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별 고려인 네트워크 해부
# 1. 뿌리: 황무지에서 탄생한 경제 공동체
고려인 경제 생태계의 출발점은 1937년의 강제 이주다. 스탈린의 명령으로 약 17만 1,781명의 고려인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약 10만 명이 카자흐스탄으로, 약 7만 명이 우즈베키스탄으로 배치되었다. 이주 과정은 처참했다. 이들이 도착한 중앙아시아는 갈대와 늪으로 뒤덮인 황량한 벌판이었다. 그러나 살아야 했기에 고려인들은 갈대를 베어내고 수로를 만들어 불모지를 개간했고, 벼와 밀, 목화를 심었다.
강제 이주 시 가져온 볍씨 등 농작물 씨앗으로 수자원을 이용한 벼농사에 성공하여 중앙아시아에 쌀 등 식용작물을 보급했다. 농업은 단순한 생존 수단을 넘어 경제 공동체의 기반이 되었다.
집단농장, 즉 콜호즈는 고려인 경제의 핵심 조직이었다. 1939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 총 61개의 고려인 콜호즈가 만들어졌으며, 고려인 콜호즈는 현지 콜호즈보다 생산량에서 월등히 앞섰다. 우즈베키스탄의 북극성 콜호즈는 그 상징적 사례다. 북극성 콜호즈는 초기에 벼 재배에 주력하였으나, 1940년대 중반 이후 면화 재배에 집중하면서 성공적인 수확을 기록했다.
면화는 우즈베키스탄의 전통적인 주력 작물이었다. 이를 이끈 김병화는 1949년과 1951년에 '사회주의 노동영웅'의 칭호를 받았으며, 콜호즈는 1970~1980년대에 우즈베크 공화국의 대표적인 농촌 조직으로 자리매김했다.
고려인 농업의 특수성 중 하나는 '고본지'(고본질) 방식이다. 고려인들은 소련 경제 체제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형태의 임차농업 방식인 '고본지'를 통해 상당한 수입을 올렸으며, 이 방식은 소련의 국가 주도 농업이 내포한 총체적 비효율성을 개선하는 효과도 낳았다.
즉, 사유재산이 금지된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도 고려인들은 사실상 시장경제적 방식의 임차 농업을 실천하며 경제적 우위를 점했다. 이 '실용적 경영 감각'은 훗날 고려인들이 자본주의로 전환하는 국면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데 결정적인 자산이 된다.
# 2. 전환점: 소련 해체와 자본주의로의 도약
1991년 소련이 해체되자 콜호즈 체제가 붕괴되고 이농 현상과 공업화의 급속한 진전으로 집단농장은 그 중요성을 잃어 갔다. 그러나 이 위기는 고려인 경제 생태계의 또 다른 도약 계기가 되었다. 수십 년간 집단농장을 경영하면서 축적된 조직 운용 능력, 인적 네트워크, 그리고 '고본지'식 실용주의가 자본주의 시장에서 고스란히 재활용되었다.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은 1991년 소련 붕괴 후 교육열과 성실함을 인정받았다. 부지런하고 믿음을 준다는 이미지를 기반으로 정계, 재계, 학계 등 여러 분야를 이끌게 되었다. 특히 재계에서의 부상은 눈부셨다. 카자흐스탄을 구성하는 130여 개 민족 중 고려인은 0.6%에 불과하지만, 매년 포브스가 발표하는 카자흐스탄 부자 50인 중 15~20%가량이 고려인이다. 소수 민족이 국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이례적인 현상이다.
2025년 현재 우즈베키스탄에는 약 18만 명의 고려인이 강한 공동체 결속력을 바탕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카자흐스탄에는 약 12만 명이 거주하며 농업과 상업 분야에서 두드러진 기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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