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준생으로서 부모님께 감사한 순간
평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몇 문장 있다. "난 참 인복이 좋아" 역시 개중 하나다. 자신 있게 인복이 좋다고 하는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는데, 단연 부모님이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다. 부모와 자식 관계는 다른 인간관계보다 특별한 부분이 있다. '선택의 부재' 부모도 자식도 서로를 고를 수 없다. (물론 부모님은 아이를 낳기로 결정했겠지만, 정확히 '나'란 사람을 고르지는 못한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의 인연을 '천륜' 즉 하늘이 정해 준 인연이라고 표현하는 거겠지.
아빠와 엄마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어떠한 불안감도 심어주지 않았다. 부모님은 내게 집의 경제적 형편-월급이나 빚 등-을 언급하지 않았다. (지방에서 살고 있는 평범한 중산층 가정이다) 또한 부부 싸움은커녕 내 앞에서 언성을 높인 적 역시 한 번도 없었다. (아빠가 만취해서 집에 오면 엄마에게 잔소리를 듣긴 했다) 경제적이든 애정면이든 난 항상 안정감을 느꼈다. '부모님이 이혼할지도 몰라, 내가 이걸 하고 싶다고 해서 우리 집 형편이 어려워지면 어쩌지'와 같은 생각이 내 머릿속을 차지한 순간은 단언컨대 존재하지 않았다.
어릴 때는 모든 부모님들이 우리 부모님과 똑같은 줄 알았다. 하지만 점점 크며 친구가 생기고, 주변 이야기를 여러 방식으로 접하게 되면서 깨달았다. "아! 다 그런 건 아니었구나." 그리고 놀라움은 더 커졌다. 엄마와 아빠는 처음부터 경력 10년쯤 되는 것처럼 부모 일에 능숙했는데, 사실 그들은 나를 통해 처음으로 부모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우리 집에서 첫째, 즉 장녀이다. 서툴 수밖에 없는 여건임에도 어떠한 모자람을 느끼지 않은 나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이런 부모님을 만나다니,
나는 참 인복이 좋구나!
진즉에 좋은 분들이란 사실은 알았지만, 2020년 2월 졸업을 기점으로 어떤 핑계도 댈 수 없는 진짜 백수가 되면서 감사한 부분이 여럿 있는데 직접 말하긴 쑥스러우니, 글로 감사함을 전하고자 한다. 또 취준생 자식을 둔 부모님들께 자식의 입장을 살며시 전해드리려는 의도도 있다. (저희는 이럴 때 감사함을 느껴요!)
"문송합니다" 대표주자인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한 백수 딸이 있다면, 나 같아도 한 번쯤은 공무원 시험을 제안해 볼 것 같다. 하지만 부모님은 나에게 공무원에 'ㄱ'도 꺼내지 않는다. 물론 어느 정도 내가 만들어 낸 결과기도 하다. 스무 살 무렵부터 "반복적인 일을 하는 공무원 업무와 나는 맞지 않는다"라며 부모님을 세뇌시켰다. (여러분, 꼭 관철시키고 싶은 의견이라면 지속적으로 말해보세요. 상대방을 세뇌시키는 것은 꽤 효과가 강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은 한 번쯤 꺼내볼 수 있을 텐데, 부모님은 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내 말을 귀 담아 들어주시는구나! 본인들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구나'라며 감사함을 느꼈다.
대학교 막 학기를 다니고 있을 때였다. 부모님과 근사한 식당에서 밥을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식사가 끝날 때쯤 아빠가 그러셨다. "살아보니 그래, 사회에 내딛는 첫 발이 중요해. 아직은 아빠가 서포트를 해줄 수 있으니까 너무 조급하게 아무 곳이나 들어가려 하지 말고, 하고 싶은 걸 알아봐." 크으- 다시 회상해 봐도 감동 그 자체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은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곧 백수가 될 입장에서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는지 부모님은 짐작했을까? 아마 이 정도로 감동받은 줄은 몰랐을 거다. 조언대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 어떤 회사 어느 직무를 선택해야 잘 맞을지에 대해. 그리고 가야 할 길의 방향 정도는 찾은 듯싶다.
자식이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만한 대기업을 다니는 걸 바라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을까. 취준생 입장에서 대기업이 합격시켜주면 마다하지 않겠지만, 요즘 힘들지라도 재밌어 보이는 몇몇 스타트업이 눈에 들어왔다. 나중에 합격하고 (이것 역시 김칫국 드링킹이지만) 얘기했을 때, 부모님이 당황스러워하실까 봐 슬쩍 흘려봤다. 스타트업 기업도 알아보고 있다고. 부모님이 어떤 반응일지 몰라 살짝 움츠러들었는데, "너에겐 그쪽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며 적극 지지해줬다. 심지어 아빠는 '창업'까지 언급했다. 나를 믿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꽤 좋아졌다.
원래 서울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지만, 코로나 바이러스 덕에 현재 본가에서 같이 지내고 있다. 부모님 입장에서 자식이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만 있으면 초조한 마음에 이것저것 잔소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어학이나 자격증 공부 같은 것 말이다. 코로나 때문에 시험도 연기됐으니 나도 할 말이 있지만, 애초에 그런 류의 말을 하지 않는다! (놀라움) 대신 함께 운동하자고 제안한다. 중요한 건 '함께'다. "가만히 있을 거면 운동이라도 좀 해"가 아니라 같이 산책하거나 자전거를 타자고 하다니! 나 역시 운동은 해야겠다고 계속 생각(만)했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외투를 입고 집 밖을 나섰다.
어쨌든 부모-자식 사이도 인간관계다. 상대방이 나를 존중한다는 게 느껴지면 감사함이 따라오는 건 순리 아닐까. 또, 결국 취준생이라고 특별히 다를 건 없다. 자식은 부모가 동등한 위치로 바라봐 줄 때 감동을 느끼기 마련이다. 이 글을 발행하자마자 부모님께 링크로 보내드릴까 하다가, 아무래도 취직에 성공한 뒤가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만간 당당히 글을 보여드릴 날이 오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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