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의 '카인의 후예', '곡예사', '링반데룽'
링반데룽은 (ringwanderung) 흔히는 산에서, 방향감각을 잃고 같은 지점을 맴도는 현상을 말한다. 작품 속 주인공은 죽어가는 친구의 모습에서 링반데룽을 떠올려 내는데, 작품의 결에 이르러 이 환상방황을 자신과 설희의 관계로 확장한다. 설희와 자신 역시 길을 잃어, 저마다의 환상방황 (環狀彷徨)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곤 그 둘은 적절한 반경 범위에서 한번 내지 두 번, 접점을 이룰 기회를 가지게 되는데 다만, 이제껏 그 타이밍을 놓쳐왔다고 얘기한다. 작가가 얘기하려던 골자는 이 스토리에 있겠지만, 나는 도리어 이 에피소드를 위해 끌어온, 친구의 환상방황(環狀彷徨)에서 전율하고 만 것이다.
주인공의 친구는 동공마저 다 풀어진 상태로 묘사되는데, 그 와중에도 광채를 발하며 줄곧 한 곳을 바라보는 장면을 서술하며 작품은 시작된다. 설명할 수 없는 전율이 인다. 초점을 잡으려고 애쓰면서도, 이내 놓쳐버리게 되는 그 시선의 의미가 내 유년기의 신념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친구는 고시에 합격하여 서게 된 교단에서, 그리고 여러 여자와의 관계에서, 어떤 헛된 원을 그리는 자신을 봤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렇게 혼탁해진 시야에도, 실은 오직 한 곳만을 응시하려 했던 것이다.
나 또한 사회적인 요구에 이리저리 치여서 넝마가 되어서는, 기어이 눈을 내리깐 채 발길이 닿는 대로 걷고 있었다. 하지만 눈동자를 굴리며 오직 한 가지 생각만을 했다. 나선의 계단이다. 나는 나선계단을 타고 오르는 중인 것이다. 원형을 돌고 돌아, 다시금 같은 자리에 떨어진 듯 보이지만 실은 한 층의 진일보를 일궈낸 것이다.
나는 링반데룽을 겪으며 그저 같은 자리를 맴맴 돌고 있는 것일까. 혹은 정말 나선계단을 빙빙 타고 한 층씩 올라가, 시선이 머물던 그곳에 마침내 닿을 수 있을까. 난 아무것도 알 수가 없지만, 작품 속의 인물들이 나와 함께 이 시기를 겪고 있다는 텍스트는, 묘한 위안이 되어 주었다. 나와 우리 친구들은 이 터널같이 어두운 시기 속에서도, 터널은 목적지로 향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임을, 어떻게든 떠올려 내어서, 기어이 접점을 가질 수 있을 거라 믿어본다. 다짐해 본다.
작품의 시대배경은 ‘피난민’ 이나 ‘6.25 사변’ 같은 직접적인 단어들로 1950년대의 혼란스러움을 제시한다. 주인공의 가족들에게는 정해진 거처가 없다. 의, 식, 주 라는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조차 채우지 못하는 것이다. 작품에선 단적으로 ‘구공탄이나 들일 헛간’ 에서조차 쫓겨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나는 먹던 치즈케잌을 조심스레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황순원의 작품들은 시종일관 간결한 문체를 보여주는데 그런 식의 담담한 묘사에서 오히려 울림이 큰 아픔이 느껴진다. 예컨대, 주인공이 집을 구하기 위해 거리를 전전하다가 들린 부둣가에서 “야, 바다란 아무 때 봐도 좋다. 가까운 눈앞에 갈매기가 껑충인다. 야, 멋들어졌다.” 라는 독백을 하는데 이 의미 없는 독백마저 작품 속에서 맥을 같이하면, 여유보다는 당대의 아픔이 저리게 느껴지는 것이다.
주인공은 몇 안되는 페이지 내내 ‘변호사 영감댁’에 가는 것을 두려워 한다. 벼랑 끝에 몰린 한 가족의 가장은 이제 어떤 형태로든 영감댁과 담판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늦은 나이의 군 복무라는 나름의 ‘변호사 영감 댁’이 있는데 아마 누구에게나 이런 ‘영감 댁’ 하나쯤은 마음에 있으리라 생각한다. 작품은 정작, 변호사 댁이 있는 골목에 다다르는 장면으로 끝이 나지만 저마다의 ‘영감댁’을 품은 독자로써 우리는, 이 주인공을 온 힘을 다해 응원하며 페이지를 덮은 것이다.
황순원의 많은 단편 중 단연 걸작으로 다가온 ‘곡예사’의 백미는 역시 이 결말에서 드러난다. 변호사 영감 댁으로 가는 그 최후의 길에, 주인공의 아이들은 그 간 속으로만 수천 번 외쳐온 노래들을 봇물 터지듯 쏟아댄다. 이에 주인공은 ‘놀음패’를 떠올리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연극이자 곡예요, 주인공은 이들의 단장이 되는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오늘의 이 곡예를 돌이켜보고, 슬퍼할지 웃을지는 몰라도 주인공은 이 모든 게 좋은 것이라며 아픔을 깨끗하게 승화시킨다. 단장님은 씩씩하게 굿바이!를 외치며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 방점을 쾅, 찍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유쾌한 끝인사가 어떤 낱말보다도 슬프게 다가오는 건 왜일까.
