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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베이지 May 08. 2020

간절하면 이뤄진다는 예쁜 거짓말.

새 출발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을 위하여(나는 작가다 공모전)


2018년 9월 19일.


실질적인 '종전'을 알리는 속보니다. 각 분야에서 다양한 진단과 예측들이 쏟아집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종전보다는 조금 다른 사연으로 오늘을 기억하게 될 겁니다. 공식적으로 PEET 성적이 발표된 날이기 때문인데요. 저도 나름대로의 전쟁을 끝내는 기분으로 키보드를 잡습니다.

실제 응시자가 14,892명이라고 하는군요. 매년 통계적으로 1,500명 정도가 합격하는 시험입니다. 올해도 1,000여 명은 웃고 나머지 14,000여 명은 차게 식은 눈물을 훔쳐야 할 테지요. 다만, 그중에 부끄럽지 않은 한 해를 보낸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누구보다 간절했고, 절실했던 사람들. 그럼에도 결과가 좋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지금부터 닿지 못할 위로를 적어보려 합니다. 실은, 지난날의 저에게 보내는 이야기이기도 해요.

우선 제 소개부터 드려야 할 것 같아요. 저는 올해 75문항을 맞추었습니다. 백분위 합계로는 370 정도가 나오는군요. 갑자기 왜 묻지도 않은 결과를 얘기하느냐. 결국 세상은 결과를 바탕으로 제 말에서 설득력을 찾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제가 받아 든 초라한 성적표로 이런 얘기들을 해 보았자, 그걸 듣는 누구라도 저를 치졸히 여기지 않았겠습니까. 부조리하지만 엄연한 현실이지요.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예쁜 말은 레토릭에 불과합니다. 그마저 남용되어, 더는 누구도 위무하지 못하는.

자연스럽게 작년 얘기를 해 볼까요. 작년을 기점으로 모의고사 점수는 안정을 찾았습니다. 일반화학의 경우, 백분위로 환산한 점수가 90% 밑으로 떨어진 회차가 없었습니다. 유기화학과 생물학 85-95% 사이를 진자 운동하더군요. 기본서들은 손때가 묻어나 너덜너덜했고, 각 학원에서 진행하는 파이널 모의고사에서도 기복 없이 상위 10% 안에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합격자들이 말하던 그 느낌이란 게 제게도 온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엄혹합니다. 저는 본고사에서 보기 좋게 미끄러지고 말았습니다. 믿었던 일반생물학에서 60%대의 백분위를 받은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부터 제 얘기를 시작해 보려고 해요.











간절한 꿈은 이루어질까?



그래서 무엇부터 했을까요. 그렇습니다. 일반생물학 시험지를 펼쳐 원인 분석을 했습니다. 제가 오답을 선택하게 된 과정을 꼼꼼하게 들여다보았어요. 그래서 제 결론이 뭐였을까요. "1년을 다시 공부해도 두 문제 이상은 더 맞추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1년을 더 공부한다고 해서 제가 답을 도출하기까지 거쳤던 논리들, 그것들이 바뀔 것 같진 않았어요. 지금에서야 용기 내 꺼내보는 얘기지만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모든 기출문제가 명쾌하고 정직하지만은 않다." 그런 변명들보따리장수처럼 주변에 펼쳐 놓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돌아오는 말들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럼 결국 고득점을 얻는 사람들은 뭐냐." 

"어딘가 문제가 있겠지,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진 않을 게 아니냐." 

"노력이 부족했겠지. 누군가는 너보다 절실하게 했겠지. 충분히 간절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혹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이 모든 것이 다 어딘가에 쓰인다." 

"더 좋은 약대를 가기 위해 하늘이 마련한 큰 계획이다...."










아아, 제가 알 게 뭐예요.


