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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환일 May 05. 2020

반항하는 이방인

알베르 카뮈 <이방인>

 까뮈는 1913년 출생해 1942년 <이방인>을 출간했다. 1913년은 보어의 원자 모형이 발표돼 양자 개념이 확장되고 양자 역학의 수학적 모델의 출발점이 되었던 해이기도 하다. 문학계와 과학계에서의 기념비적 순간이었던 그 날부터 <이방인>을 출간하기까지, 혹은 더 넓게 까뮈의 생애는, 도식적 풍토가 만연했던 사회적 체계와 규범들이 점점 위기를 맞고, 합리적 방법론의 첨단이었던 근대 과학과 모더니즘이라는 견고한 옹벽에 서서히 균열을 내버렸던 불확정성의 시대와 궤를 같이 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시대가 요구했던 합리주의, 근대적 감각, 대중성과 같은 것들은 결국 전쟁이라는 부산물을 남겼고 이런 아이러니 속에서 까뮈는 자연스레 기존의 운동 법칙에 반하는―뉴턴의 고전 역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미시 세계의 운동처럼, 관습을 부정하고 관성에 저항하는, 부조리에 '반항하는 인간'인 뫼르소라는 인물을 탄생시키게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게 됐다.



"우리 사회에서 자기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사형 선고를 받을 위험이 있다." 나는 다만, 이 책의 주인공은 유희에 참가하고자 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김화영 역, <이방인> p.153, 민음사)

우리 사회에는, 자신의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은 모든 사람이 사형수가 될 우려가 있다고 말입니다. 저는 단지 책의 주인공이 그 '게임jeu'에 임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죄 선고를 받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정서 역, <이방인> p.168, 새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는 행위, 그 관행적이고 습관적으로 굳어진 행태, 즉 부조리라는 이름의 유희게임에 참여하지 않고 끝내는 거부했던 뫼르소가 어떻게 한 명의 낙오자, 이방인으로서 우리에게 간주되게 됐는지,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우리는 그 유희와 게임이라는 것의 잔혹성과 무게감을 기실 역사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국가에 의해 합법화된 범죄의 시대에 태어나 시대의 톱니바퀴가 만들어낸 기괴한 마찰음에 휩쓸려버린 인물들, 당시 나치 법률 체계 하의 전범들이 얼마나 그 놀음에 적극적으로 임했었는지가 절로 떠오른다. 그 시절 그들에게 '죄'란 것은 단지, 국가에게서 하달받은 명령을 완벽히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는 행위, 그 '자연스럽고 응당한' 행위는 국가에게서 하달받은 명령처럼, 도저히 거부해서도 안 되고 이해되지 않을 수 없는 일종의 유희와 게임인 것이다. 즉, 그러한 관행적, 습관적 부조리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저항한 뫼르소는 결국 단두대에 올라선 이방인, 처형당해야 마땅한 유대인으로 남게 될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유죄인 곳에서는 아무도 유죄가 아니다'라는 그 유명한 말처럼, 나의 의지 원칙이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보편적 법의 테두리 안에 속할 수 있어야 한다는 칸트의 정언명령은, 불운하게도 이런 인류 역사의 시대적, 문화적, 사회적 맥락이 고려되지 못 하였다는 점에서 오류를 지닌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방인>에서 말하는 그 유희와 게임, 부조리란 것이 실은 그다지 거창하다거나 심오한 이데올로기와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이것은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해서, 우리 스스로도 체감하지 못할 정도로 무심한 것이다. 지극히 상투적이고 형식적인 것, 무의식 속에서 이루어지는 습관들처럼 틀에 박혀 예상 가능해져버린 것과 가깝다.

 그것은 바로 맹렬히 질주하는 기차 안에서 그 속도를 미처 체감치 못하게 하는 그 고약한 관성이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관성적 행태, 원칙을 고수할 때 오는 안온함, 답습화된 합리. 즉 이런 것들이야말로 까뮈가 <이방인>을 통해 이야기하는 부조리다.

 기내에서 그 진행 방향의 반대로 달린다거나, 아예 기차에서 내려버리는 둥, 일종의 관성에 대한 저항과 반항(뫼르소가 태양으로 인해 아랍인을 살해한 것과 같이)을 시도해 볼 순 있겠으나, 종국엔 더 큰 관성(예컨대,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거나 태양이 우리 은하 중심을 공전하는 중력)에 매몰돼 곧 무감각해질 뿐이다.


 <이방인>에서 수도 없이 등장하는 태양에 대한 묘사를 통해, 우리는 태양이 상징하는 것이 곧 부조리, 어떤 불합리한 것, 불복 불가능한 존재, 끊임없이 나를 압박해오는 끈질긴 추적자, 라는 것에 대한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작열하는 태양에 반항하여 아랍인을 살해한 뫼르소도, 태양을 피해 저녁 마을 길을 산책하는 뫼르소의 어머니도, 온몸은 태양빛에 드러내고 얼굴은 그늘 속에 감춘 아랍인도, 결국엔 모두 죽음이라는 속수무책의 종착지로 내달리는 기차에 올라탄, 자신의 삶을 관장하고 있는 죽음과 허무의 관성을 벗어나지 못했던 갸륵한 승객들로 남았다.

 그렇기에 나는 <이방인>의 결말이, 결국엔 뫼르소의 사형으로 끝맺는다는 점에서 통렬한 공허와 허무를 느꼈다. 이것은 얼핏, 까뮈가 <시지프 신화>의 서두를 열며 주장하는 철학의 근본적 문제와 맞닿아 있다.

 즉, 세계는 본질적으로 부조리하고 우리는 그 관성을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자살이야말로 인생이 살 가치가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판단하는 바로미터라는 것이 까뮈의 관점에서 바라본 세계이며, 우리를 지배하는 부조리의 관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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