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이념 62분 프리뷰.
가수는 곡 제목을 따라간다더니, 한 해도 십이간지를 따라가는 걸까요. 유독 병스러웠던 병신년의 마지막 날, 12월 31일 오전 12시. 드디어 테이크원의 '녹색이념'이 베일을 벗습니다. 정확히는 김태균의 녹색이념이지요. 리스너들 사이에서는 발매되지 않는다고 회자되던 3대장 시리즈가 이걸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버벌진트의 고하드, 이센스의 에넥도트, 그리고 이번 김태균의 녹색이념!
p.s)
키스에이프의 korean rap sucks 파문 이후로 테이크원은 녹색이념을 한번 갈아 엎은 바 있습니다. 녹색이념의 원제는 Green Ideology였지요. 하지만 키스에이프를 비롯한 하이라이트의 어처구니 없는 행보에 환멸을 느꼈는지, 아예 테이크원이라는 자신의 이름마저 한글로 치환합니다. 그래서 이번 앨범은 테이크원이 아니라 김태균이라는 이름으로 릴리즈 되었지요. 힙합을 한 장르에 국한하지 않고 하나의 라이프스타일로 보자면 태균이는 리얼힙합입니다. 이런 꼰대가 세상에 어딨나요. (칭찬입니다만.)
▲ 지난주에 열렸던 녹색이념 음감회.
2.
저희가 멋있다고 하는 랩퍼가 있듯이,
랩퍼들도 저마다 멋지다고 느끼는 모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저마다의 힙합이 있는 것 같아요.
랩퍼들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힙합이라고 할까요.
그래서 힙합의 정의는 MC마다 굉장히 다양합니다.
도끼에게는 아마 그게 '돈'이었던 것일 테고요.
테이크원에게는 힙합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신념'이었던 것 같아요.
왜 힙합이라면 뭐랄까, 꼰대감성 비슷한 게 있잖아요.
그런 고집같은 게 유독 돌출된 장르입니다.
그래서 테이크원은 오케이션에게 비수를 꽂고, 컴백홈을 내기도 했었지요.
조온-나 멋있었던.
3.
그래서 도끼를 비롯한 많은 최신유행 랩퍼들은 돈과 여자 얘기를 하지요.
"난 밑바닥에서 올라와서 이렇게 돈 많이 벌고 여자도 잘 먹어"
제 이른 생각입니다만, 테이크원의 이번 앨범을 하나의 키워드로 수렴하자면
다름아닌 '환멸'입니다.
돈과 여자, 다 싫진 않았는데 말이죠.
이게 내가 생각한 힙합인가
이게 내가 꿈꿔온 자리인가
이게 그토록 내가 되길 원했던 엠씨의 모습인가!
4.
뭐..이쯤이면 이미 다들 눈치채셨겠지만
제가 힙합에 매력을 느낀 건 돈과 여자 때문은 아닙니다.
그냥 부럽긴 한데 멋있다고 생각하진 않는 거죠. 뭐, 솔직히 부러워요.
크흑 면도 시발 부럽다 킬라그램 부럽다 레디 부럽다!
근데요. 멋있는 건 역시 엠씨죠. 고추란 말이에요.
그 고추가 내실 꽉 채워 보여주는 앨범이란 말입니다.
제가 힙합을 좋아하게 된 건 우선, 곡 하나에 가사가 많이 들어간다는 거였어요.
한 앨범을 돌리면 책 한권을 읽은 것처럼,
개인의 서사를 저의 서사와 비교대조 하면서 느끼는
그 쾌감을 정말 좋아했어요.
누구나 사연 하나쯤은 있잖아요.
하다 못해 재수를 한다거나, 뭐랄까요. 하다못해 공무원을 준비한다거나.
그런 과정에서 누구나 역경 하나쯤은 있는 겁니다.
랩퍼들이, 그 말 많은 랩퍼들이 역경 하나 없었겠어요?
그러니까 누구나 자기 얘기는 있게 마련이고 그걸 입체적으로 빚어내는 게
제가 생각하는 엠씨의 본분인 거죠. 다만 소설가나 에세이스트와는 다르게, 리듬으로
기술적인 술기로 풀어내니까 사람들이 열광하는 겁니다. 기술로만 채워진 가사는, 제게는 울림이 없어요.
작금의 힙합이 그렇습니다. 돈, 여자, 약 얘기로 점철되어가는 힙합을 보면서 할 말을 잃어갔어요.
5.
그런 의미에서 테이크원의 이번 앨범은 올 한해를 보내는 가장 멋진 선물 중 하나였습니다.
테이크원이 도끼나 슈퍼비처럼 부럽진 않은데요.
오케이션이나 키스에이프처럼 잘나가는 것 같지도 않은데요.
테이크원이 열라 "멋있어요."
p.s) 김태균의 녹색이념, 정식앨범은 1월 6일 릴리즈됩니다. 이미 예약구매했으니, 그 때 디테일한 후기를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최근에 오케이션의 백만원 무대와 라이브 논란이 있었지요. 또 그 전에는 소문내에서 니 이름 뺀다, 파문이 있었고요. 작금의 오케이션이 보여주는 모습과, 테이크원의 묵직한 앨범 한 방의 무게는 절절히 대조되네요.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