그런 말을 해주는 사람들의 선의를 이해할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겨지는 얼굴을 감추기는 어려웠습니다. 노력이 부족했다는 얘기들, 간절함이 부족했다는 얘기들, 꿈은 이뤄진다는 식의 얘기들, 간절히 꿈을 그리면 그 꿈을 닮아간다는 얘기들... 그만큼 명쾌하고 손쉬운 진단이 없을 겁니다. 인상적이었던 그 말들은, 그만큼 문신처럼 선명하게 남았지요. 한 때 제가 의지했던 그 예쁜 말들은 오래도록 저를 괴롭혔습니다. 모자란 결과 앞에서, 그 어여쁜 말들만큼 폭력적인 말이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망가져 갔습니다.




꿈은 이뤄진다면서. 내 꿈은 결국 꿈이 아닌 것인가. 내가 책상 앞에서 보낸 세월은 노력도 아니고 간절함도 아닌 것인가.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더니 그럼 하늘에게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왜 나는 도울 수 없던 것인가...







부정적인 마음으로는 합격할 수 없을까?


저는 그런 1년을 보냈습니다. 비관과 비탄에 잠겨서 한 해를 보냈어요. "이번에도 잘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시험 전날까지 고개를 빼꼼 내밀었습니다. 작년 같았으면 저도 긍정이라는 뿅망치로 그것들을 힘차게 내리쳤을 테지요. 하지만 올해는 떠오르는 생각들을 내버려 두었어요. 그만큼 무력했습니다. 이번에도 결과가 좋지 않았다면, 세상은 제 성적표를 두고 명쾌한 진단을 내놓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으로 1년을 보냈는데 잘 될 리가 없잖아."라는 식으로요. 결과적으로는 점수가 제법 나온 모양입니다. 이제 세상은 "그것 봐, 그전에 해둔 것이 있으니 이렇게 보상받잖아".라는 식으로 전혀 다른 결론을 던져줄지도 릅니다.


이번에도 결과가 좋지 않은 분들, 시험지를 다시 펼쳐보아도 잘못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 어딘가에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외에도, 누구보다 절실지만 원하는 점수를 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은 여러분이 간절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닙니다.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도 아니고요. 긍정적인 생각을 하지 못해서도 아니고, 도덕적으로 살아오지 않아서, 혹은 신을 믿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세상은 이해해주지 않을 이야기지만, 주변에서도 끝내 믿어주지 않겠지만, 수험생의 실력은 반드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시험을 잘 본 사람들도 마찬가지예요).


사람들은 운에 관한 얘기는 본능적으로 꺼립니다. 인생은 도박이 아니니까요. 우리의 소중한 꿈을 불확실한 요소에 매단 채 항해하고 싶진 않을 겁니다. 사람은 예측 가능한 미래에서 안정감을 얻습니다. 그래서 좀처럼 앞을 알 수 없을 때, '불안'이라는 공백을 '계획'으로 메우려고 노력합니다. 비관적인 지표 앞에선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것들을 외면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어떤 결론이, 팔자소관이나 운을 통해 끝나게 되면 허탈해합니다. 동시에 그런 식의 결론은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지요. 논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과율이라는 것 역시 인간이 마련한 논리. 당장 우리가 존재하는 생태계를 포함해 인류가 적립해 온 역사는, 인과관계만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상관관계를 인과관계로 오진합니다. 이를 테면 시험 결과와 체력은 상관관계가 있을 테지요. 하지만 체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시험에서 떨어지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사이언스라는 저명한 학술지를 들어보셨는지요. 사이언스지는 암의 원인 중 하나로 '운'을 지목합니다.  이처럼 운이라는 요소 우리 삶 깊숙이 틈입해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세상을 지배해 온 논리구조를, 우리는 단지 불쾌하다는 이유로 외면해 왔는지도 모릅니다.




