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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베이지 Mar 13. 2016

스물 일곱의 군입대와 의무소방.

1월에서 6월까지













※ 이 포스팅에 수록된 글들은, 제가 일기장에 끄적댔던 원본을 그대로 전사한 것임을 밝힙니다. 늦은 나이에 군복무를 시작하며 가장 어두운 시기를 스스로 다독였던 응원의 흔적들이, 또 다른 누군가를 밝힐 촛불 되기를.




















(2015. 02. 04) 다시, 입춘(立春) 



청 무우밭인가 해서 들어갔다가 바다에 날개만 젖고

퍼덕이며 뛰쳐나온 나비를 기억한다.

모양새가 딱 그 꼴이다.






수영을 하다 짠 바닷물을 갈락갈락 마셨을때처럼

한동안은 정신을 못 차리고 팔다리를 마구 휘둘러댔다.









어느덧, 입춘이라 했다.

나는 다시금 고향에서 숨을 크게 고르고 

젖은 날개를 드라이기에 말려댔으나

이내 별 수 없이 바다로 달려들어야 할 것임을 알기에,

벌써부터 두 날개가 얼얼하고 눈시울이 일렁였다.









하지만 입춘이 지나 다시금 꽃이 피고, 또 지고,


매미가 울고, 가을하늘에 벚꽃물이 들고,


그것을 눈이 또 하얗게 지워도 








나는 오직 저 시퍼런 바다에서 청 무우를 캐 올라와야 한다는 사명만으로 눈을 떴다.


      















(2015. 03. 12) 다시 또 감사




가끔 군인들이 사격을 잘해 포상전화를 받았다던가 하는 식으로 


한껏 오만에 찬 자랑을 늘어놓는 모습을 보면 혀를 끌끌 찼더랬다.








웬 걸. 처음 자력으로 훈련소에서 포상전화를 따냈던 날.

그게 어떤 의미인지 친구에게 구구절절 첨언하는 내 모습을 보고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늘 마지막 남은 몆분만은 수화기를 들었다가 이내 놓아두곤 


다시 생활관으로 돌아가야 했다.













겪어보기 전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군인들의 포상전화가 그렇고 대부분의 관계가 그렇다.

그래서 우린 잘 안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사실은 이해되지 못하고

늦은 후에야 그 입장을 흠칫 알게되곤 마음 아파하는 것이다.













새벽마다 불침번을 서면서는 꺼내 볼 추억이 많아 심심할 겨를이 없었다. 


모든 게 고맙다. 


감사한다. 


원수같이 느껴지던 간나새끼들부터 지나간 인연들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너무 고마워.







소리를 꽥 지르며 각개전투에서 북괴군 모형에 총칼을 박아넣으면서도, 


연병장 바닥을 구르고 화생방 CS탄에 눈물, 콧물을 폭포처럼 흘려대면서도 


나는 그 한가지 생각만을 했다. 









이제 텅 빈 생활관에 누군가가 다시 9번 깔깔이를 물려받아 


야상엔 자신의 교번을 가뜸하고, 


방탄을 손질하고 관물대를 정리할 테다.












그저 잘 부탁할 뿐이다. 


어쩌면 친구보다 더 친구같았던, 소중한 것보다 더 소중했던.










흔한 노랫말처럼 이제 다시 시작이네.

언제나 최선을 다할게. 기대해줘.



      





















 (2015. 04. 08) 소방학교 후반기교육 수료.





여의도엔 이틀 뒤부터 벚꽃축제가 열린다고 들었다.

여기 천안은 아직 동잠바를 입어야 한다. 


나뭇가지만 가득했던 태조산에도 어느덧 노랑이 물들었지만 

해도 덜 뜬 새벽 여섯시에 훈련복을 입고 


사열대 앞에 열을 맞춰 정렬하면 입에서는 아직 한기가 났다.











작년 이맘때쯤의 양재역을 떠올린다.

떠올리는 게 군장보다 무겁고 경례를 위해 세운 손날보다 날카롭지만 

나는 눈을 찌푸리며 그 시기의 양재역을 떠올렸다.

아프지만 다시 난 해냈다. 

그리고 이번에도 극복할 수 있을 게다.









내일이면 소방학교에서의 후반기교육까지 수료하고 


우리는 전국 각지로 흩어지기로 했다.










뿌듯하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8주를 보냈다.

분대장 견장을 떼고 본 동기들과 단 한번도 열외없이 참여한 PT로

나는 속 깊은 내실부터 군살 접힌 육체까지,

정갈하게 나를 정돈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뿌듯하다. 

같이 생활한 분대원, 생활실 동기들과 모든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만 넉넉히 가지고 갈 수 있을 것 같아.

새로 시작될 생활에 있어서 또 뿌듯하자.

잊었던 그 옛날의 유치한 구호.






