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울까 말까?

사진첩 속 '그/그녀'의 흔적 삭제 플랜

by Miracle Park


지울까 말 까라는 질문 앞에서 손가락이 멈춘다. 사진첩을 스크롤할 때마다 둘이 웃던 장면이 불쑥 떠오른다. 커플 사진과 여행 기록은 그때의 공기와 냄새까지 다시 불러낸다. 지우면 배신 같고 남기면 미련 같다. 하지만 망설임에도 순서가 있듯 추억에도 정리의 순서가 필요하다. 억지로 잊지 말고, 제대로 보내기로 한다.

나는 먼저 숨을 고른다. 지금 지우면 후회할 가능성이 있는지부터 묻는다. 이별의 초반에는 감정이 모든 판단을 덮는다. 그래서 일단 냉각기를 둔다. 일주일 혹은 한 달. 그 기간 동안 사진첩 접근을 줄이고 앨범을 임시로 가린다. 눈앞에서 사라진다고 역사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마음이 정리될 시간을 확보할 뿐이다.

냉각기가 끝나면 분류부터 시작한다. 커플 사진, 단체 사진, 풍경과 음식, 기록용 캡처. 이렇게 네 종류로 나눈다. 커플 사진은 핵심의 영역이고 단체 사진은 타인의 추억이 섞여 있다. 풍경과 음식은 나의 시간이고 기록 캡처는 실용의 기록이다. 분류가 끝나면 나는 선택의 기준을 세운다. 나의 마음을 살리고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기준이다.


예를 들어 단체 사진은 동의 없이 공개하지 않는다. 커플 사진은 나의 치유에 방해가 되면 비공개로 옮기거나 안전한 보관함으로 이동한다. 풍경과 음식은 관계의 서사가 제거되면 나의 삶으로 남는다. 필요한 캡처는 별도의 폴더로 옮겨 실용의 영역에 묶는다.

이제 보관과 삭제의 플랜을 실행한다. 첫째로 보관이다. 지우지 못하겠다면 장기 보관함으로 옮긴다. 휴대폰이 아닌 외부 저장소에 비밀 폴더를 만들어 날짜와 주제를 붙인다. 예를 들면 제주여행 2023 같은 식으로 단순하게 붙인다. 암호를 걸고 휴대폰에서는 표시되지 않게 한다. 일상에서 충동으로 소환되지 않도록 거리 두기를 하는 것이다. 보관은 미련이 아니라 유예다. 언젠가 열어볼 수 있지만 지금은 굳이 보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둘째로 삭제다. 삭제는 세 단계로 진행한다. 우선 쓰리샷 정리라고 이름 붙인다. 같은 포즈의 연속 사진에서 가장 덜 흔들리고 덜 아픈 한 장만 남긴 뒤 나머지를 지운다. 다음으로 노출 정리다. 내 프로필 사진과 온라인 공간의 공개 게시물에서 관계를 암시하는 이미지를 모두 비공개로 전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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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전문작가. 현지 취재ㆍ르포ㆍ출간ㆍ강연으로 실크로드의 땅, 중앙아시아의 신비를 문장으로 풀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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