'운'의 복권(復權)

제 결론은 이렇습니다. 시험에서 운이라는 요소는 제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운이 무엇인지부터 정의해야 할 테지요. '운'은 비단 답을 찍는 단순한 행위에 한정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컨대 작년 생물학에서 출제된 문항들을 볼까요. 그동안의 빈도수를 고려해볼 때, 식생분진에서 기형적으로 많은 문항들이 출제되었습니다(바뀐 출제진과 연관이 돼 있습니다). 제 경우, 분자생물학이나 인체생리학에 대한 이해가 높은 편이었고요. 이처럼 그 해 출제되는 단원이랄지, 그날의 컨디션이랄지, 고사장 옆자리에서 다리를 떠는 사람이랄지, 그로 인해 내 머릿속에서 생겨나는 잡념들과 그간 길러온 여러 개념들의 상호작용이랄지.... 그 모든 게 어떤 면에선 '운'의 소관일지도 모릅니다.


이를테면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운'은 이런 겁니다. 세월호는 분명히 막을 수 있었던 인재일 테지요. 우리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질 수 있었던 참사였습니다. 하지만 죽은 아이들이 단원고의 그 아이들이어야 할 이유 같은 건 없습니다. 학생들이 노력다고, 간절하다고 피할 수 있던 종류의 것이 아닙니다. 신을 섬긴다고, 도덕적으로 살았다고, 긍정적으로 사고한다고 해서 대처할 수 있던 일이 아니었어요. 말 그대로 운의 영역. 그딴 게 무슨 하늘의 계획이겠습니까… 당사자들에게는 비극일 뿐입니다. 모든 일에 제각기 대응되는 단일한 이유가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세월호에 오른 아이들이, 용마고나 중앙고의 아이들이 아니라 특별히 단원고의 아이들이어야 할 이유가 있진 않듯이요. 행여 이유란 게 있다고 해도, 그것은 명쾌하고 단일한 종류의 것은 아닐 겁니다. 그 속을 투명하게 들여다보며. 전혀 연관이 없어 보이는 요소들이 포도넝쿨처럼 얽 있습니다. 심지어 원인 같은 것 없이 독립적으로 결과만 존재하기도 하고요.


사실 제가 작년에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거든요. 저는 관습적으로  남용되는 낙천적인 말들에 상처를 받곤 했습니다. 결과를 저울에 매달고, 대응하는 원인을 표독스럽게 찾아내야 만족하는 그 날카로운 시들에  베이곤 했습니다.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 지난날들은 헛되지 않고 다 어딘가에 쓰인다는 말, 저는 믿지 않습니다. 새 시작을 준비하는 분들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해제 : 이유와 운


결과는 우리 몫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아마 작년에 제가 합격했더라면 저도 쉽게 얘기했을 겁니다. 결과가 좋지 못한 사람들은 어딘가 이유가 있어서 그랬을 것이라고요. 분명히 공부법이 잘못됐을 거라고, 혹은 나만큼 노력하지 않았을 거라고. 나만큼 절실하지 않았고 나만큼 간절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요. 하지만 이제야 조금은 알아요. 세은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줄 세우지 않습니다. 우리의 뇌는 제각기 결과에 맞춰 합리화를 할 수 있도록 진화해왔다고 하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종종 본인의 행운을 실력으로 여기고, 본인의 불운에는 이유를 특정하려 노력합니다. 많은 연구결과에 따르면, 좋은 성적을 받은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결정적인 차이 같은 건 종종 찾아볼 수 없다고 해요. 누군가에게는 좋은 성적의 원인이 되었던 특질이, 또 누군가에게는 좋은 성적을 받지 못할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예컨대, 누군가는 운동을 통한 체력관리가 좋은 성적의 원인이었다 얘기할 것이고, 또 누군가운동 때문에 시간관리에 실패했다고 진단합니다.



올해도 결과 앞에서 더운 피가 솟구치는 사람들 있을 테지요. 감히 소매를 걷어붙이고 공감이니, 이해니 하는 말들로 수험생들을 위로하리라는 오만은 부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머릿속에서 안개처럼 떠도는 관념들을 어떻게든 그러모아 전하고 싶어 모자란 글을 남깁니다.


우리들의 결과에 이유 같은 건 없을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의 새로운 시작을 마음으로 응원합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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