우리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렇게 저마다의 배경 가운데서 존재하는, 필연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이 ‘아픔’은 문학 속에서 또 다른 형태의 ‘아픔’을 목격하는 것으로 치유되는 것이다. 그 수혜를 받은 2014년의 한 독자이자 곡예단장으로써 나는, 선임 단장님에게 경례를 드린다. 그리고는 참으로 훌륭하고 멋진 놀음이었다고. 유예된 의무와 숱한 사회적 요구 사이에서, 자꾸만 위태롭고 약해지는 내 허리에 팔을 둘러 준 선임 ‘곡예사’를, 언제라도 응원하겠노라고.
3.
-아스팔트를 뚫고 피워낼 우리들의 꽃.
서두부터 굉장히 아름다운 표현들로 눈길을 휘어잡는다. 지금껏 읽어온 황순원의 소설들은 대개 해방 전후를 기점으로 6.25 직후까지의 역사적 사건들을 배경으로 한다. 그 중에서도, ‘카인의 후예’는 1946년 초 평양 근교의 한 농촌에서 일어나는 해방 직후의 토지개혁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우선, 줄거리의 가장 큰 맥은 지주계급의 몰락과 인민위원회의 성립, 인민재판의 살벌한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지주의 아들이 월남을 결심하는 마무리다.
장편인 만큼, 여러 가지 모티프가 되는 이야기들이 있는데 크게는 제목부터 드러나는 구약의 ‘창세기’와, ‘견우 직녀의 설화’가 그것이다. 나는 이 자극적인 제목이 주는 의미에 우선 주목할 수밖에 없었는데, 카인은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이브의 장자이자, 아우인 아벨을 죽인 최초의 살인자로 알려져 있다.
구약성서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원죄’의 개념은 황순원의 작품에서의 ‘소유욕’과 대응된다. 등장인물들은 땅 몇 덩이 때문에 미우나 고우나 함께 해 온 이웃을 죽이고, 6.25라는 동족산장의 전쟁도 모자라 눈에 불을 켜고 서로의 사상을 지적하며 너 죽고 나 죽자,하는 것이다.
인간은 ‘사람 인’ 자와 ‘사이 간’ 자를 써서 ‘인간 (人間)’ 이라고 한다. 사람들 사이에서야 인간이라는 것이다. 등장인물들 사이에는 사람 대신 조금이라도 가지려는 욕망만 들이차 있다. 이런 상황에서 ‘카인의 후예’ 라는 수식어보다 적절한 설명이 있을까. 사실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들은 저러한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을 시처럼 아름다운 문장들과 오작녀의 지고지순한 사랑이,세상적인 덧없음과 대비되며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지저분한 상황 속에서 주목할 만 한 건, 주인공인 지주의 자식 ‘박훈’과 마름의 딸인 ‘오작녀’ 간의 순수한 사랑이다. 진흙 속에서 피는 꽃처럼, 세상을 둘러싼 것들이 변하고 갑과 을의 위치가 바뀌어도, 오작녀와 그의 남동생 삼득이는 관계의 소중함을 지킨다. 그 소중함을 알아내고 만다. 칠월 칠석 하루를 기다리며 베를 잣는 ‘직녀’의 상징은 현실의 어려움을 참고 이겨 내는 ‘오작녀’라는 인물을 통해 뚜렷이 제시되는 것이다. 작품은 그들이 기어이 이어지는지, 에 대한 결말은 열어두고 있지만 그건 사실 의미가 없다. 이미 오작녀의 세월 속에서 피어난 ‘사랑’은, 그 과정은, 작품 속 지저분함을 말끔하게 해소한다. 그리고 그걸 보여줌으로써 다시 한 번 이 아이러니를 짚어낸다. 우리가 정말 낫을 들고 멱살을 잡아야 할 상대는 서로가 아니라 ‘속세를 향한 욕망’ 인 것임을.
이러한 시점에서는 더 이상 ‘토지개혁’ 이라는 당대의 문제는 인간이라는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현상에 불과할 뿐이다. 작금에 와서 ‘토지개혁’은 당장 현실의 ‘공무원 연금 제도’부터 ‘야스쿠니 참배’로 대표되는 옆 나라 일본의 역사의식까지, 수도 셀 수 없게 불어나 있다. 우리도 언젠간 이 뚜거운 아스팔트를 뚫고 꽃을 피워낼 수 있을까. 작품 속 오작녀의 지고지순한 사랑은 그 씨앗이 되어 독자들에게 심어진다. 남/여와 인종을 떠나, 나아가 종족과 시대를 떠나서, 진정한 의미의 ‘배려’로 그러한 위대함을 되찾는 우리가 될 수 있었으면, 인간이 되었으면, 하고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