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후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이상하게도 엄마는 엄마인데, 아버지는 왜 아빠라고 안 불러지는지 모르겠다. 전화도 그렇다. 엄마한테는 '안부 차 전화한 거라'며 실없이 전화도 잘하면서 아버지께는 일이 있어야 전화를 하게 된다. 오늘도 그렇다. 아버지 마음을 좀 흡족하게 해 드리고픈 마음에 라디오에 사연도 올리고 글도 쓴 거였는데 막상 아버지께 말씀드리자니 멋쩍다. 참 이상하다.
그래도 직접 말씀드리는 게 엄마를 통해 듣는 것보다는 '흐뭇하시겠다.' 싶어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 어디세요?"
"어~ 그래. 로운이냐? 나야 뭐... 맨날 밭이지."
"아버지... 제가 아버지랑 있었던 일을 글로 좀 써봤어요. 라디오에 일화를 보냈는데 채택이 돼서 방송에 소개가 된대요."
"라디오에? 아이코 저런... 뭐 말할 거리가 있나?"
"어렸을 때 이야기 좀 썼어요. 그리고 글을 하나 적었는데 다음 뉴스 피드에 올라가서 조회수가 꽤 나오네요? 아버지 뒷모습 스타 되셨어요..."
"아이코... 허허허... 잘난 따님 둔 덕에 아빠가 스타가 되었구나~"
"아버지, 까똑으로 글 쓴 거 보냈어요. 읽어보세요."
"그래, 내가 글 읽어 볼게."
"네. 아버지. 쉬엄쉬엄 하세요."
"그래. 그러마."
아버지의 말씀은 덤덤하게 들렸지만 싫지 않은 내색이시다. 그리고 라디오 방송이 있던 날 아침이 밝았다. 아버지와 함께 한 가난했던 어느 날의 뭉클하고 가슴 시린 이야기가 전파를 타고 흘렀다. 내가 쓴 글이고, 퇴고를 하느라 몇 번이나 읽던 글인데 역시 양희은 님, 서경석 님의 음성을 타고 흐르니 감회가 새롭다. 내 글에 내가 뭉클해서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보니 말이다. 글 소개는 그렇다 치고 마지막 두 분의 평이 꽤 재미지다. 덕분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서경석 님이 어린 나였다면 달걀을 안 먹는 게 아니라 일부러 찾아서라도 더 챙겨 먹었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웃음이 뻥~ 터졌다. 역시 서경석 님은 근성이 있으시다. 딸아이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더니 딸아이 말이 '그런 저력이 있으니 공부도 잘하지 않았을까? 육사 출신이잖아?"라고 하는데 그럴싸한 말 같고 고개가 끄덕여졌다. 살면서 깡다구가 쫌 있는 것도 괜찮은 듯싶다.
"로운아~ 아빠가 네가 보내 준 글 읽어봤어. 아빠가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아닌데 글을 너무 잘 써 줬더구나. 낮에 전화줄 때 옆에 친구가 밭일 도와주러 왔었거든. 글 잘 쓰는 효녀 뒀다고 칭찬을 하더구나. 아무나 라디오 사연에 뽑히는 게 아니라며 친구가 더 신나 하더라. 고맙다. 로운아~"
아버지께서 그렇게 긴 말씀으로 이야기한 적이 있었나? 생각해보니 별로 없었다. 아버지는 늘 묵묵히 제 걸음을 뚜벅뚜벅 가시는 분이셔서 어릴 때는 많이 무서웠었다. 세월이 지나고 보니 묵직한 마음 안에 따뜻한 정이 많았을 텐데 표현하며 살지 않으셔서 감정표현에 서투셨을 뿐 마음은 정도 많고 따뜻한 분이셨던 것을 나이 들고 알게 되는 것 같다.
아버지가 어린 시절 아들들은 감정 표현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다. 남자는 말 수도 없어야 하고, 듬직해야 하며, 울지도 못하게 했다.
"사나이는 평생 세 번 우는 거란다."라는 "말도 안 되는 훈육을 당하던" 시절이었으니 말이다.
11남매 중 세 남매가 하늘나라로 먼저 가고, 남은 8남매의 장남으로 사시느라 일평생 허리 펼 새 없이 살아오신 아버지시다.
어릴 때 아버지는 무섭게 느껴졌었지만 아버지의 삶은 존경스러웠다. 일평생 제 욕심 내는 삶을 단 한 번도살아본 적 없으신 아버지는 어릴 때는 부모형제를 챙기고, 가정을 이룬 후에는 부모형제와 더불어 자신의 가족을 돌보시며 평생을 살아오셨다.
이제는 좀 더 누리며 여행도 다니고 맛난 것도 드시면서 사셨으면 싶지만, 땅을 일구며 정직하게 뿌린 대로 거두는 삶에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하나님의 은혜가 그 안에 머문다." 시는 아버지는 여느 위인전의 위인보다 존경스럽다.
오늘도 새벽같이 일어나 부지런히 살아가고 계신 아버지를 뵈며 느슨해진 나를 돌아보게 된다. 숨 쉴 틈 없이 내달려서도 안되지만 맥없이 보내서도 안 되겠다. 나이 들수록 시간의 소중함이 더 귀하게 다가온다. 매일의 하루, 의미 있는 오늘을 잊지 말고 살아야겠다.
P.S. 아버지께서 핸드폰 자판이 익숙지 않아 서툰 솜씨로 맞춤법이 다 틀린 문자를 주셨어요. 단톡으로 친구들에게 보내신 문자가 제게도 온 듯요...
"딸이 여섯 살 때 일어난 계란부침 사건을 43년 전의 쓰라린 아픔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기록하여 방송 응모한 게 당첨되어 방송을 탔누먼. 자세한 내용은 기회가 되면 하고 내용을 들어보게. 아로니아편과 계란 이야기 일세. 편히 쉬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