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운 Oct 12. 2021

나에게 불친절하면 찾아오는 공황

왜 슬픈 얘기를 웃으면서 하세요?

년 전 마음이 울렁거려서 상담을 받으러 갔습니다. 상담사는 왜 마음이 울렁거리는지, 무엇이 나를 힘겹게 하는지 이야기를 해 보라고 했습니다. 담담히 나의 이야기를 시작했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상담사가 내게


"말씀하시는 내용을 듣고 있자니 듣는 제가 화가 나고 슬퍼지네요. 그런데 로운님은 자기 이야기를 하는데 왜 남 얘기하듯 하시죠?"


"제가 그랬나요?"


"본인은 잘 못 느끼시죠? 왜 슬픈 이야기를 웃으면서 하세요?"


상담사가 일깨워 주기 전까지 몰랐습니다.


'내가 나의 이야기를 할 때 남의 말처럼 웃으면서 하는구나...'




자라는 동안  '남의 이목'을 신경 써야 하는 성장기를 살아냈습니다. 한 동네에서 30년쯤 살면 아는 사람 세는 것보다 모르는 사람 세는 게 더 빠릅니다. 어디를 가든 부모님께 소식이 전해지고 비밀이 없는 삶은 꽤 피곤했죠.


칭찬받으며 살고 싶었어요. 잔소리, 지적, 간섭... 이런 것들은 절대 사절이었죠. 그래서 무작정 열심히 살았습니다. 화가 나도 웃고, 슬퍼도 웃었죠. 내 속을 들키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썼습니다.


세월이 흐르니 희로애락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 병이 되었습니다. 상담사는 그 부분을 지적했죠. 그리고 '있는 그대로, 감정이 시키는 대로 표현하라'라고 숙제를 줬습니다. 그 후 나는 그 상담사를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숙제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을 억지로라도 해보려고 시도를 해 봅니다. 그런데 두렵습니다. 마음껏 표현했을 때 소중한 사람들을 잃게 될까 걱정하며 지금도 여전히 제자리걸음입니다. 급기야 몸에 탈이 났습니다. 약을 먹으며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보듬어주고 싶어서 끊임없이 상담 공부를 합니다. 그런데 정작 내 마음은 아프다고 말합니다. 상처가 파이고 파여 곪고 있어요. 나를 품어 도닥여야 할 때라고 몸이 말을 건네는데 문제를 알면서도 해결점에 접근하려는 시도조차 못했습니다.


이상한 것은 나는 정말 괜찮았어요. 슬프지도 화가 나지도 외롭지도 않습니다. 가정도 가족도 너무나 평안합니다. 겉모습도 마음까지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의 몸은 아프다고 해요. 이상하죠?





나에게 묻고 또 묻습니다.

'도대체 뭐가 문제니?' 

그런데 마음은 답을 주지 않습니다.




앵글이를 키울 때 내가 보는 앞에서 아이가 같은 반 친구에게 뺨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앵글이는 피하지도 울지도 않았어요. 아무래도 이상했죠. 그래서 유명한 상담실을 찾았습니다.


진단명은 [공격성 zero]였어요. 상담사는 공격성이 없으면 자기 방어를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적어도 '나'를 지킬 수 있는 정도의 공격성은 갖고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앵글이는 주 3회 놀이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상담사는 내게 원인이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엄마가 아이를 키우며 희로애락을 제대로 표현해주지 않으면 아이가 감정을 배울 시기에 오류가 있는 감정을 인식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공격성 zero]인 엄마가 [공격성 zero]로 아이를 키우고 있는 것이죠. 치료 이후 아이는 좋아졌습니다. 자존감이 높고 자기를 사랑하는 건강한 아이로 잘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현재도 나를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의 하루는 평안합니다. 평안하다 못해 고요하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의사만 내가 아프다고 합니다. 나는 의욕이 있고 부지런하며 배움의 열정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공황장애 약을 처방해 주셨복용 중입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는 다른가 보구나."


나는 사람들을 만나고 가르치고 나누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니, 생각해보니 낯선 모임이 차라리 나은 것 같기도 합니다. 모임에서 나는 사교적이고 친절한 선생님입니다. 여러 번 거푸 물어도 짜증이 나거나 미루는  없습니다. 열 번, 백 번 같은 것을 물어도 한결같이 친절하게 답해줍니다. 그래서 꽤 인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래된 모임이거나 오래도록 유지해야 하는 모임에서는 낯을 가립니다. 실수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불안 수치를 끌어올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오랜 관계를 끊어내는 방법을 쓸 수는 없지 않을까요? 끊임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깨닫게 된 진리 하나가 "감사하는 삶"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가 빠지면 외로움, 슬픔, 우울, 불행이 깃드는 것 같습니다. 소소한 일상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꺼냈더니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언제나 행복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생활 가운데 감사를 찾는 것은 비교적 쉽고 마음을 평안하도록 이끌어 줍다.


아침에 눈을 떠 어스름 밝아오는 하늘을 볼 수 있는 것도 감사,

큰 아이를 깨워 따뜻한 밥에 국 한 술 말아준 것을 아이가 불평 없이 뚝딱 먹고 등교하는 것도 감사,

변변찮은 배려에도 '엄마, 사랑해~'라고 말하는 막둥이의 마음씀도 감사,

어려운 시국에 위험한 일을 하지 않아도 생계가 유지되도록 애써주는 남편이 있음에도 감사,

누구 하나 아픈 사람 없이 평화로운 일상이 유지되는 것도 감사.


모든 일에 감사할 일이 가득합니다. 일상의 반복이라 깨우침이 부족해서 감사할 줄 모르고 살아가니 행복이 곁에 있어도 몰랐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음을 정돈하니 울렁거림이 조금씩 사그라듭니다. 가슴이 두근대고 순간순간 압통이 느껴지던 통증도 잦아드는 것 같습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감사의 삶을 살기 위해 시선만 바꿨을 뿐인데 마음이 평안해지고 삶이 편안합니다. 어쩌면 늘 안했는데 나의 불안이 스스로를 괴롭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음이 여린 사람들이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은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내편 들어주기'입니다.


대부분의 성인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항상 문제를 인식하고도 직접적으로 내뱉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 순리적으로 해결되기를 아파하며 기다리는 것을 선택합니다. 갈등이 두려워서 맞서기보다는 에둘러 피해 가고 상대가 잘못을 스스로 인정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항상 거기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그 자리에서 억울한 것, 섭섭한 것, 오류가 있는 것들을 밝히고 해결하면 되는데 참아버렸으니 마음에 상처가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내 마음앓이를 합니다. 바보 같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행위일 수도 있습다. 그런데 알면서도 제자리걸음입니다.


하지만 오늘도 나는 계속해서 나를 사랑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문제도 알고 어떻게 하면 마음이 아프지 않을지도 알지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에 굳은살이 생기게 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기에 뚜벅뚜벅 걸어봅니다.


제가 선택한 방법이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갈등을 '갈등을 일으키는 것으로 풀어나가기'에는 잃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손해가 나더라도 되도록 끌어안고 감싸면서 살아가는 것이 더 '나 다움'이라서 그저 나 답게 살고 싶습니다. 진심은 통하는 법이니까요...




마음의 자유함을 꿈꾸는 로운입니다.



사진출처 : 로운과 픽사 베이














작가의 이전글 내가 부리는 소소한 사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