘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천국에 사는 사람들은 지옥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 다섯 식구는 지옥에 살면서 천국을 생각했다.”(앞의 책, 80p.)

 이 부분은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과 유사하다. <안나 카레니나>에서도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 불행하다.”라고 말한다. <난쏘공>과 <안나 카레니나>의 동일한 점은 소설의 전체가 앞서 말한 문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작품의 대략적인 내용과 주제까지 암시해주는 문장으로 볼 수 있다. “소설의 초점은 물론 불행한 가정들에 맞춰진다. 행복한 가정은 엇비슷하기에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소설의 재미는 무엇보다 남들의 가지가지 불행한 가정사를 읽는 재미이다.” 불행한 가정과 대사를 보았을 때 <안나 카레니나>의 문장과 상당히 유사해 보인다.


  81p를 보게 된다면 ‘철거 계고장’이 눈에 띈다. “이 작품은 이례적으로 서사 안에 공문서들까지 삽입하고 있다. 철거 계고장, 철거 확인증 등이 전부 동원되고 있다. 이것은 새로운 서술방식이라기보다는 작가 나름대로 ‘총력소설’을 시도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단순한 서술로는 처절한 실상을 전달하기 어렵기에 철거 계고장을 그대로 따다 붙여 넣는다. 압도적인 현실의 풍경을 작품 안에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철거 계고장과 같이 현실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공포를 유발하는 소재들이 작품안에 고스란히 들어와 등장인물들과 독자를 괴롭힌다.” 단순하게 말해 작가는 시각적인 효과를 ‘글’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닌 공문서들을 삽입했다. 이는 독자에게 실재적으로 느끼게 만드는 ‘장치’이다.

 난장이가 사는 동네는 ‘행복동’인데 ‘행복한 동네’를 지향한다는 자체가 현재 행복하지 않은 동네를 의미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굳이 ‘행복동’이란 명칭을 사용할 필요가 없다. ‘행복동’이라 지칭한 이유는 ‘반어법’을 사용한 이 소설의 장치라고 생각한다. 작품 속 주요인물들의 행적은 행복과 거리가 멀지만, 피상적으로는 꿈과 환상을 논한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행복하지 않음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영희의 몸에서는 풀냄새가 났다. 개천 건너 주택가 골목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가 났다. 나는 그것이 고기 굽는 냄새인 줄 알면서 어머니에게 묻고 했다. (중략) “너도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집에 살 수 있고, 고기도 날마다 먹을 수 있단다.””(앞의 책, 85p.)

 <난쏘공>에서는 냄새에 관한 비유가 자주 나온다. ‘영희의 몸에서는 풀냄새가 난다.’ 하지만 개천 건너 주택가 골목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가 난다. 이러한 간단한 문장에서도 ‘난장이 가족’과 ‘고기 굽는 집’의 계급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노동자계급 즉 빈민층인 난장이집은 고기를 먹기 힘들다. 왜냐하면, 고기 먹을 돈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영희의 몸에는 ‘풀 냄새’만 난다.

“너도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집에 살 수 있고, 고기도 날마다 먹을 수 있단다.”라고 어머니께서 말하지만, 이는 전형적인 노동자계급의 꿈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서술했다시피 노동자에게 1970년대는 ‘산업화’와 ‘사시패스’와 같은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인생역전의 로망이 있었다. 모두가 로망을 품고 살았지만, 로망은 로망일 뿐이었다.


“그 판을 짜고 다음 판을 짜나가다 겨우 알았다. 노비 매매 문서의 한 부분이었다. (중략) 우리의 조상은 세습하여 신역을 바쳤다. 우리의 조상은 상속 • 매매 • 기증 • 공출의 대상이었다. (중략) 중조부대까지는 선조들이 살아온 경험이 도움이 되었으니 할아버지대에는 그것이 도움을 주지 못했다. 할아버지에게는 어떤 교육도 없었고 경험도 없었다 할아버지는 집과 땅을 잃었다.”(앞의 책, 87~88p.)

