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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Sep 02. 2021

"아버지~ 이쯤 되면 소일거리가 아니잖아요."

아버지의 텃밭

아버지는 평생을 부지런히 사셨다. 일생 몸무게가 58kg이신 아버지는 뚱뚱해져 본 적도 없으시다. 하루 4시간 잠을 주무시고 20시간 움직이신다. 젊은 날 책을 읽고 글을 쓸 때도 그 체격 그대로 셨고 80을 바라보는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아버지의 부지런함 때문에 아침잠이 많은 어머니와 오빠는 많이 힘들어했다. 보통의 사람들과 굳이 비교하자면 아버지만큼은 아니어도 나머지 세 식구는 부지런한 편이다. 워낙 넘사벽 아버지를 만나 게으르다는 소리를 들었을 뿐...


우리 집에서 나는 유일하게 '아버지의 신임을 받는 자'였다. 이유는 아버지의 시선이 움직이는 곳에 언제나 내가 있었다. 사실 겁이 많던 내가 아버지 호령이 무서워 미리 알고 움직였을 뿐, 엄마나 오빠의 움직임과 거의 비슷비슷하다. 눈치 꽤나 밝은 편이라 100m 전방에서 들리는 아버지의 발소리에도 반응을 했었던 것을 아시려나 모르시려나...


은퇴 후의 삶을 땅을 일구며 살고 계신 아버지는 소일 삼아 텃밭을 메신다고 시작하셔 놓고 일이 점차 커져 지금은 1000평이 넘는 밭을 홀로 일구신다. 몇 년 전 농협에서 아로니아를 심으라고 권해서 2000그루가 넘는 아로니아를 심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아로니아는 이제 홀로 가꾸기 버거울 만큼 자랐다. 코로나가 아니라면 인부의 도움을 받았겠지만 작년과 올해, 뙤약볕에서 홀로 아로니아와 고군분투 중이시다.


가족이 먹을 먹거리를 해로운 약을 뿌려 키우면 되겠느냐며 매일 당신 키만큼 자라나는 풀을 메느라 허리가 다 휠 지경이다. 그래도 아버지의 애정을 먹고 아로니아는 쑥쑥 자라고 이젠 제법 농부가 다 되셔서 아로니아의 당도도 높아지고 제법 실하게 잘 크고 있다. 그런데, 역시 난 딸인가 보다. 아로니아가 잘 크던 말던 아버지가 더 걱정이다.


땡볕에서 종일 일하시는 아버지의 건강도 걱정이고, 늘어가는 밭일로 연일 비지땀을 흘리시는 아버지를 뵙는 것이 영 불편하다. 마음은 도와드리고 싶은데 어릴 때부터 잔병치례가 많았던 터라 몸이 마음처럼 앞서 가지 못하는 내가 영 못마땅하다.



아로니아 밭의 풀을 메느라 허리 필 새 없는 아버지


첫 해에는 아로니아 생산에 희망이 보였었다. 매체에서 아로니아가 건강에 좋다는 이야기를 채널을 돌릴 때마다 접할 수 있었고, 아로니아를 재배하는 생산자가 많지 않아서 노력한 보람이 있었다. 그런데 좋다는 이야기가 들려오니 아로니아를 심는 분들이 많아졌고, 해를 거듭할수록 아로니아의 값이 떨어졌다.


올 해는 다른 해 보다 아버지의 밭 일구는 솜씨가 좋아져서인지, 사랑을 더 많이 줘서인지, 둘 다인지 모르지만 아로니아의 당도가 다른 해 보다 곱절은 높아졌다. 열매도 굵고 실한 것이 생과로 그냥 먹어도 떫은 맛이나 신 맛이 훨씬 덜하다. 노력한 공을 어떻게 값으로 다 평가할까 싶을 만큼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잘 자라주고 고마운데 물량의 소비가 걱정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아로니아

아로니아는 말리는 것도 다른 채소들과 다르다. 당도가 있어 냉동 후 말려야 하고, 고추는 4일 정도 저온으로 말린다면 아로니아는 당분의 끈적임 때문에 열흘은 말려야 한다. 보통 방앗간에서는 고추를 주로 갈아주기 때문에 아로니아는 경동시장 약재상에 가야 가루로 만들 수 있어 손이 많이 간다. 소작으로 시작한 밭일이 점점 해를 더할수록 커져만 간다. 아버지의 노력을 기쁨으로 돌려드릴 아이디어를 짜내느라 나는 오늘도 고군분투 중이다.




아로니아 주변으로는 고추를 심었다. 올해 고추 농사도 풍년이다. 식물도 생명이라 사랑을 주니 쑥쑥 잘 자라고, 새벽 4시부터 밤 8시가 되도록 열매 하나하나 대화를 나누며 키워서인지 고추의 때깔마저 찬란하다. 주변 지인들이 해마다 고추를 주문해 주셔서 제 작년에 건조기와 저장고를 컨테이너로 맞추셨다. 태양볕에 말려보니 고추 색깔도 검은빛이 돌고 반으로 갈라보니 씨앗에 곰팡이가 생기는 것들이 더러 있어 가족들 먹일 수 없게 망쳐버리셨다며 거금 들여 마련한 건조기와 저장고다. 내 가족 먹이는 마음으로 씻고 또 씻고, 고추 하나하나 물기를 닦고 또 닦아서 건조기에 저온으로 4일 간 말리는 작업이 만만찮다.