아자아자 화이팅!

















(2015. 04.13) 경상남도 남해에서-




멀쩡한 사지로, 덜컹거리는 구급차 조수석에 올라 


처음 남해에서 본 건 '남해유배마을' 이었다.


모든 걸 유예한 체, 유배가는 심정으로 훈련소로 입소했던 나였기에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감상적인 접근은 계급사회라는 미명 아래 손쉽게 박살이 났다.


나는 끊었던 담배를 다시 물어야 했고 부조리와 비상식이라는 진흙 아래서 


나의 연꽃을 피워낼 날만 손꼽았다.


 







아직 해야할 일들이 남아 있다.


습관처럼 되뇌이던 나의 소명이 있다.


두부 썰듯 싹둑하고 새로 독립된 무언갈 시작할 수는 없는 우리네 인생이지만


돌아온 경남 남해에서, 나는 겸손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려 한다.


   




 

   

여전히, 매사에 최선을 다해서.      

















(2015. 05. 23) 취중필담




젖과 꿀같은 주말이다.


검색어 순위에서는 박지성이 11월에 아빠가 된다고 했고 


나는 그때쯤이면 무언가 빛나는 걸 보여주기로 했었더랬다.


그 약속들이 아직도 유효한지는 알 수가 없지만, 그러기로 했었다.










큰 마음 먹고 논산으로 들어간지도 어느덧 100일이 지났다고 한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도 그렇게 구겨진 것이다.


황홀하게 피어났던 튤립들은 내리는 비에 목이 달아나 지저분하게 땅을 굴러다녔고


잡초들은 우리들에게 멱살 뜯겨 자리를 내어주곤 모래밭을 뒹굴었다.


잡혀 온 고라니는 철창에 갇혀 3일을 못가 죽어버렸고


3.4초라는 외박도 마지막 담배 한 가치처럼, 순식간에 지난 일이 되었다.













오늘은 영·호남 교류행사에 다녀오는 길에 가볍게 술을 걸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실은 가볍지만은 않아서, 지금 이 순간 제정신은 아닌 것 같지만


오히려 언젠가부터 이어지던, 패배의 긴 숙취에서는 헤어나온 것 같다.


나는 한동안 그 취기에서 깨지 못해 


술잔 앞에설때면 왜인지 떳떳하지 못한 내 모습을 비추어 보며  


마음 아파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어느 한 순간에, 


자기 전에 감사를 드릴 수 있는 넉넉함 가지게 되었고


아침에 눈을 뜨면 기지개 한번 시원하게 켜며 


웃어볼 수도 있던 것이다.















긴 숙취였다.


이제 그만 이 타성에서 벗어나 다시 펜을 잡고 


오래도록 그려온 그림을 완성해야 한다.













올 해 여름은 내게 보류해 둔 것들을 돌려줄지, 혹은


누구도 보증서지 않았기에 다시금 모른 척 등 돌려 나를 지나칠지


난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르지만


한 손에 가려질만큼 멀어진 2014년 그 여름의 뒷모습을, 


다시금 돌아보았다.













언젠가 지금의 괴로움이 나의 가장 멋진 기억이 되기만을 


믿고, 바랄 뿐이다.









  





 (2015. 06. 10) 비공식적 비망록




K.O



원해서는 아니고, 불가항력에 의해 


차가운 땅에 눕힌 채 보는 밤하늘이지만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았다. 


생각보다도 훨씬 예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텅 빈 객석만이 덩그러니 눈에 차 왔다.


내 등을 두드리며 응원하던 사람들과, 온갖 플래카드와, 황금에 대한 얘기들과, 뜨겁던 마음들은 


간 데 없이 찬 바닥엔 바람만 일었다.





아주 깨끗하게 졌다. 





헛웃음이 퍽 나올만큼, 완벽하게 지고 말았다.






  


2014년. 




그런 시기였다.











그리고 2015년 여름,









완전히 바닥까지 떨어졌구나 생각하고 발을 디디려 뻗었지만


칠 바닥도 없이 다시 한번 나락으로 떨어져갔다.











믿었던 사람들과, 시궁창같은 기싸움과 처세에 관한 이야기들, 


아끼고 소중한 것일수록 소홀하게 되는 저열함과 


나이와 철에 관한 폭력적인 통념같은 잔펀치가


잽과 훅으로 끝도없이 쏟아졌다.









이제쯤 그만 가라앉아도 될 법 했는데 


그렇게 많은 걸 잃고, 잊어도 


나는 끝도 없이 잠겨갔다.









받아들이고, 또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수긍하고, 이해하고, 애를 쓰고,


기절 비슷한 상태로 계속해 추락하다가 문득 바보처럼,













어쩌면 떨어지고 있는 게 아니라 날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을 해 보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천십오년, 두번째 에필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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