 이는 원래 약자였던 집안을 표현하고, 가난의 계승을 표현한다. ‘노비 집안’이 ‘빈민층 노동자 집안’으로 계승됐다. 이러한 표현방식은 앞서 언급한 ‘이분법적 선악’이다. 교육받지 못하고, 경험 없고, 원래부터 가난했으니 피해 받을 수밖에 없는 논리구조이다. 그러므로 난장이 집안 사람들은 가난할 수밖에 없다.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난장이 집안에서 ‘난장이’가 할줄 알았던 일은 “채권 매매, 칼 갈기, 고층 건물 유리 닦기, 펌프 설치하기, 수도 고치기”(앞의 책, 95p.)이다. 이런 일들만 하다가 서커스단의 일을 하겠다고 했다.  ‘서커스’는 유희적 • 오락적의 의미를 지닌다. 난장이가 서커스단의 일을 한다는 것은 더 이상 유희적 • 오락적 이하의 존재라 볼 수 있다. “그가 소유했던 생산 수단의 목록을 보면, 고작해야 “절단기 • 멍키 스패너 • 렌치 • 드라이버 • 해머 • 수도꼭지 • 펌프 종지굽 • 크고 작은 나사 • T자관 • U자관, 그리고 줄톱 들”에 불과하다. 이렇듯 열악한 조건으로 인해 그가 평생토록 해온 일은 “채권 매매, 칼 갈기, 고층 건물 유리 닦기, 펌프 설치하기, 수도 고치기”등일 뿐이다. 말하자면 본격적인 산업화 이전 세대, 즉 반봉건 • 반 자본적 이행기 세대의 인물로서, 양극 분해 과정에서 전형적으로 하향 전락한 경우라 하겠다. 이런 계급적 조건의 인물을 작가는 ‘난장이’라는 신체적 불구성에 빗대어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같은 책, 341p.) 이를 통해‘난장이’는 유희적 • 오락적 이하의 존재이고, 자신의 계급을 넘어설 수 없는 사람이다.


“아버지의 작은 그림자가 아버지를 따라갔다. 나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잠이 나를 눌러 왔다. 나는 부서진 대문 한 짝을 끌어내 그 위를 엎드렸다. 햇살을 등에 느끼며 나는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우리 식구와 지섭을 제외하고 세계는 모두 이상했다. 아니다. 아버지와 지섭마저 좀 이상했다. 나는 햇살 속에서 꿈을 꾸었다. 영희가 팬지꽃 두 송이를 공장 폐수 속에 던져넣고 있었다.”(같은 책, 126p.)

 여기서 ‘영호는 왜 잠에 빠지게 됐는지’, ‘왜 영희가 꿈에 나와 팬지꽃 두 송이를 공장 폐수 속에 던졌는지’ 의문점이 발생한다.

 “잠은 조세희 소설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어 나오는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현실에서 환상으로 들어가는 연결고리 역할을 하기도 하며, 척박한 현실을 드러내는 유용한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중략) 공장 노동자들에게 있어 잠이란 가장 행복해질 수 있는 1차적 욕망이다. 그리고 잠을 자면서 꾸게 되는 꿈이야말로 현실과 정반대일 수 있다. 현실에서는 공장 폐수로 인해 모든 것이 오염되어 황폐하지만 꿈속에서는 그 죽었던 강이 다시 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영호)의 꿈 속에서 영희가 던진 팬지꽃 두 송이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즉 전복의 기능을 담당하게 된다. (중략) 꽃과 폐수, 상상과 현실 사이의 순행과 역행이라는 이중성을 지니게 된다.”

 “즉 방법적인 상관 관계를 통해 집단적 실감과 주관적 정서 간의 변증법을 구성하고 있는데 그것이 개인과 사회, 사실주의와 반사실주의, 혹은 형식과 내용을 대립시키면서 복합시키는 효과를 얻는다. (중략) 두 송이의 팬지꽃과 공장의 폐수, 햇살 속의 낮잠과 헐린 집들의 폐허는 영원히 화해할 수 없는 대립으로 그 대결의 긴장이 고조되고 이 두개의 대립소들은 절망적인 현실과 꿈으로의 밝은 초월이라는 역시 해소되기 불가능한 또 하나의 대립과 부닥친다.”(같은 책, 322~323p.)

 ‘잠’, ‘대립되는 존재’, ‘상상과 현실 사이의 순행과 역행’을 통한 이중성은 소설 속‘환상성’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잠 또한 환상성으로 치부한 이유는 ‘결여된 욕망’1)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결여된 상태에서 작동하기 시작한 욕망은 근원적으로 충족할 수가 없습니다. 욕망 자체의 메커니즘이 그렇습니다. 궁극적으로는 만족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각주

1) '결여된 욕망'이라 말한 이유는 1970년대 당시 노동자들은 잠을 재대로 자지 못하면서 일을 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수면욕’은 ‘결여된 욕망’이다.



참고문헌

1. 조세희. (2000).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이성과 힘.

2. 송선령. (2009). 한국 현대 소설의 환상성 연구. (박사학위,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Riss.

3. 정주아. (2018). 조세희 문학을 통해 본 1970년대 산업사회와 희망의 문제. 한국근대문학연구. 19(2). 407-443.

4. 이현우. (2021).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남성작가 편) . 추수밭.

5. 최천규 외 59인. (n.d.). 문학비평. 네이버 지식백과.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164850&cid=44411&categoryId=44411.

6. 이현우. (2020). 문학에 빠져 죽지 않기. 교유당.

7. 이현우. (2014). 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 ㈜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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