텃밭에서 고추를 씻고 계신 아버지


아버지는 워낙 성격이 깔끔하셔서 그만 씻어도 된다 해도 씻고 또 씻고를 반복하신다. 곁에서 어머니의 잔소리가 이어져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일일이 하나하나 닦으시고 조금만 흠집이 난 고추가 있으면 거침없이 분류하신다. 그렇게 아버지의 애정이 담긴 고추는 못난이는 버려지고 예쁜이만 아버지의 손을 거쳐 목욕을 하고 건조망에 올려진다.


건조기로 들어가는 고추 / 건조되어 태양볕에 반나절 볕을 쬐는 고추


4일 간 건조기에 말려진 고추는 태양 볕에 반나절 햇볕을 쬔다. 완벽하게 수분을 날려주는 과정이라고 하셨다. 태양볕에 수분을 한 번 더 날려주면 저장기간이 길어진다고 하셨다. 몇 해 동안 고추를 말리는 과정에서 터득하신 비법이라며 자랑스레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에는 장인의 정신이 느껴진다. 텃밭 10년 차 부모님은 농사꾼이 다 되셨고 나름의 노하우도 생기셨다.


아버지의 고추 밭 / 실하게 잘 여문 고추의 붉은 빛깔 / 자연의 색을 어찌 이리 아름다운지.


고추밭의 고추가 여물고 색깔 옷을 갈아입는 모습을 보면 '힘이 쑥쑥 난다'시는 아버지께 조금 힘이 될 만한 이벤트를 해 드리면 기뻐하실까 생각해 보다가 [모두 맑음]님의 라디오 이벤트가 생각이 났다. 아버지와의 사연을 보냈는데 덜컥 당첨됐다. ("모두 맑음님 감사해요.") 어젯밤 작가님이 전화를 주셨다.


"사연이 선택되어 9월 3일(금)에 방송되니 청취해 주세요."


반신반의하면서 보냈는데 마음이 전해졌나 보다. 기쁜 소식을 부모님께 전해드렸더니 집에 라디오가 없으시다고 하셔서 핸드폰으로 들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렸다. 여름 내 농작물을 가꾸시느라 허리 필 새 없으셨는데 라디오 사연 들으시며 잠시 휴식을 취하시면 좋을 듯하다. (그 핑계로 아버지께 소고기 사드려야겠다.)



1945년에 태어나 6살 어린 나이에 전쟁(6.25 / 1950.06.25)을 겪고, 폐허가 된 땅에서도 꿋꿋이 살아 낸 부모님... 그 시절을 살아 내신 많은 부모님들이 지금 80을 바라보는 어르신이 되셨다.


8남매 장남으로 동생들을 거두며 공부시키고 먹이느라 제 몸 돌볼 새 없던 아버지는 어머니를 만나 결혼 후부터 학교를 다니셨고 어머니는 아버지 학바라지를 20년 동안 하셨다. 아버지를 강단에 서도록 하신 어머니의 남편 학바라지는 아버지를 끝내 목표한 곳으로 이끄셨다. 그 숱한 세월의 고생을 몇 줄의 글로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자식의 마음은 이제 좀 고단한 삶을 내려놓고 여생을 즐기다 가셨으면 싶은데, 부지런히 열심히만 사셨던 우리 부모님은 경제적 여유가 생겨도 당최 낭비라고는 모르는 삶을 사신다. '아이고, 다리야. 아이고, 허리야' 하시면서도 택시 한 번 못 타시는 부모님을 뵈며 괜한 역정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그 순간 택시 탈 생각이 미처 떠오르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런 걸 보면 '누리고 써 본 사람이 쓰고 누리며 사나 보다' 싶어 더 마음이 짠하다.


채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르릉~'

"어~ 왜?"

"엄마~ 내일 라디오에 아버지 이야기가 나올 거예요. 사연을 보냈는데 채택이 됐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 무슨 내용인데?"

"내용은 좀 슬퍼. 하필 슬픈 사연을 보냈네?"

"슬퍼? 뭣이 그리 슬프대?"

"응. 나 계란 안 먹는 사연."

"아~ 그거. 그때는 사는 게 워낙 어려울 때라..."

"그렇지."

"내 속이 아파서 애를 그렇게 때렸지 뭐냐."

"내일 나오면 한 번 들어보세요. 주말에 소고기 먹으러 가요."

"그래... 내일 꼭 챙겨 들으마. 주말에 보자."


사는 게 뭐 별 거랴... 일상에서 옛이야기 나눌 수 있게 아직 부모님 건강하시고, 어릴 때는 아팠지만 지금은 옛말 하며 추억을 더듬을 소소한 일상들이 되었으니 그러면 된 거지. 내일의 이벤트가 부모님께도 잔잔한 추억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오후, 부모님께도 옛 생각 회상하며 한 숨 휴식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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