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호 - 2호
TASTE | 프루스트의 입맛 저장소
Issue No. 1 Green
1호 발렉스트라
주인의 시선 : 짙은 푸르름을 가진 녹색. 동트기 전 차분히 가라앉아 있는 새벽 4시의 공기를 담은 듯하고, 숲 속 비밀을 모두 알고 있지만 누구에게도 전할 마음이 없는 입이 무거운 숲 같다.
이유 있는 소비를 추구한다. 한 가지 이유는 명확한 소비. 단순히 ‘예뻐서’ 일 수도, 브랜드 철학이 좋아서일 수도, 색감이 쏙 마음에 들어서, 기능적 역할을 야무지게 해내서, 값이 싸서, 혹은 향수를 불러일으켜서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다. 나름의 확실한 이유.
나에겐 시간, 장소, 상황에 따라 가볍게 들고 다닐 합리적인 가방 여럿을 가지고 있는 편이 그 모두를 합하고도 남는 가방을 소유하는 것보다 심리적 만족감이 크다. 하지만 이왕 명품 가방을 살 기회가 생긴 이상, 기능적으로도 심미적으로도 오래도록 질리지 않을 클래식한 가방을 잘 고르고 싶었다.
‘나’라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싶었다. 들으면 누구나 알 법한 명품 브랜드는 피하고 싶었고, 로고가 드러나지 않길 바랐다. 아는 사람‘만’ 알아본다면 그걸로 되었다.
애당초 물건을 조심히 쓸 수 있는 성격이 아니기에, 스크래치에 쿨한 소재이길 원했다.
평소에도 잘 들고 다니려면 주로 입는 옷들과의 어울림도 필요하다. 깔끔한 단색과, 심플하면서 구조적인 디자인을 선호하기에, 가방도 군더더기 없이 심플했으면 했다.
디터람스가 얘기한 ‘좋은 디자인 10원칙’에 상당 부분 부합하길 원했다. 불필요하게 장식적이지 않으면서, 영속적이고 마지막 디테일까지 철저하며 최소한으로 디자인된.
구매 전 모든 브랜드의 역사와 철학을 살펴보진 않지만 호기심을 자극한 브랜드들은 가끔 홈페이지나 인터뷰 기사를 통해 브랜드 히스토리를 찾아본다. 우연히 알게 된 발렉스트라는 찾아보면 볼수록 숨겨진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로고 없이 품질만으로 승부를 보고자 고집하는 등 발렉스트라의 브랜드 철학을 살펴보면서 명품 소비의 행태를 단순히 사치품을 소비하는 행위로만 바라봐왔던 것이 조금은 편향적인 시각이 아니었나 생각해보았다. 브랜드의 역사와 맞물려 그야말로 잘 만들어진 명품을 소비하는 일에는 분명한 가치가 있어 보였다.
브랜드와 디자인이 정해졌고, 내가 좋아하는 컬러 선택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직관적으로 첫인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고려한 가치에 나의 아이덴티티를 입혀 이 물건과 나의 애착관계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중요한 지점이었다.
구매 전 신중함은 구매 후 애착으로 이어진다.
하나의 제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생각해보면, 생각보다 아주 많은 공정을 거치게 된다. 디자인, 재질, 컬러, 등 필요에 따라 각 부품에 있어 최선의 자재들을 선택하면, 각 단계의 장인들이 그야말로 한 땀 한 땀 각자의 역할에 정성으로 힘을 실어 서로를 잇는다. 이 모든 단계들이 모여 하나의 완제품이 만들어지고 이후 수많은 유통단계를 거쳐 소비자의 눈에 띄기까지 적어도 수십 번의 산을 넘으면 소비자와 만날 수 있는 필요 요건이 된다. 이 일련의 필요 요건에 선택 장애를 가진 예비 구매자의 갈팡질팡 밀당의 마음까지 견디어야, 비로소 주인의 선택을 받게 되는 것이다. 소비 후 그 물건에 대한 애착과 지속적인 사용은 어떻게 보면 주인이 본인의 선택에 대한 책임으로서 최소한의 예의일지도 모른다.
결코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을 여러 장인들의 꼼꼼한 검수로 탄생한 이 녀석의 숭고한 과정에 나도 모르게 태도가 공손해진다.
무난한 듯 무난하지 않은, 진중한 눈빛과 신뢰감 있는 목소리가 들릴 것 같은 이 녀석에게 점점 더 애착이 간다.
2호 발렉스트라
주인의 시선 : 새침데기 그린 컬러를 입고 있는 발렉스트라 2호는 단호하고 엄격해 보이지만 예상치 못한 순간에 사르르 마음이 풀릴 것만 같다. 그리고 내면의 수줍은 열정과 개성, 고집이 느껴진다.
아마도 내가 휴대폰 다음으로 늘 지니고 다니는 물건은 지갑일 것이다. 가방 속에 넣어졌다 빼내어지는 게 일상인 지갑은 늘 나의 손때가, 미안한 흠집들이 여기저기 흔적을 남기고 있다.
용도별 체크카드와 신용카드, 가족카드, 자주 다니는 카페의 도장쿠폰, 마트 카트에 넣을 여분의 동전, 증명사진 외 가족사진, 이곳저곳의 명함, 팝업 장터에서 사용할 현금 등 필요한 몇 가지를 넣다 보면 어느새 지갑은 불룩해진다.
카드지갑만도, 동전지갑만도 그것만 단독으로 가지고 다닐 수 없는 이유다.
모서리는 물론 보이는 모든 면이 늘 닳아 해지는 내 지갑의 생애주기는 1년이다. 공교롭게도 그 시기는 새롭게 사고 싶은 지갑을 발견하는 시기와도 맞물린다. 비교적 합당한 이유를 찾은 듯한 심리적 위안을 등에 업고 묵은 때와 해진 흔적으로 가득한 옛 지갑에게 쿨한 안녕을 고한다. 그리고 새로운 지갑을 맞이한다.
그래왔다. 이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는.
이 친구는 햇수로 벌써 5년 차 함께하고 있는데 아직 헤어질 마음이 너도 나도 없어 보인다.
얼핏 보면 하나의 장지갑처럼 보이지만, 지폐가 들어가는 자리에 별개의 긴 카드지갑이 나란히 들어가 있다. 카드지갑은 따로 꺼내어 단독으로 사용해도 하나의 온전한 지갑처럼 독립적이다. 주로 가방 안에서 둘은 합체해있을 때보다 분리되어있을 때가 많다. 카드지갑은 바깥세상이 궁금한 아기 캥거루마냥 엄마 주머니에 돌아올 생각이 없어 보이지만 멀리는 못 간다. 엄마 주변에서 나름의 도발을 일삼지만 결국엔 품이 그리워 돌아온다.
덜 사고 좋은 걸 사면된다.
이 지갑을 사용하면서 가죽이 좋으면 이렇게 오래갈 수 있구나, 좋은 물건을 잘 소비하면 오래 사용할 수 있구나를 느꼈다. 손쉽게 산 것들은 대부분 빠르게 잊었고 쉽게 버려졌다. 덜 사는 대신 오래 쓸 좋은 물건을 잘 사는 것은 환경에도 도움이 된다. 10년 동안 써보고 싶다. 더 쓸 수 있으면 더 좋고.
물건을 오래 사용하는 데 있어, 품질만큼이나 오래 보아도 예쁠 심미적 만족감은 중요하다. 그리고 심미적 만족감에 기특한 마음이 입혀지면 그 물건은 더욱 소중해진다.
친히 지목해주지 않았음에도 7년 차에 드디어 아내의 취향을 명중시킨 신랑의 기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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