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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베이지 Mar 10. 2016

[영화평] 장대를 들고 올라선 저마다의 줄 위에서.

영화 '하늘을 걷는 남자'와 청춘들의 줄타기.








1. 


10월 28일 개봉작,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하늘을 걷는 남자'를 보고 왔습니다.


평론가들의 높은 평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면서도,


대중들의 입맛에 맞게 간을 맞춰 낸 유려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보통 그 둘의 관계는 첨예하게 각을 세우지요. 


저메키스 감독의 전작 '백투더퓨쳐'나 '타이타닉' 급의 시대적 걸작이 아니고서야


평론가와 대중이 동시에 입을 맞춰 호평을 쏟아내는 경우는 드물게 마련이거든요.


'액트 오브 킬링'이 그렇고 반대급부로는 '마음이'같은 영화가 또 그렇죠.









오늘 소개할 영화 '하늘을 걷는 남자'는


살포시 숨겨놓은 빛나는 은유들과, 클라이막스 연출의 아름다움으로 


평론가와 대중들의 엄지를 실속 있게 챙겨가네요.










2. 



'실화'라는 포인트와 '줄타기'라는 소재가 만드는 구심력이 과연,


러닝타임 내내 관객들의 집중을 팽팽하게 당길 수 있을만큼 강력할까? 


걱정이 앞섰던 게 사실입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초반부는 지루한 구석이 없지는 않아요. 


늘어지는 지점은 부인하기 힘듭니다.


중간중간 3D를 살려내 관객들을 수축시키는 장면들과, 


지루해지려는 지점을 제대로 읽어낸 편집점들은, 확실히 탁월한 구석이 있지만 말이에요. 













한바탕 멋진 공연을 위해서는 역시 지겹고도, 고단한 연습과 준비가 필요했던 거겠죠.


사실 이미 마지막 러닝타임 20여분이 유명한 영화잖아요. 여러분들은 견뎌낼 수 있을 겁니다.


초반부의 지루함은 그 결에 자연스레 안착하여, 적당한 영양분을 공급해줍니다.


(엄청나게 장광설을 늘어놓는다거나 하는 식으로 지루한 게 아니에요. 이 부분은 뒤에 얘기해 보겠습니다.)















3.



쿠데타(coup d’État)를 위해 '공범'들을 소집하는 과정은


만화 '원피스'의 명대사인 "너, 내 동료가 돼라"를 닮아 있어요.


당연히 부당한 부분들과 비약이 많습니다. 


긴장을 주는 몇몇 유머는 다소 싸한 느낌마저 주더군요. 


(그게 또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조화를 이루기도 합니다.)









배역들의 아나키스트적인 요소들과 필립 역의 광기를 표현하는 부분들은 


훌륭한 점을 내포하고 있는 만큼, 전개에 있어서 관객들을 벙찌게 하기도 해요.


뜬금없는 지점에서 미친 듯이 화를 낸다거나, 전혀 재밌어야 할 지점이 아닌 곳에서 


코미디같은 연출을 시도하기도 하니까요.












애초에 굳이 왜 줄을 타려고 하는지, 


대체 무엇을 위해 카라비나(안전장치)를 쓰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려 하는지.


하나하나 짚어보면 정상적인 구석이 하나도 없어요. 








하지만 이 난해함은 사실 다분히 현실의 영역입니다.


당장 옆에서 함께 영화관을 찾은 친구놈의 목표도 헤아리지 못하는 제가, 


생판 타인인 조토끼를 무슨 수로 이해할 수 있겠어요.











이 부분에서 줄타기를 '꿈'과 대응시키려는 의도를 


지나치게 노출하는 대목들은 아쉬움을 자아냅니다. 


때때로, 감독의 친절과 해석은 오히려 관객들을 경직시키기도 하지요.


관객들을 조금 더 믿어줬어도 좋았을 텐데 말이에요.


꿈과, 불가능과, 현실에 관한 동어반복과 해설이 굳이 필요했을까요. 


진주처럼 숨은 은유들을 찾아내는 재미는 우리에게 맡겨뒀어도 좋았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영화가 훌륭한 점은 실화라는 점도, 


마지막 러닝타임 20분이 손에 땀을 자아내기 때문만도, 아닐 겁니다.














하늘을 걷는 남자의 가장 탁월한 부분은, 곳곳에 알알이 들이찬 은유들에 있는 것 같아요.















4.





우선 일전에 '매드 맥스'라는 영화에서도 소개한 바 있는 영단어, 





'redeem'을 되짚어보려 합니다.







여지없이 '구원'이라고 번역이 된 자막을 보면서 


양 언어의 간극에 분명하게 존재하는 통곡의 벽을, 엄숙히 실감했어요.














노트르담 사원에서의 성공으로, 자신이 잃은 목표와 자존감 모두를 


훌륭하게 복원한 조토끼는 후에 "..redeem myself."라는 대사로 그 지점을 회상합니다.


하지만 '구원'이라는 번역이 이 통렬함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을까요.











꿈을 향해 '나아갔다는' 이유만으로 망신을 당하고, 놀림과 손가락질을 받던 필립이 


처음으로 위대해지는 지점이에요.






redeem은 그런 단어입니다. 






















5.



영화 '하늘을 걷는 남자'는 어쩌면 도무지 왜 줄을 타는지, 그 목적을 알아야 하는 영화가 아니라


청춘들의 무모한 줄타기 그 자체에 관한 영화인지도 모릅니다.










교육부의 입맛에 맞게 배출되는 입시정책이라는 이름의 해일에 휩쓸리는 학생들과, 


취업전선에서 형형색색의 수저를 든 우리 청춘들은, 어쩌면 저마다의 줄을 타고 있는 지도 몰라요.


줄 밖에 선 사람들은 대체 왜 저런 줄을 타는지 좀처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냥 공무원을 준비하지 그러냐.


현실을 직시해. 가업을 물려받으면 좋잖아.


네 나이가 몇인데 꿈 같은 얘기를 아직 하고 있니.










그런 시선들에 정면으로 맞서는 '하늘을 걷는 남자'의 마지막 러닝타임 20분은, 멋진 한 방을 선사합니다.



그동안 대답할 수 없었던 답답함을 영화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름다움'의 형태로



우아하고 시원하게 대변해주는 거예요.
















페팃이 건넜던 빌딩은 무너졌지만, 페팃이 상공에 남긴 족적은 지워질 수가 없을 겁니다.


누군가가 꿈을 이뤄낸 곳이니까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꿈을 목격한 곳이기도 하니까요.


꿈은 어쩌면 이처럼 무모한 것이기도 하지만, 딱 그만큼은 아름다운 지도 모릅니다.


현실에 풀이 죽어, 잊고 있던 그 지점을 우아하게 살려낸 영화 한 편에 


오늘도 멀리서 감사를 드립니다. 









청춘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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