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이는 ‘개인 도덕’(義)보다 ‘정치적 사유’(法)를 더 중시했다. 그는 <政談>에서 ‘도오뉴우’의 일을 말했을 때, 동기(心)보다 행위(行爲)를 더 중요시했다. ‘아코오의 로오시 46명에 관한 사건’을 이야기했을 때도 주군에 대한 복수는 의롭지만, “그것은 그 무리에 한정되는 사적인 논의일 뿐”(p. 187)이라고 말했다. 소라이는 義가 法의 결정적인 영향에까지 미치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았다.
본래 주자학은 수신(修身)에서부터 평천하(平天下)까지를 성선(性善)으로 개인에서 최종적으로 세상을 다스린다고 봤다. 그래서 개인 차원이나 국가 차원의 영(令)을 같게 보았다.―국가적 차원보다 개인적 차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함― 그러나 소라이는 이와 반대로 보았고, 개인적 차원과 국가 차원을 이분법적으로 보았다. 이를 통해 그가 기존 유교 사상의 분해를 촉진시켰다고 볼 수 있다.
2. 소라이가쿠의 방법론
소라이가쿠의 출발점이자 방법론을 이루고 있는 것은 고문사학(古文辭學)이다. 고문사학은 옛날 문자·글들이 중요하다고 강요하는 학문이다. 그래서 주자의 글이 아닌 바로 <논어>를 읽으려 들었다. 왜냐하면, 소라이는 시대마다 처한 상황이 다르고 사상사―새로운 개념+기존의 것(을 골라서) 계승―적으로 보았을 때 기원을 보아야지 그 이후의 후학으로 공부하면 원뜻이 왜곡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3. 소라이에게 있어서 도(道)의 본질과 내용
소라이에게 있어서 천도(天道)는 공경·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지 인륜의 세계가 아니다. 그리고 천도·지도(地道)는 성인의 말에서 나온 것이기에 소라이에게 있어서 도의 본질은 인도(人道)이다. 인도 즉 성인의 도는 정치를 통해서 발현할 수 있다.
도의 내용은 ‘보편적=포괄적인 존재’―그들의 말은 모두 성인의 도에서 나왔기 때문―이자, ‘객관적=구체적인 것’―“소라이가 추구했던 것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길 따위와 같은 추상적인 이념 이른바 도덕성이 아니라 (중략) 구체적으로 현존하는 이른바 윤리·인륜이었다.”(p. 201)―이다.
3. 소라이에게 있어서 도(道)의 근거
우리는 시공간에 의해 우리의 생활 규범과 다른 모든 것들이 보편적이지 않다―바뀌지 않는 진리이지 않다―. 왜냐하면 시대가 변하면서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라이의 성인에 관한 입장을 보았을 때 그는 성인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도는 성인들의 말 덕분에 도가 될 수 있다. 그렇기에 모순될 수 없다. 그리고 성인의 말이기에 따라야 한다. 이것이 도의 보편타당성이자 근거이다.
4. 소라이가쿠의 공·사 구분
소라이가쿠의 공(公)·사(私) 구분은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는 일본의 전근대성와 근대성의 구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소라이는 아코오 기시(義士) 사건과 1651년 두 로닌의 전복 음모 고발에 관한 사례를 들면서 공·사를 구별했다.
그에게 공이란 정치적이자 대외적인 것 즉 “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하는 바의 것”(p. 223)을 공이라 한다. 반면에 사란 개인적이자 내면적인 것 즉 “자기 혼자 오로지 하는 바의 것”(p. 223)을 사라고 한다. 그리고 공이 사보다 앞서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소라이의 정치성의 우위를 알 수 있었다.
소라이는 공의 앞서감을 이야기했지만,―사적인 것을 배척하지 않은 것처럼― 두 영역을 접촉으로 보았지 “어느 한쪽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p. 223)라고 보았다. 그의 저서 <辨名(변명)>에서 공·사가 각각 독자적인 영역이 있고, 군자라도 사사로움은 존재한다고 말했다. 이 부분에서는 기존 주자학과 다른 인간의 욕망을 인정하는 대단한 주장이다.
소라이는 공·사 분열을 통해 정치에 관해 이야기했다. 길을 인식하고 서술하는 것은 학자의 일이며(사적인 것), 그 길을 실천하고 만드는 일은 정치적 지배자의 일이다(공적인 것). 인식하고 서술함은 실천적이지 않고, 공중에 붕 뜬 하나의 설(說)인, 즉 “자기 혼자 오로지 하는 바의 것”이라서 소라이는 학자들의 일을 사적인 것으로 보았다. 반대로 현실적으로 실천하고 만드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더불어 하는 바의 것”과 부합되기에 공적인 것으로 보았다.
5. 겐로쿠에게 있어서 향보(享保)에 이르는 사회정세
겐로쿠에게 향보의 사회적 상황은 전환기적인 현상이었다. 겐로쿠 시대는 화려했지만, 화려함의 이면에는 “도시와 농촌에서 혹은 소극적인 부식(腐蝕)을 통해서 혹은 적극적인 반항에 의해서 봉권적 권력을 위협하는”(p. 253) 모멘트들이 있었지만, 근본적인 타격을 주진 못했다.
소라이는 겐로쿠 문화를 보면서 주자학의 낙관주의를 비판하였다. ‘정치인 것’(the political)은 위기이면서 아직 붕괴가 시작되려는 한계선에서 나타난다고 보았다. 주자학의 낙관주의의 경우 안정된 사회이기에 ‘정치적인 것’이 나타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한 의미에서 소라이는 겐로쿠 문화를 사적인 측면으로 보았다.
6. 정치조직개혁론
소라이는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학문을 정치조직개혁론에 사용했다. 그는 자연경제로 돌아가는 것과 예·악에서 도(道)를 찾고 이것들을 통해 정치조직개혁론을 펼쳤다. “법가(法家)적인 입장은 아니다. 제도는 어디까지나 인정(人情)에 입각한 것”(p. 256)이다.
그의 원시 봉권제로의 복귀 주장은 복고적이지만, 절대주의적인 관념의 맹아에 주의를 불러일으키는 “역행하는 정치적 집중의 요소가 잠재되어 있”(p. 257)다.
필자가 보기에 ‘오규 소라이’는 일본을 근대로 입장시킨 근대적인 인물이며, 피상적인 관찰자들과 달리 위대한 사상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