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의 특이점 내기

나는 왜 '열심히' 살기를 거부했나.

by 프록시마

신의 존재와 관련하여 유명한 '파스칼의 내기'를 한 번쯤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간략하게 이야기하자면 신의 존재를 이성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면 '신을 믿는 것'이 확률적으로 더 유리한 배팅이라는 논리이다.


이걸 AI의 발전과 특이점 버전으로 생각해보자.

같은 논리로 특이점이 빠르게 오건 느리게 오건(혹은 아예 오지 않든)

'현재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시나리오' (열심히 계층 상승을 위해 노력하고, 저축과 투자를 통해 노후를 준비하는 등)를 따르는 것이 확률적으로 더 유리한 배팅이라고 볼 수 있다.


AI가 아무리 온갖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누군가는 n년 안에 세상이 천지개벽한다고 외쳐도, 가장 안정적인 선택은 역시 오늘 살던대로 사는 것이라는 것이다.


"거 당연한 얘기를 왜 하는거요?"라고 묻는다면

그야 나는 현재 사회가 제시하는 시나리오가 썩 맘에 들지 않아서, 어차피 의미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해서 별로 선택하고 싶지 않은 시나리오이기 때문이다.


원래 파스칼의 내기가 증명하려는 종교의 신이 아닌 신의 존재 가능성을 배제한 중대한 오류가 있는 것처럼

파스칼의 특이점 내기도 사람에 따라선 오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내 경우가 그러하다.

첫째는 서로 다른 시나리오가 일어날 확률이 다르다면 보상 매트릭스의 기대값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고

둘째는 남들보다 유달리 '열심히, 성실히'사는 삶에 대한 거부감이 큰 탓이다. 원래 파스칼의 내기는 신을 믿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아주 적다고 가정하지만, 나에게는 타자나 사회가 주입한 '성실함'을 지불하는 것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막대한 비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어떠한 이유든 열심히, 성실히 살아가는 모습을 존중하지만

나는 치열하지 않게, 성실하지 않게, 인생을 향유하며 살아가고 싶은 것이다.


배팅은 했지만, 나는 항상 불안하다. 일반적인 선택이 훨씬 더 보편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빛에 격렬히 몸을 부딪히는 나방처럼 묘하게 불리해 보이는 배팅을 나는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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